정적(靜的)인 동적(動的)인 인생 가운데, 나는 동적인 삶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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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내내, 개인적으론 예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의 내용을 머릿속에 한참 동안 떠올려야 했다. 인생의 이름을 내걸고 ‘가장 감동적이었던 책 10권’을 선정하라면 그 안에 반드시 포함될 게 확실한 책, 고교 1학년 때 처음 읽은 이후로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스무 번은 넘게 읽었다고 기억나는 책, 너무 낡아져서 버리게 된 이후로 다시 구입하겠다고 다짐했었는데도 아직까지 구입하지 않았다는 게 이제야 묵직한 반성으로 다가오는 책 한 권….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한 뒤에 책 제목을 언급한다면, 그 책에 대한 ‘간접홍보’가 아니냐는 항의 같은 게 날아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30년 넘게 흘러간 옛 시절의 감동을 얘기하는 것마저 굳이 조심해야 한다는 점 또한 어색한 모습인 것 같기에, 더욱이 이 자리에 필요한 건 그 책 1면의 절반 정도의 내용뿐이기에 일단 풀어내는 마음으로 적어가겠다.
일본의 작가 나가이 다카시의 자전적 소설 <영원한 것을> 내용 중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금 그 책이 곁에 없기에 정확한 묘사는 아닐지 모르겠는데, 제2차 대전에 참전해서 중국 땅 어딘가에서 전쟁을 벌이던 일본군 어느 군의관 앞에 이런 군인이 환자로 등장한다. 왼손이 거의 망가진 환자는 손을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고, 그 환자는 손을 절단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며 항변을 한다.
손을 즉시 절단하지 않으면 죽을지 모른다는 군의관의 절박한 판단 속에서도, 그 환자는 그럴 바엔 죽는 게 낫다는 발언을 계속한다. 그래서 군의관이 물었다. 사회에서 너의 직업이 무엇이었냐고. 그제야 그 환자는 대답을 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라고…. 그 말에 이어지던 다음 문장이 그 책의 가치를 개인적 인생에 깊이 각인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목 놓아 흐느껴 우는 건 군의관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발레선생님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에게 가장 소중한 건 무엇일까? 당연히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두 손’이다. 그렇다면 발레리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정말 우매한 발언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왜냐? 해답은 이미 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음악적 선율을 표현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 인간의 희로애락 모든 감정을 표출해내는 아름다운 몸매의 육신이 최고의 전제조건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발레리나의 육신에 장애가 생긴다면? 그래서 인생의 존재의미를 몸으로 표현할 수 없게 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구족화가’나 ‘패럴림픽’ 같은 용어가 낯설지 않게 된 건, 장애가 더 이상 ‘불가능’과 동의어의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는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을 만큼의 많은 이들이 신체적 장애를 인생의 장애로 느끼지 않으며 활동하고 있음을 매번 확인하게 된다. 개인적인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A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A를 전혀 못하는 대신 B를 잘하는 이들도 정말 많다. 물론 A와 B가 인생의 모든 척도는 아니다. 그 대신 C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D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잠재력과 능력을 통해, 당당한 세상의 1인으로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체장애 1급으로 휠체어에 앉아 생활을 한다고 했다. 직함은 샬롬선교발레단 단장이고,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다면 발레선생님이다. 발레를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지체장애 1급이라는 것, 학생들을 가르치고 후학들을 이끌며 강의하는 사람이 휠체어에 앉아 생활해야 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 - 이건 언뜻 서로 연결이 잘 안 되는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어떻게 몸동작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나름의 고난도 테크닉 같은 걸, 직접 보여주는 시범 없이 어떻게 전수할 수 있을까? 발레라는 장르에 완전 문외한인 입장으로 볼 때도, 다리를 뒤로 길고 높게 올리는 동작 같은 게 단순히 올렸다 내리는 게 아닌 세세하게 계산된 각도와 유연성 등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런 걸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완성시킬 수 있을까?
궁금증이 많아질수록 결론은 한 가지로 모아진다. 어서 직접 만나자는 것, 그래서 경기도 안산시 모처에 있는 샬롬선교발레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인공을 만났다. 휠체어에 앉아 밝은 얼굴로 맞이하는 김수미 발레단장과 함께 연습실 한쪽에 대화의 자리를 잡았다. 중요한 공연 두 개가 잡혀 있어서 정말 바쁘다고 했다. 텅 비어 있던 연습실은 이내 밀어닥치듯 들어오는 학생들로 인해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학생들에게 개인연습을 주문한 김수미 씨는 공간의 문을 닫고 대화의 준비를 마쳤다. 3주 전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후유증 때문에 고생하는 중이란 뜻밖의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저희가 세종홀과 청계광장 등에서 계속 공연을 했는데, 그 공연 시작 전날에 사고가 났어요. 그런데도 입원을 안 하고 계속 강행을 했어요. 그때는 잘 몰랐죠. 제가 긴장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아이들도 다 제가 관리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긴장이 풀리고 나니까 이제 아프기 시작하더라고요. 이제야 몸이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겠죠. 여기가 좀 아프다, 여기도 좀 아프다, 이런 식인데, 공연 준비를 해야 하고 입시를 앞둔 아이들도 있어서 여전히 긴장을 풀 수가 없네요.”
