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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a dream 저에겐 꿈이 있어요

[사람 사는 이야기] 새벽지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김민정

본문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에게 먼저 제안했다. 제목을 ‘I have a dream’으로 하고 싶다고 말이다. 집회 현장과 일상의 장소에서 마주칠 때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맑은 미소였다. 그래서 더 많이 눈에 띄고, 더 많이 ‘힐끔’ 쳐다보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언가의 바람이 있기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무언가를 믿는 게 확실하기에, 저런 미소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는 나름의 기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좋다고, 그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실제 꿈을 떠올리는 눈빛을 이어갔다. 장애인권운동 현장의 활동가인 새벽지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김민정 씨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예쁜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의 속마음 깊은 고백을 서문에 미리 밝히며, 세상 속에 당당히 존재하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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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태어난 아이

“저의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며느리인 저의 엄마는 경상북도 의성의 시댁으로 달려가서, 시골집 안에서 진행된 상갓집의 일들을 부엌 일 중심으로 아주 바쁘게 하셨대요. 그런데 엄마는 저를 품은 만삭이셨거든요. 그때 양수가 터졌대요. 하필 가장 바쁠 때였잖아요. 시골 동네의 조그만 의원으로 가니까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고, 그래서 저의 출생에 시간이 많이 지연됐던 모양이에요. 양수는 태아를 감싸며 보호하고, 출생할 때는 아기가 엄마 몸에서 쉽게 나오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잖아요. 그런데 양수는 이미 다 빠졌고 아기는 엄마 몸에서 나오려고 애를 써도 방법이 없고, 그때 의사가 무리한 방법으로 저의 출산을 시도했던 모양이에요.”

어머니께서 전하셨던 표현 그대로 옮긴다면, 담당의사는 아기를 빼내기 위해서 손으로 ‘헤집듯이’ 아기 머리를 잡아당겼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태어난 아기를 보며 깜짝 놀라셨단다. 아기의 머리가 온통 새빨갛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힘겹게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 아기는 밤낮 없이 계속 울어대기만 했다고 한다. 끝도 없이 말이다.

“뇌병변장애의 특성이 경직되며 몸 전체가 막 뒤틀리는 거잖아요. 그 조그만 아기의 몸 안에서 뒤틀림이 진행되기 시작하니까 그렇게 울어댄 게 아닐까…, 저는 이제 와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른들은 단순히 ‘우는 경기(驚氣)’라고 부르며 점을 보러 다니고, 여기저기 침도 맞으러 다니게 하셨대요. 그래도 안 되니까 생후 6개월 때 결국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갔고, 거기서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게 된 거죠.”

출생 후 반년 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시도하는 뒤집기도 못하며 울던 아기, 일으켜 세우려 하면 곧장 힘없이 주저앉던 아기는 울기를 그치지 않았단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주무시려는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그를 업고 밤새도록 동네를 배회하듯 돌아다니셨단다. 아버지의 취침을 위해서 말이다.

“서울 대방동의 공군회관 근처였대요. 대여섯 살 시절부터는 기억이 나요. 아버지 회사는 가까웠고, 작은 집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골목이었어요. 슈퍼마켓 옆의 옆집이 우리 집이었죠. 연탄을 때고 작은 방이 두 개 있는…. 특히 기억나는 건, 거기에 목욕할 때 쓰던 빨간 대야가 있었어요. 거기다 물 받아놓고 저를 넣어둔 다음, 엄마는 청소와 같은 일을 하곤 하셨죠. 대야 안 물에서 노는 저의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곤 했어요. 그 풍경이 지금도 또렷이 떠오르네요.”

 

내가 모르던 또 다른 세상

뇌병변장애 1급인 김민정 씨.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다르다는 것은 언제 처음 실감했을까? 대여섯 가구가 함께 살던 다가구주택에 민정 씨와 동갑인 아이들이 두 명 있었단다. 엄마들끼리도 친해서 같이 어울리곤 했는데, 그 두 명이 유치원에 가게 되자 민정 씨 혼자 남게 되어버렸단다. 그래서 자기도 유치원에 다니게 해달라고 졸라서, 결국 엄마 등에 업혀 가고 오며 유치원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노란 옷 입고 찍은 졸업사진도 집에 있어요. 제가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그냥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것 자체도 좋은 일인 것 같다며 엄마가 승낙을 하셨죠. 공부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아이들과 어울리게만 해달라고 유치원에 청해서 저도 유치원을 다니게 됐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말을 무척 잘했대요. 신체적으로는 늦고 반응하기 힘들었지만 의사표현은 또박또박 잘했기에, 식사나 용변 같은 것도 선생님들께 정확히 말씀드리며 해결했다고 들었어요.”

