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없는 노력이 오늘의 저를 만든 것 같습니다 > 사람 사는 이야기


편견 없는 노력이 오늘의 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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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세계 유일의 오케스트라가 존재한다. 그 이름은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 - 시각장애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9년 3월호 <함께걸음> 지면에서 만났던 클라리넷 연주자 이상재 교수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고, 같은 해 6월호의 화보를 통해 그들의 공연 현장이 모든 독자 여러분 앞에 다양한 사진 이미지들과 함께 공개된 바 있었다.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 공연의 압권(壓卷) 즉, 기장 뛰어나고 인상적인 대목은 공연 도중 공연장 전체의 모든 조명을 끈 상태로 연주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서로 나누는데, 같은 조건에서 함께 나눠보자는 의미였습니다. 연주자들도 소리로만 듣고 청중들도 소리로만 들어 달라, 그런 취지로 불을 끄게 된 것이죠.” 

오케스트라 공연의 중심은 물론 지휘자에게 있다. 그런데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없다.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지휘자가 없다는 게 가능할까? 그런데 그들에겐 가능하다. 모두가 시각장애를 가진 입장이기에, 팀워크(team work)라는 일치된 호흡으로 공연 자체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음악감독 또한 단원의 일원이긴 하지만, 무대 위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실제로 이끌어가는 건 ‘악장(樂匠)’이라는 직책의 1인이 전담한다.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는 그 1인을 만나서, 의미 깊은 긴 대화를 서로 나누게 됐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훈 씨가 독자 여러분께 반가운 인사를 올리며 그의 인생을 풀어놓는다.

 

   
 

바이올린과의 첫 만남은

“태어날 때는 바로 발견이 안 돼요. 원래 아기가 태어나면, 시력이 점점 발전하면서 부모님과 눈을 맞추게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애가 성장하는데도 눈을 못 맞추고…, 그게 외견상으로도 이상하다고 느껴지다 보니까,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확인을 하셨대요. 그러다가 결국은 안과에 간 뒤에야 발견하시게 된 것이죠.”

김종훈 씨는 선천적 녹내장을 가지고 태어났단다. 그래서 생후 8개월 때 첫 백내장 수술을 했고, 만 6세가 될 때까지 여러 차례 수술을 반복해야만 했다고 한다. 게다가 성인이 된 이후의 독일 유학 때도 한 차례 수술을 현지에서 받아야 했다니, ‘녹내장은 진행성’이라는 진단이 실제로 맞는 것 같다.

“점점 시신경의 기능이 없어지거든요. 어렸을 때는 희미하게나마 뭔가를 봤다는 기억이 나는데, 그게 점점 더 약해지다 보니까 모니터의 커다란 글씨를 읽는 것도 어려워지게 됐죠. 그래서 점자를 뒤늦게 배우게 됐습니다.”

나이 들어 배운 점자는 익숙해지기 어렵다고 다들 고백하던데,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대신 세계 공통인 악보점자만큼은 확실하게 익혔단다. 왜냐? “절실하게 필요하면 진지하게 몰입하게 되잖아요.”라는 그의 의견 그대로, 인생의 이름으로 꼭 필요했던 건 바로 악보 - 그렇기에 악보점자만큼은 확실하게 익혔다는 의미가 된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출생지 마산을 떠나서 포천으로 이사했을 때, 그는 굉장히 넓은 들판과 대자연의 환경 같은 걸 경험하게 됐고, 그 기억이 지금까지도 행복했던 시절의 ‘어렴풋이나마 눈에 보이던’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단다.

그럼 음악은 언제 처음 접하게 된 걸까? 육이오(6·25)와 월남전에 직접 참전하셨던 아버님께서 음악을 참 좋아하셨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님 역시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실 만큼 음악을 좋아하셨다니, 집안 자체가 음악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힐 환경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월남전 참전 후 귀국하시면서 ‘미제(美製) 전축’을 가지고 오셨다니, 더불어 집안 내부에 흐르는 음악은 언제나 클래식이었다고 하니, 어린 시절 김종훈의 귀와 가슴엔 어떤 선율이 가득 담겼을지 쉽게 짐작할 만하다.