지체장애 1급이고 걸을 수 없는 상태라는 건, 그가 중도장애를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23살이던 해 11월에 건물에서 추락을 해 장애를 갖게 됐다는데, 그건 23살 어느 날 ‘이전’과 ‘이후’가 180도 달라진 인생으로 전개됐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화의 시점을 어린 시절로 먼저 돌려보았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어떤 아이였다고 기억하는지 물으니까, 열정적이고 끈기 있고 최선을 다하는 아이였단다. 뭔가를 배우고 익히고 잘하게 되는 걸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남들한테 칭찬을 듣고 인정받는 자체보다는 그렇게 뭔가를 이뤄낸 자기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끼는 데 익숙해진 성격이었다고 한다.
“뭐를 하던 간에, 저는 스스로 만족을 해야 하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꼭 누가 인정을 해서가 아니라, 예를 들어 어른이 칭찬을 했다 해도 제가 보기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해야 하는 그런 성격이었어요. 어릴 때는 완벽주의 같은 걸 잘 몰랐지만, 크면서 생각해 보니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일을 할 때는 굉장히 좋은데, 상대방한테는 스트레스가 될 수 있잖아요. 지금도 일을 할 때는 저 자신을 좀 괴롭히는 편인데, 타인에겐 그렇지 않으려고 무천 많이 노력하는 편이에요. 진정한 완벽주의자라는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요.”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됐다는 것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면서 저는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 혼자 작곡을 많이 했어요. 적어놓은 악보도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죠. 그냥 저 혼자 치면서 그 음을 기억했다가 저만의 창작을 계속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중학교에 가선 미술도 했어요. 미술을 할 무렵에 무용을 접하게 됐죠. 그런데 저는 제가 생각해도 굉장히 동적(動的)인 사람이었어요. 미술이나 피아노는 정적(靜的)인 면이 많잖아요. 정적인 예술의 느낌도 좋긴 했지만, 워낙 동적인 걸 좋아하다 보니까 한 자리에 묶어놓는 걸 싫어하게 됐나 봐요.”
동적인 면과 정적인 면이라…. 스스로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는 아주 유용한 구분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임을 좋아하다 보니, 미술마저도 수채화나 유화 같은 게 아니라 조소(彫塑)로 방향을 바꾸게 됐단다. 조각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걸로 선택했다는 건데, 이 정도면 그 성향이 정말 남달랐다는 얘기가 될 것 같다. 자기 자신은 끈기가 정말 없는 사람이란다.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재미가 없다고 느끼게 돼서, 그 다음 단계의 새로운 걸 추구해왔단다. 하지만 그건 정적인 면에서 그랬다는 의미일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걸 추구했다는 건 동적인 성격 아니면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인가? 학교 체육선생님으로 발레를 전공하신 분이 오셨어요. 그래서 무용반을 뽑는데, 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어요. 그래서 무용반 수업을 별도로 받게 됐는데, 무용은 굉장히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면 모두를 다 가지고 있잖아요. 음악적 요소와 미술적 요소가 함께하는 종합예술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냥 좋았어요. 그 자체가 좋았던 거예요. 나중에 대학교수가 되겠다느니 뭐니 하는 것도 없이, 춤을 추는 게 저는 너무나 좋았어요.”
하루 종일 해도 힘들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된다는 거, 그건 전체 인생으로 볼 땐 아주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몰입하면 할수록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낼 수 있게 되고, 또 하나의 새로운 나를 위해 다시금 몰두하게 되는 선순환의 구조가 갖춰지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게임중독 등의 몰입은 끊임없는 악순환을 낳지만, 어린 시절부터 선순환의 몰입을 경험한다는 건 그 대상이 ‘예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술이라는 세계는 수동적 피동적 의무감이 아닌, ‘이끌림’을 느낀 사람들에게만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어주는 법!