장애아동의 재활을 위한 특수학교에서 초등교육 과정을 받다가, 그 학교가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자 엄마의 고민이 깊어졌단다.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그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나?’ 하지만 ‘민정이 정도면 일반학교에 가도 잘할 거야.’ 하신 선생님 말씀에 힘을 얻어,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친 소녀 김민정은 일반학교로 전학하겠다며 자신의 뜻을 엄마한테 전했다고 한다.

“약간의 오기 같은 게 발동했던 것 같아요. 모두와 함께 섞여 지내며 살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런 제한된 틀 안에 따로 있어야 하는지, 저 나름의 불만 같은 게 있었거든요.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그렇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모든 게 제한되어 있다는 걸 그 어린 나이에도 느꼈던 것 같아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재활시설에서 살기 시작했다면 그 틀 안에서만 생각하며 지낼 수 있지만, 민정 씨는 바깥세상에서 모든 걸 바라보다가 특수학교에 들어왔던 게 아닌가. 그의 결정에 따라 집에서 가까운 일반 초등학교에서 6학년 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 너무 많은 부분에서 충격을 받았고 힘이 들었단다. 가장 적응이 안 됐던 건 영어라곤 ABCD 알파벳 정도만 알던 그의 앞에서 문법과 독해를 줄줄이 꿰차며 학원수업에 매달리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특수학교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도 민정 씨는 ‘오기’라고 표현했던 마음가짐 하나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일반학교로 다녔고, 멀티미디어를 전공하며 대학까지 모두 마쳤다고 한다.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실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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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둘러싼 벽

“특별전형이라는 게 생겼죠. 그런데 그 용어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뭐가 몇 %(퍼센트), 내신 몇 %, 수능 몇 %, 기타 예체능 몇 %’, 게다가 학교마다 그 비율이 다 다르니까 그 모든 자료들을 검색해서 출력한 뒤 저에게 맞는 학교를 추천해달라고 학교 선생님께 문의했어요.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뭘 하고 싶냐?’ 묻더니 ‘그래, 열심히 해라’로 끝내는 거예요. 장애학생들에 대한 진로상담은 정말 너무할 만큼 형식적이었죠.”

주변에선 당연한 듯이 사회복지학과를 권유했단다. 그런데 그때도 오기가 발동했다고 한다. ‘내게 장애가 있다고 무조건 사회복지학과를 가야 해? 왜?’ 그래서 관심이 많던 컴퓨터를 전공으로 공부하면 나중에 집에서 재택근무도 할 수 있을 테고, 다양한 가능성이 생길 것 같아 멀티미디어학과를 선택했단다. 그런데 높은 지대에 위치한 학교를 다닌다는 게 너무 힘들었고, 다른 동기들을 따라다니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고 한다.

“전동휠체어를 탄 지는 4년 정도밖에 안 돼요. 그 전에는 나름 잘 걸어 다녔거든요. 보조기구 없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잘 다녔는데, 이십 대 중반 무렵에 손가락이 갑자기 저리더라고요. 찌릿찌릿한 증상이 계속돼서 ‘혈관 어디가 막혔나?’ 생각만 하고 넘어갔었는데, 그게 점점 더 심해지더니 나중엔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냥 주저앉게 된 거예요. 증상이 이상해서 종합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하며 정밀검사를 받았죠. 약물치료 말고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퇴원한 뒤에도 걷기는 걸었는데, 다리의 힘이 많이 빠졌어요. 지금도 손바닥과 발바닥이 저리는 증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거든요.”

직접 걷는 게 충분히 가능하던 시절이었다면, 학교에 오르내리기가 힘들었다 해도 나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신선함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딱 두 달’뿐이었단다. 이동편의시설 같은 건 아예 찾아볼 수 없었고, 무엇보다 ‘신입생 김민정’의 마음에 큰 상처를 안긴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말이다.

