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겐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 사람 사는 이야기


제겐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김원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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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한 권의 책과 두 사람이 있다. 책은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라는, 2010년 4월에 출간됐던 에세이집이다. 언젠가 지인의 책꽂이에서 꺼내 한나절 내내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젊은 장애당사자의 냉철하고 직설적인 관점이 유독 인상에 남았던 책이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현장에서 늘 마주치던 인물이다. 공적인 공간에서 마주하는 횟수가 늘어나다 보니, 통성명은 없어도 눈인사를 나눌 관계가 된 얼굴이기도 했다. 다른 한 명은 이번 ‘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취재를 하게 된 사람이다.

약속된 장소에서 그와 마주치는 순간, 서로가 내지른 한마디는 각각 “어?”하고 “아!”였다. 눈인사를 나누던 그 사람이 이번 주인공이었고, 그가 발표한 책이 바로 그 에세이집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차별조사 2과 조사관으로 활동하는 김원영 씨, 그가 ‘한 권의 책과 두 사람’의 삶을 그 자신 하나로 이 자리에 이야기한다.

 

객석을 무대로 바꾸다

강원도 강릉시 경계 안에 포함되지도 않던 당시 외곽 시골에서 태어나, 15세까지 ‘달빛만 들어오던 방’에서 살았음 –

중학교 과정인 경기도 광주의 지체장애 전문 특수학교에 다님 –

그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치름 –

우애곡절 끝에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함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고 졸업함 –

서울대 법학대학원 로스쿨 과정을 마치고 변호사가 됨 –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차별조사 2과 조사관으로 근무 중

김원영, 그와 만나서 나눴던 대화 내용을 언급하기 위해선,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15초 완성’의 짧은 소개로 위와 같이 먼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그에게 듣고 싶었던 ‘인생의 전환기’에 집중하며 글을 풀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뭔가 굉장한 인생 승리라고 포장하는 언론기사가 몇몇 보이지만, 직접 만난 김원영 씨의 모습에선 열심히 사는 ‘한 인간’의 인상이 전부였다. 그냥 익숙했던 이웃 누군가를 개별적으로 만난 느낌이랄까?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편했다. 아마도 서로가 내질렀던 “어?”와 “아!”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만남의 맨 마지막에 묻겠다고 준비했던 질문을 처음부터 던졌다.

지금 있는 위치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대답보다 그의 고개가 먼저 끄덕여졌다.

“인권위 근무 3년차인데, 제가 택할 수 있었던 여러 선택 중에선 긍정적인 면이 많은 자리인 것 같아요. 늘 마음엔 더 나아가고 싶은 게 있죠. 국가기관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제한 같은 게 좀 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기관보다는 자율성이 훨씬 높은 조직이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만족감은 있는데, 저는 좀 더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김원영 씨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컸다. 다른 직장, 더 많은 월급 같은 게 아니란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좋은 위치에 지금 근무하는 건 분명하다고 했다. 그의 갈망은 외형적인 생활 모습이 아닌, 내면으로 채우고 싶은 ‘2% 부족함’이었다. 어쩌면 그 절실함이 ‘98%’의 크기로 그의 영혼에 간직되는지도 모른다.

처음에 언급한 한 권의 에세이집이 그의 저서라는 거, 지인들과 함께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을 설립하고 연극 무대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는 거, 삶의 순간순간 방향의 전환을 이룰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자신의 꿈과 가능성이었다는 것. 그렇기에 지금 그가 가슴에 품은 건 ‘달빛만 들어오던’ 작은 방을 뺀 나머지 전체의 지구 크기처럼 보인다.

“장애연극을 포함한 예술연극에 큰 관심이 있고요. 특히 글쓰기를 무척 좋아해요. 문학적 글쓰기는 아니지만, 사회과학적 글쓰기라고 할까요? 굳이 저널리즘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완전한 학술적 글쓰기도 아니겠지만, 좀 더 깊게 분석하고 취재와 연구를 진행하는 글쓰기에 더욱 집중하고 싶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사회학과 법률적 지식이나 기술이 있잖아요. 그걸 토대로 해서 장애와 인권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개입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좀 더 깊게, 좀 더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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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세상의 아찔한 높이

두 시간에 버스가 한 대 나타나던 시골 동네, 누군가 자신을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바깥세상을 볼 방법이 없던 어린 시절. 실제 그의 집 현관은 계단으로 돼 있었고, 비포장인 골목길에선 휠체어의 이동조차 힘겨운 일이었단다. 서늘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동네 어르신들의 반응은 늘 불편했지만,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그에겐 같이 어울리며 놀 수 있는 또래의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엔 장래희망 같은 건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때는 오로지 답답하다는 거,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너무 답답했고, 또 동시에 뭔가를 배우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어요. 너무나 많은 욕망들에 억압돼 있었던 거죠. 지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성장하고 싶다는 거, 뭔가 성장하고 싶다는 그 모든 갈증에 억눌려 있었던 거예요.”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소년 김원영의 억압된 욕망은 제어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달았다. 같이 어울리던 동네 친구들은 중학생이 돼 학교에 다니고, 입학이 거부된 그의 세상은 방 하나에 국한됐다고 했다. 나름 친구들보다는 자신이 똑똑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학교를 다니며 영어와 수학을 배우는 친구들은 몸도 부쩍 성장하며 어린 그의 가슴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김원영 씨는 갈수록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적으로, 신체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데대한 압박감, 그걸 어떻게 깰 것인가가 모든 당면과제였기에,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열셋, 열네 살 무렵부터 부모님께 뭔가 대책을 세워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던 것 같아요.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순 없는 거잖아요. 시골에서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었던 부모님께는 죄송했지만, 당시 저는 벗어나고 탈출하는 것 이상의 대안을 떠올리지 못했어요.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던 거죠.”