그런데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선물인 걸까? 발레 전공의 체육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가시고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게 됐는데, 그 분은 현대무용을 전공한 리듬체조 선생님이셨단다. 그래서 리듬체조반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데, 당시 김수미 학생은 어떻게 ‘동적’으로 움직였을까? 아마도 하고 싶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게 손을 치켜들었을 것이다. 현대무용 또한 그의 흥미를 완전히 빨아들였던 모양이다. 정말 즐겁게 몰입했단다. 발레는 어떤 틀에 갇혀서 그 틀 안에서 해야 되는데, 현대무용은 자신의 감정의 틀을 깨고 할 수 있는 장르라는 데 깊은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현대무용 자체가 오랜 역사의 전통무용에서 그 틀을 깨고 탄생한 분야 아니었던가.
현대무용과 리듬체조에 빠져 있는 동안, 잠시 뒤로 처져 있었던 발레가 다시 그의 앞에 고개를 내밀었나 보다. 일반적인 춤은 방송화면만 봐도 똑같이 따라할 수 있었지만, 발레는 특정한 형식을 배우지 않으면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나 배우고 싶어서 먼 곳의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단다. 발레의 느낌은 밝고 동화 같으며 뭔가 꿈을 꾸고 있는 듯 환상적 감정을 주는 데 비해, 현대무용은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것보다는 춤을 추는 본인 스스로가 더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춤을 출 때 너무 행복하고 너무 재미있었다는 것, 그건 이미 인생의 길이 하나의 분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리라.
“어느 정도의 구속이 있는 게 진정한 자유라는 걸 저는 지금도 느껴요. 자유로웠던 현대무용보다는, 모든 게 형식의 틀 안에 있지만 그걸 더 승화시키면 더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는 게 발레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더 어려운 테크닉을, 더 어려운 동작을 마스터했을 때, 정말로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게 됐으니까요.”
더 큰 세상으로, 유학을 설계하던 어느 날
“사실 현대무용을 하다가 발레를 다시 하다 보니 너무 힘들었어요. 현대무용은 마음대로 풀어지게끔 온몸을 사용하는데, 발레는 상체를 일정한 원통이라고 생각하며 호흡을 하기 때문에 상체를 많이 안 쓰거든요. 예를 들어서 죽은 사람을 표현한다 그러면 발레는 죽어 있어도 몸이 긴장이 되어 있는 상태이고, 현대무용은 진짜 죽은 사람처럼 힘을 탁 빼요. 그런 차이가 사실 엄청난 건데, 한동안 풀어지게 자유로운 춤을 추다가 테크닉 중심의 틀 안에 다시 저를 가둬서 연습시키려고 하니까 몸이 너무 힘들었죠.”
예술계 고등학교에 합격했지만 가정환경 등의 여러 이유로 진학을 포기한 채, 인문계 고등학교를 간 이후에도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한 번도 내려놓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이 정말 무용을 해야 될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느끼게 됐다는 것. 칠판을 봐도 무용하는 환상이 보이고 가만히 있어도 무용음악의 선율이 흐르는 등, 자신의 삶은 인문계가 아닌 예능분야임을 최종확인처럼 느끼게 됐다 한다. 인문계를 갔으니까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라는 부모님, 더 이상 뒷바라지를 하는 건 힘들다는 말씀에 공부도 나름 열심히 하려고 했단다. 그래서 일부러 전교 1등 친구와 짝이 되는 등 노력했지만, 성적이 오르는 만큼 그의 가슴에는 새로운 갈등이 맺혀졌단다.
“그런데 공부 또한 너무 정적인 거예요. 그게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아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정말 어떻게 될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가 제일 생각이 많았고 그때가 제일 힘들었고, 인생에 있어서 고등학교 무렵이 제 인생에서 가장 갈등이 많고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성인이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때만큼 힘들었던 적은 없었거든요.”