“그렇게 귀가 뚫렸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잘 안 보이다 보니까, 장난감도 소리가 나는 것 위주로 가지고 놀았대요. 그 중에서도 장난감 피아노를 가장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다면 바이올린은 언제 처음 알게 됐을까? 장난감이 아닌 진짜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다가 실제로 직접 만져 보게 됐는데 피아노 자체가 너무 커서 놀라게 됐고, 마침 피아노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한테 이런저런 이유로 지적을 받다 보니까 피아노는 아예 싫증이 나버렸단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바이올린에 손을 내밀게 된 걸까?

   
 
“그게 오히려 장난감 같더라고요. 품 안에 쏙 들어오고 구석구석 다 만져지고, 그래서 장난감 같아서 늘 만지며 지냈어요. 게다가 소리도 제가 조금씩 다르게 켤 때마다 처음 듣는 이상한 소리가 계속 나고…, ‘끽끽’ 하는 불규칙한 소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거든요, 그게 엄청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피아노처럼 정해진 음계가 이니라, 제가 찾아내는 음정과 소리가 따로 있다는 게, 그 호기심이라는 게 정말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자신의 실력으로 우뚝 서야 한다는 것

그런데 제대로 잘 안 보이는 시력으로 악보는 어떻게 봤을까?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특활시간에 배우던 바이올린은 간단한 동요 위주였기에 별 상관이 없었는데, 5학년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개인교습을 받게 되어 악보를 보는 문제가 당면과제로 등장했단다. 클래식 악보를 보면 아주 작은 음표들이 가득하고,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음표의 배열은 더욱 더 세밀해지는 법 아닌가. 그런 악보들을 직접 마주보며 연주할 수는 없고…. 해결책은 부모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예전 집 여기저기에 걸려 있던 커다란 달력 있죠? 그 뒷면에다가 매직으로 커다랗게 그려주셨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는데, 그 이후로 연말이 되면 동네 이웃 분들이 모든 달력을 다 모아주셨어요. 그게 장롱에 한 가득 쌓여졌는데, 1년이 지나면 전부 다 악보로 변하게 됐죠. 그렇게 공부했어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도, 아들을 위해 정성껏 오선을 긋고 음표를 채우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하나의 영상처럼 눈에 보이는 듯했다. 좋아서 시작했던 바이올린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점점 더 매료가 되어갔는데, 바이올린 음악을 굉장히 열심히 들으면서 좋아하던 곡들을 스스로 연주하게 되니까 그 성취감이 엄청나게 커졌단다. 그러다가 중3 무렵 가정형편 때문에 개인레슨을 6개월 정도 쉬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 기간의 공백이 정말 큰 상실감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짐하게 됐죠. 음악 없이는 못 살겠더라고요. 나는 꼭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 꼭 전공으로 하겠다고 아주 굳게 다짐을 하게 됐어요.”

당시 서울 모 고교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던 약시(弱視)반에 들어가게 되어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도 바이올리니스트의 꿈 하나는 굳건히 간직하며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문제는 음대로 진학하는 데 난관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단다. 1980년대 중후반이면 아시안게임이니 올림픽이니 뭐니 하며 화려한 수식어로 도배되던 시절이었지만,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입학이 공공연하게 거부되던 것 또한 이 땅의 실제 현실이었음은 분명하다.

음악을 전공하고 싶어도 이 사회에 엄존하는 높은 장벽을 어떻게 넘어야 할지…, 그 문제를 고민하며 지내던 시기에 학생 김종훈은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단다. 자신보다 한 학년 높은 ‘이상재’라는 학생이 중앙대 음대에 입학했다는, 그야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접하게 됐다는 것이다. 장애의 몸으로 대학생이 됐다는 게 뉴스거리가 되던 시절이었으니, ‘이상재’라는 존재는 학생 김종훈에게는 엄청난 희망의 등대와 같았을 것 같다. 선례(先例)가 생겼으니, 자신에게도 가능성이 생겨난 게 아닌가.