“그때는 활동보조인이 없던 시절이었죠. 대신 대학에선 비슷한 개념의 ‘학습도우미’라는 게 있었어요. 장애학생들을 대상으로 친한 친구가 학습을 도와주면, 학교에서 봉사활동점수로 대체해 주는 제도였죠. 어느 날 학과 조교 언니가 불러서 갔어요. 학습도우미를 할 만한 친한 친구가 있냐고 제게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자신 있게 대답했죠. ‘전 다 친해요. 다 잘해주고요. 다 좋아요.’ 오전에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나왔는데, 오후 수업이 다 끝난 뒤 학과 친구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뭔데?’ 하며 강의실로 다시 들어가려니까, 애들이 일제히 ‘아니야, 민정아, 너는 안 들어와도 돼. 괜찮아’ 하는 거예요. 그래도 애들하고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들어갔는데…, 조교 언니가 앞에 서서 설명을 하고 있더라고요. 학습도우미라는 제도가 있는데, 민정이를 위해서 신청할 사람은 손을 들라는 장면이 제 눈에 들어왔던 거죠.”

학점 관리와 졸업하는 데 분명한 이점이 있는 학습도우미 제도임은 분명한데, 조교의 설명을 다 들은 동료 학생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단다. 당황했을 조교가 두 번이나 더 설명을 하고 지망자는 손을 들라고 했지만, 여전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은 상황이 계속됐다는 것이다.

“굉장히 비참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에서 집까지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반이 걸렸어요. 한 번에 가는 게 아니라 두 번을 갈아타는, 그러니까 버스를 세 번 타야 하는 통학 길이었거든요. 그걸 타고 오면서 내내 울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사람 많던 버스 안에서 저 혼자….”

 

나의 자리 찾기

“대학교 졸업할 때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었어요. 컴퓨터를 처음 전공할 때는 집에서도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니까 선택한 거지만, 졸업할 즈음 돼서는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집에서 저 혼자 하는 작업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거, 어떤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까 매일 출퇴근하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런데 그 대안을 제게 알려줄 만한 누군가가 없잖아요. 그래서 검색을 많이 했어요. 정말 인터넷이 없었다면, 그런 통로마저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요.”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사장 혼자서 홈페이지를 제작한다는 회사가 눈에 띄었단다. 거기서 연락이 와서 찾아갔더니 괜찮다고, 같이 해보자고 했고, 일단 민정 씨한테는 사회적인 경력이 없으니까 재택근무로 몇 개월 일을 진행해 보자고 사장이 제안했다고 한다. 민정 씨는 역제안을 했단다. 그 대신 재택근무 기간이 끝나면, 출퇴근을 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얘기가 잘 풀려서 생애 첫 직장을 다니게 됐고, 파주로 이사를 간 집에서 서울 신촌의 사무실까지 왕복 4시간의 직장생활을 나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길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쓴 게 아니냐고 물으니까, 순간 민정 씨는 표정이 굳어지며 아주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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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직업을 구하는 데 있어서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스스로의 의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민정 씨는 자신의 발언을 한 번 더 되풀이했다. “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요.”

8개월 정도 일을 하다가 그만 둔 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진행했던 직장체험을 받았고, 같은 연구소의 장애우대학에도 참가하면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장애인권운동 활동가 대선배님들을 그때 많이 만날 수 있게 됐단다. 두 번째 직장은 미용재료업체에서 운영하던 인터넷 쇼핑몰 관리를 담당한 건데, 6개월 정도 다니다가 이런저런 마음의 상처를 입으며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적게 받은 임금 문제 때문에 노동부까지 가서 싸워야 했는데, 그때 장애계 활동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고마운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거명했다.

‘계속 이 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난 고민을 계속하던 중에, 연구소에서 활동하던 한 선배 언니가 어느 날 그를 불렀단다. 그래서 찾아갔더니 대뜸 “네가 요즘 고민이 많은 것 같다”며 그 이유를 묻더란다. 그래서 속에 쌓아두고만 있던 고민들을 털어놓으니까, 선배 언니의 대답은 완전히 새로운 조언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언니의 말씀이 ‘네가 사회에서 이런 차별을 받고 아픔이 있는 것을 경험 삼아서, 이쪽 장애인권운동의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너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서로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가 그 일을 할 적임자인 것 같다’는 제안을 한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장애계의 인권운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됐죠. 선뜻 ‘알겠다’는 대답을 그 자리에선 하지 못했지만, 저한테는 아주 큰 화두가 던져진 것이었어요.”

 

꿈은 혼자 이룰 수 없는 대상입니다

이미 그 이전 대학 시절부터 연구소에서 진행한 장애학생캠프에 참가한 이후로, 크고 작은 여러 정책 연구와 다양한 활동에 조금씩 함께해 왔던 터라, 선배 언니의 제안은 그에겐 커다란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됐단다.