친구들은 항상 같이 놀자고 했는데, 김수미 씨는 그게 싫었단다. 노는 것보다 훨씬 더 좋고, 배우고 익힐수록 성취하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대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단다. 한 단계를 마스터하면 저 앞에 새로운 산이 보이고, 그 산을 정복하면 그 다음 산봉우리가 보인다는 게 오히려 즐겁고 행복했단다. 노력할 수 있고 그 노력 끝에 만족을 느끼게 됨이 즐거웠기에, 한눈을 팔지 않으며 자신의 길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다시 시작된 무용학원 생활에 익숙해지고, 고3이 될 무렵부터는 아예 수업을 맡아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의 역할도 수행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원장선생님은 김수미 씨를 전적으로 신임하면서 학원 운영까지 맡겼다는데, 나이 어린 자신에게 돈 관리와 사무적인 일까지 일임할 정도로 신뢰를 전해줬다는 것이다. 유학을 준비하며 학원 강사의 삶을 알차게 살아가던 그에게, 인생의 ‘Before(前)’와 ‘After(後)’의 확연한 구분을 안겨준 ‘어느 날’은 그렇게 소리도 없이 다가온 셈이다.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그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순간적으로 딱 떨어진 그때는 별로 통증이 없었어요. 그냥 어떤 느낌이었나 하면, 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프고 무거운 바위가 나를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데 너무 아프니까 목소리도 안 나오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드는데도 아무도 저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11월은 무척 춥잖아요. 또 비가 왔으니까 바닥이 굉장히 차가워서 몸이 점점 추워지게 되자, ‘아, 나 이러다가 그냥 죽나?’ 그냥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어요. 그래서 어렴풋이 눈을 떴는데, 저 앞에 식당아주머니가 보였어요. 그래서 그 아주머니를 막 불렀어요. 정말 막 불렀는데 못 들으시더라고요. 그래도 계속 불렀어요. 열 번도 넘게 불렀는데, 그제야 아주머니가 가까이 오셔서 귀를 대시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그래서 빨리 119에 신고해 달라고, 제발 빨리 연락해 달라고….”
비가 내린 11월 어느 날, 김수미 씨는 무용학원의 대청소를 하기 위해 창틀을 닦으러 의자 위에 올라섰단다. 비가 온 탓에 조금 미끄럽고 흔들거린다고 생각은 했지만 별다른 위험 같은 건 못 느끼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은 거기까지였고 인생의 ‘Before’ 또한 거기까지였다. 무용학원의 위치는 건물 4층, 그는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1층 간판에 허리를 부딪친 뒤 시멘트 맨바닥에 떨어졌다고 했다. 지금과 같은 기본적 보조기구도 없던 119 구급차에 들것으로 실려서 병원에 갔고, 곧 더 큰 종합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부상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수술 일정도 잡지 못한 채 응급실과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고 한다. 척추가 자갈처럼 완전히 바스러졌다는…, 게다가 내장 여기저기의 심각한 출혈로 인해 손을 쓸 방법도 없이 누워 있기만 해야 했단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만 이어지는 채로.
“이틀 정도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회진을 도는 의사선생님 두 분이 오셨어요. 한 분이 차트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는데,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제 귀에 들리는 거였어요. ‘이 환자 얼마나 갈 것 같아?’ ‘글쎄, 얼마 못 살 것 같아.’ 그런 식으로 자기들끼리의 전문용어를 섞어가면서 얘기를 하는데, 그때 정말 화가 치밀더라고요. 아니,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한다는 거지…?”
싫다고 아닌 게 아니기에 극복해야 한다는 것,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기에 스스로를 원망하는 시기를 겪으며, 생각만 많아지는 걸 벗어나고자 일부러 몸이 피곤해질 만큼 활동하며 움직였단다. 바이올린을 독학으로 배우고 복지관의 교육프로그램을 섭렵하며 자격증도 여럿 획득하는 등, ‘몸이 생각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몸을 지배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소리 죽인 음성으로 자식의 삶을 한탄하시던 부모님의 한숨을 접하는 순간, 그는 부모님 눈에서 안 보이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단다. 그 탈출구로 선택한 것이 선교를 위한 필리핀 행(行)이었고,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모든 짐을 쌌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나’를 버리기 위해서.
예정에도 없던 낯선 오지에서의 삶이 편안했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그는 그 곳에서 스스로를 버리고 또 버리면서, 새로운 ‘나’를 찾아내려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신앙의 이름으로 참고 버티면서 갈구하기를 계속한 끝에, 그에게는 하나의 가르침이 주어졌단다. ‘네가 가진 재능으로 봉사를 하라!’ - 김수미 씨는 그 답을 얻고 난 뒤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선택했고, 귀국길에 올라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에 봉사할 방법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23세 당시 이후로 지워져버린 이름이었던 ‘발레’가 그의 삶에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샬롬선교발레단으로 그 삶이 펼쳐진 16년 동안, 자신의 모든 걸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면서 김수미 씨는 현재와 미래의 설계를 언급했다.
“발레리나는 무대 위에서의 인생이 그리 길진 않잖아요. 그런데 저 대신 우리 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고, 기대도 안 했는데 대학 전공으로 진학한 애들도 있고, 그래서 그 애들이 자기가 원하던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 아이들의 미래를 설계해주는 역할을 담당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제게 주어진 사명임을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아이들의 인생을 여는 든든한 연결고리가 돼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늘도 역시, 내일도 역시 더 열심히 살아갈 겁니다. 정적이 아닌, 동적으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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