“그때 저는 이미 ‘부산콩쿠르’라고,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콩쿠르에서 1등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 경력이 당시 문교부의 특기자 자격으로 인정을 받아, 한양대학교 음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콩쿠르 1등, 문교부 특기자, 음대 장학생 입학 같은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 아닌가. 1차적인 꿈을 이룬 그 시점을 예로 들면서, 그에게 방향이 약간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대안 같은 걸로 인생을 살 생각은 없었던가? 그는 아주 짧고도 단호하게 답했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고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건 음악밖에 없다고 믿어왔기에, 다른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역시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 그대로 한 우물만 깊게 파며 집중한 인생인 셈이다.

 

   
 

예정에 없던 유학, 그래도 나는

약시의 눈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학생활을 한다는 건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다행히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항상 소중한 도움을 받으며 지냈단다. 음대를 졸업한 뒤 친구가 운영하던 학원에서 개인 연습을 하며 학생들도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즈음 그에겐 예정에도 없던 인생의 반전이 홀연히 찾아들었다고 한다.
“유학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죠. 가정 형편이 어려웠고 졸업 후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저는 학원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비올라 전공으로 독일에 유학을 떠났던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가끔씩 통화하던 그 친구가 불쑥 유학에 도전해 보라는 거예요. 설마 사람이 죽겠냐 하면서 유학을 권하는데, ‘그래? 한 번 가볼까?’ 그런 마음으로 그냥 간 거예요. 그 친구 덕분에 유학을 시작하긴 했는데, 그렇게 고생스럽고 힘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안 갔을 거예요.”
하지만 아주 귀중한 것들을 많이 배웠기 때문에 후회는 안 한단다. 현지 교수들도 깜짝 놀랄 만큼 좋은 성적으로 입학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7년 4개월의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됐지만, 유학생활이라는 게 마음 편안한 과정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닌 법. 그래도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확실하게 익히는 연주학습을 계속하다 보니, ‘네가 이 정도까지 발전할 줄은 몰랐다. 나이도 많고 장애도 있는데 정말 뜻밖이다. 너무나 기쁘다.’는 지도 교수의 진심어린 격려까지 받게 됐단다. 정말 제대로 잘 배우면서 장학금도 받게 됐고, 학교를 대표해서 독일 대통령궁 연주도 하게 됐다고 한다.
“한국은 연이은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과목은 많고, 그래서 매 학기 정신없이 지나가면서 집중하며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힘들어요. 실제로 남는 게 별로 없다는 의미가 되겠죠. 그런데 독일은 좀 길게 보는 것 같아요.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없고 졸업시험 딱 하나 보는 건데, 그만큼 느긋하게 아주 기본적인 기초부터 전념할 수가 있었거든요. 그 성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교수와 학생이 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몇 년을 바라보면서, 자기한테 정말 성과가 될 것들을 쌓아가게 되죠. 길게 보면서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은, 독일 같은 나라가 훨씬 조건이 좋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장애학생을 위한 독일 대학들의 편의시설 같은 건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했다. 한마디로 ‘별로’란다. 의외의 대답이라서 그 이유를 물으니까, 사회보장이 워낙 잘 되어 있다 보니까, 장애가 있는 독일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는 것 같단다. 일단 나라에서 무조건 연금을 주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하면 개인적 수입을 얻기 때문에, 치열하게 경쟁해서 꼭 음악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한다.

 

대중을 위한 열린 음악을 하겠다는 것

독일에서 얻은 건 학업적인 음악적 성취감뿐이었을까? 김종훈 씨는 유학생활 중 만난 한국 유학생 후배를 아내로 맞이하게 됐단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배였는데, 같은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었고 이상하게 그 사람하고는 의견이 정말 잘 통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생각 안 하고 한 사람의 음악가로만 대하더라는, 일상적인 문제에서도 무조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혼자 할 수 있는 건 혼자 하도록 인격적으로 힘이 되어줬다는 것이다. 책을 정말 많이 읽고 올바른 마음과 좋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조금씩 욕심(?)이 생기더라 언급하면서 김종훈 씨는 밝게 웃었다. 그렇다면 독일로 유학을 권했던 그 친구한테 정말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 친구는 평생의 은인이라며 방금 전보다 더 크게 웃음지었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모든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시작하게 된 여러 활동 이야기들을 편안한 대화로 나누다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부분을 질문하면서 화제를 잠시 바꿔보았다. 음악의 본고장에서 오랜 유학을 경험했기에, 음악과 관련된 국내의 문화적 여건을 김종훈 씨는 어떻게 평가내리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이 대목에선 그의 냉정한 판단이 이어졌다. 국내 클래식 음악계는 한마디로 ‘기형’이라는 것이다.