“확실하게 깨닫게 됐어요. ‘아, 내가 받고 있던 이 모든 게 차별이었구나!’라는 결론이 제 안에 새겨지게 된 것이었죠. 아주 구체적으로요. ‘나한테도 나의 권리가 있고, 내가 선택해서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건 제가 막연하게 고집 부렸던 게 아니었다는 거죠. 그걸 사람들은 고집이라고 말했지만, 게다가 고집 강한 성격 탓이라고 지적하곤 했지만, 그게 저의 자연스러운 의지였고 당연한 권리의 외침이었다는 게 또렷이 정리가 된 거예요. 더 많이, 더 넓게 알고 공부해야겠다는 다짐도 그때 하게 됐어요.”

김민정 씨의 공식 직함은 ‘새벽지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다. 그 자립생활센터의 시작은 어떤 계기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진 건지 물었다. ‘장애대학생 정체성 찾기 모임’이란 것이 있었단다. 2박3일의 캠프 형식으로 진행됐던 행사였는데, 거기서 함께했던 열 명의 장애대학생들이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고 교류하면서 지내자고 만든 카페의 이름이 ‘새벽지기’였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인생 영역에서 열심히 살면서 새벽지기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는데, 구성원 중 한 명이 이런 의견을 내놓았단다.

‘우리가 장애대학생 정체성 찾기 캠프 당시의 감수성을 이어가는 데 그치지 말고, 이젠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그때 고민했던 것들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면 좋겠다’ 하는 그 제안이 결실을 맺어 새벽지기센터가 탄생하게 됐단다. 2012년 12월 초에 창립을 했으니까, 이제 막 출발점을 벗어나 나아가기 시작한 상태라고 한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도 저의 꿈 중의 하나니까, 저의 꿈은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루고 있는 단계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전에 인권센터를 할 때도, 또한 지금 자립생활운동을 하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신체기능의 장애가 있는 분들은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에 대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가 있어요. 물리적인 지원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도구를 활용한다든지 간에, 어떻게든 해결방안이 존재한다는 거죠. 그런데 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은 그게 턱없이 부족해요. 그래서 그 분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쪽으로 관심을 크게 두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민정 씨는 요즘 공부에 열중하고 있단다. 발달장애와 정신장애를 가진 분들이 생활 주변에 너무 많이 있는데, 드러나진 않지만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차별을 받고 있고, 그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사는 분들을 지역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분들과 같이 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서, 단지 학문적인 공부가 아닌 현실 속의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름의 해결책도 내놓았다. 장애가 있는 분들은 ‘뻔뻔해질 필요가 있을 때는 뻔뻔해져야 한다’는 건데, 여기서의 ‘뻔뻔’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자기 생각을 굽히지 말고 주관대로 밀고 나가는 게 중요해요. 고집 부릴 때는 고집 부리는 게 훨씬 의미가 있을 수 있거든요. 장애를 가진 분들은 주변 환경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아요. 감정적으로도 그렇고요. 뭔가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죠. ‘나는 이게 좋은데’ 하더라도, 주변에서 ‘저것이 낫다’고 하면 그걸 택해야 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잖아요. 그럴 때는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선택을 당당한 의견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해요.”

당당한 자기결정권만큼 중요한 건 ‘타인에 대한 배려’란다. 왜냐, 세상은 절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는 김민정 씨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담겼다.

“많은 장애인분들한테 ‘자립생활의 의미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봤을 때, 대부분 ‘혼자 살아가는 거’라고 대답하세요. 그건 절대 아니라는 거죠.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둘이서 같이, 아니면 다수가 함께 나아가는 공간이에요. 자립생활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죠. 혼자 떨어져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함께 다같이 어울리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진정한 자립생활의 완성이라는 거예요. 도움이 필요할 땐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주변에 청하세요. 대신 자기 주관과 가치관 그대로 밀어붙여야 할 때는, ‘자기 고집’을 꺾지 말고 끝까지 가지고 가는 게 자립생활이자 자기 권리의 확보예요. 그런 당당함과 배려가 함께한다면, 여러분의 꿈도 분명히 현실로 이루어질 거예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거, 이 한마디를 꼭 기억하면 가슴속에 간직하던 꿈이 멋지게 이루어질 겁니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lim0192@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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