지금이야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이전 세대들은 클래식을 ‘가진 자들의 재력(財力)’ 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한 측면이 컸고,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자기 과시에 집중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듣는 이들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자기 과시를 위해 음악을 사용했다는 것, 그래서 학생들을 대할 때도 학생들 앞에서 군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게 됐고, 학생들을 억누르면 누를수록 자기가 더 올라간다고 착각하는 음악가들만의 ‘불편한’ 경향이 존재한다면서 독일 현지의 모습을 비교의 예로 들었다.

“여기에선 그런 분위기에 익숙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음악의 본고장에 가서 봤더니 악기는 정말 싸구려 악기에 실력도 예상보다는 뛰어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연주를 정말 기쁘게 해요. 누구를 이기겠다고 연주하는 게 아니라, ‘음악 자체가 즐겁고 음악을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이런 아름다운 음악을 써준 작곡가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느낌과 마음자세로 연주를 하니까, 듣는 이들도 참 편안하게 그 음악을 즐기며 지내더라고요. 음악이라는 건 결국 자기뿐만 아니라 좋은 걸 서로 나누고, 다른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좋은 삶을 나누는 게 음악가의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그런 본질적인, 또한 진정한 음악가의 역할과 가치를 망각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시대가 바뀐 탓에 요즘은 많이 대중화되고 다양하게 열린 고전음악이 공존하지만, 이전의 음악가들 이미지라는 건 자신들만의 ‘이너서클’과 같은 폐쇄성과 배타성 내지는 권위주의가 두드러졌던 게 사실이다. 고귀한, 귀족적인, 가진 자들을 위한, 먼지 하나 묻지 않을 듯 단정한 복장 차림이 클래식 음악과 대중 사이의 단절감과 괴리감으로 존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모든 걸 무조건 부정적으로 규정지을 필요는 없다. ‘그랬던 과거’가 있었다는 것이지, 지금의 음악인들 모두가 그런 틀 안에 ‘여전히’ 갇혀 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름 뿌듯하게 간직하고 있는 건, 제가 2005년 전후부터 병원 봉사연주를 했어요. 그때는 ‘재능기부’라는 용어 자체를 몰랐던 시절이었는데, 피아니스트 한 분과 함께 병원 로비에서 연주를 시작하게 됐죠. 그 피아니스트도 유학까지 갔다가 신장이 갑자기 나빠져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신장이식수술 끝에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된 분이거든요. 다시 건강해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아팠을 때 음악을 통해서 용기를 얻었고 에너지를 충전 받았던 걸 다른 환자분들에게 전해드리자는 취지였죠. 그런 식의 병원 연주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음악가들이 봉사연주활동을 하고 계세요. 극히 작은 부분이었지만 좋은 시작을 해서, 그 좋은 여파가 퍼져나간 게 아닌가 하며 나름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세요

고도약시라는 시각장애를 딛고 지금의 자리까지 이르렀기에, 음악을 하고 싶은 후배들에겐 어떤 조언을 전하고 싶은지를 알고 싶었다. 전문가 과정이든 취미든 간에 팔 기능에 문제가 없어서 바이올린을 하고 싶다면, 어떤 준비와 함께 다가가는 게 좋을까? 김종훈 씨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다가, 실제 교단에 서고 있는 교수의 입장답게 인생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취미라면 사실 별 상관이 없단다. 무얼 하더라도 제대로 잘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재미있으면 되는 것이기에, 인생에선 꼭 바이올린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경험을 취미로 쌓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정말 음악가가 되고 싶다, 음악가의 꿈이 있다고 한다면…, 저의 과거를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저도 사실은 제가 바이올린을 하면서도, 스스로 아주 좋은 바이올리니스트는 못 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요. 왜냐하면 활을 움직이는데, 주로 눈으로 보고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저는 그걸 절대로 못하잖아요. 눈으로 그 섬세함을 조율하지 못하니까, 그 섬세함을 갖추지 못한 수준으로만 머무르겠다며 걱정과 좌절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집요하게 연구하고 물고 늘어지니까, 결국은 그 모든 게 해결이 되더라고요. 잘 보이는 연주자들 못지않게 섬세하게 활을 쓰는 방법, 그걸 제 모든 노력으로 끝내 이루어냈다는 것이죠. 이건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피아노나 다른 모든 악기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김종훈 씨는 장애를 극복한 여러 음악가들의 실제 예를 들며, 절대로 개인적인 편견에 미리 사로잡히지 말 것을 분명한 어조로 강조했다.

“자신이 편견을 가지는 것처럼 바보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음악가의 길은 쉽게 가는 길이 아니라 어렵게 가는 길이 맞죠. 하지만 자기가 먼저 스스로 자기 힘을 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자기가 얻게 되는 결과물이 남들과 똑같더라도, 어려운 과정을 어렵게 겪으며 나아갔다면 그만큼 더 자신한테는 절실한 결과물이 되잖아요.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 먼저 답을 내리지 말고, 그 얻고자 하는 것에 수십 배 수백 배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그냥 인정하세요. 더 간절히 바라고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면, 그 길을 쉽게 가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달콤한 열매를 많이 얻게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김종훈 씨는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지나온 자신의 인생길을 되돌아본단다. 하루하루 정말 힘들게 온 것 같은데, 그걸 뒤돌아보면 모든 게 다 기적과 같이 느껴진다고 한다. 장애의 몸으로 바이올린을 알게 되고 그 인생을 살면서 유학까지 갔다 온, 그렇게 지금 현재의 입장까지 오게 된 것 역시도 기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쌓여진 기적들이 있었기에, 앞으로도 그에 못지않은 기적들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강하게 밀려온단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한테 믿음을 쌓는 것’이라며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현실은 다 어렵잖아요. 사는 게 힘들고 장애를 가졌으니 더 힘들겠다 하는데, 힘든 것에 갇혀 있으면 늘 똑같은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저를 도와줬던 사람들이 만약에 저를 외면했었다면, 그랬다면 저는 분명히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겁니다. 제 인생에서 저한테 좋은 영향을 줬던 분들처럼, 저도 어떤 다른 분들한테 좋은 영향을 주는, 이 사회 안에서 더 많은 용기와 희망을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음악으로써, 연주자로서, 선생님으로서, 아이를 키우는 가장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좋은 인터뷰를 하면서, 또 한 번 자신의 모든 걸 되돌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며 뜻밖의 인사를 건넸다. 믿음이 가는 만남인 것 같아서 생각나는 걸 두서없이 다 얘기하게 됐다며, 잘 정리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한마디도 덧붙였다. 단독대면의 첫 인터뷰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interviewer)이 질문을 받는 사람(interviewee)한테 이런 언급을 듣게 된다는 건 사실 매우 뜻 깊은 일이기도 하다. 제대로 잘 정리했는지 걱정부터 앞서는 까닭이 그런 연유 때문인 것 같다. 가까운 시일 언젠가는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 앞에 그의 멋진 연주가 감동의 선율로 울려 퍼질 날이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날이 되면 여러분도 두 눈을 감고 그의 선율을 감상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글의 서문에 인용했던 그의 한마디를 여기에 그의 대답으로 옮겨놓는 게 문답의 마침표가 될 듯하다.

“우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서로 나누는데, 같은 조건에서 함께 나눠보자는 의미였습니다. 연주자들도 소리로만 듣고 청중들도 소리로만 들어 달라, 그런 취지로 불을 끄게 된 것이죠”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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