그가 유일하게 먼 곳으로 콧바람을 쐴 수 있었던 건, 담당의사가 있는 서울에 왔다가는 일이었단다.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인 그를 받아주는 학교는 없는데, 어떻게든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던 어머니께서 담당 의사한테 절실하게 물으셨다고 한다. 얘가 다닐 수 있는 학교 같은 게 있느냐고. 의사가 알려준 건 특수학교였고, 수소문 끝에 다다른 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지체장애학교였단다. 중학교 3년 과정인 그 학교가 그에겐 미지의 신세계이자 대안으로 결정된 셈이다. 초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는 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통과의례가 됐다.

“난생 처음으로 방을 벗어나게 된 거잖아요. 입학하게 돼서 너무 좋았어요. 기숙사 생활이지만 일단 학교에 다니게 됐다는 게 가장 좋았고, 학교에서 이성인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정말 좋았어요. 왜냐하면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10년 가까이 남자애들하고만 어울렸거든요. 성별이 다른 제 또래를 가까이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거, 그건 당시 사춘기였던 제겐 크게 가슴 설레는 일이었죠.”

집을 떠난다는 불안감이 물론 있었지만, 그 불안감을 뛰어넘는 건 해방감이었단다. 더욱이 이동이 자유로워졌다는 점도 그에겐 획기적인 환경의 변화였다고 한다. 외출조차 불편한 비포장 길이 전부였는데, 특수학교답게 교내에 이동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는 건 공간에 대한 그의 틀을 깨뜨리게 만든 계기가 됐다. 하지만 들떠 있던 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는 점점 더 힘든 상황 속에 빠져갔단다. 생전 경험한 적 없던 규율과 위계질서, 이 두 가지가 그의 숨통을 막히게 만든 것이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잤던 생활. 부모님이 교육했던 아주 기초적인 요구는 세수하고 이 닦고, 밥을 먹고 책을 보는 등, 무엇 하나 강제된 틀이 그에겐 없었다. 하지만 학교는 달랐다. 등교 시간, 쉬는 시간, 식사 시간, 하교 후 기숙사 학습 시간과 취침 시간 모든 게 정해져 있었고 따라야 했으며, 벗어나면 제재가 뒤따르는 규제가 24시간 그를 통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바로 학생들의 내면을 지배하던 위계질서였다고 한다.기숙사니까 일종의 거주시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종사자의 폭행과 같은 차원이 아니었어요. 거주인인 학생들 간에 철저한 위계질서가 있었거든요. 당연히 나이와 학년을 따지지만, 거기에다 장애의 경중에 따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확고하게 잡혀 있었어요. 장애가 아주 경증인, 지적인 장애가 없고 신체적으로는 건강한 편인 소아마비나 척수장애 같은 선배들이 가장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죠. 그 다음에 지적장애가 수반되지 않는 뇌병변장애가 그 아래 지위를 차지했고, 지적장애와 신체장애를 동시에 중증으로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가장 억압 받는 계층으로 차별을 받았어요. 그게 벗어날 수 없는 틀로 자리 잡고 있었죠. 그 안에서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누구한테도 하소연을 할 수가 없는….”

 

배움이 열어준 신세계, 그러나 비좁은 세계

김원영 씨는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돌아볼 때, 스스로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가 두 번 있었다고 기억한다. 두 번째는 대학생이 된 이후 3년이었고, 첫 번째는 비록 특수학교지만 중학교의 정규과정을 배우게 됐던 3년의 기간이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눌려 있던 모든 게 터져 나오면서, 그 자신의 빈자리가 일순간에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오랜 갈증이 채워질 때, 체계화된 지식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이해할 눈을 뜨게 된 그 시기는 정말 ‘폭발’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정도였어요. 공부에 뜻이 있는 몇몇 학생들이 있었는데, 정말 고맙게도 선생님들이 보충학습 형식으로 따로 모아 깊이 있게 가르쳐주셨어요. 저에겐 엄청난 자극이 됐던 수업이었죠. 지금 생각이지만, 고등학교까지 특수학교 과정을 다녔다면, 아마도 원하던 대학은 가지 못했을 거예요. 아무리 정규수업을 진행한다 해도, 특수학교에선 학급 친구들과의 경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적응하기 힘겨웠던 규율과 위계질서 속에서도 ‘폭발’의 자가발전을 이뤄낸 소년 김원영,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로 결정했다고 한다. 고등학교까지 특수학교를 다니면, 영영 바깥세상에는 못 나갈 것 같은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문제는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주 단순한 핑계논리인 ‘네가 다닐 수 있는 편의시설이 아무것도 갖춰진 게 없어 우리 학교는 안 되겠다’는 게 입학거부의 당위성과 같았다. 그 완고한 벽에 부딪쳤을 때, 그의 내적 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두드려야 열리고 찾아야 구하게 되는 법! 뜻밖의 길을 만나게 됐고, 그 길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 건 결국 ‘사람’이었다. 학교에 자원봉사활동을 오던 한 대학생 누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 누나에게 소년 김원영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누나는 그의 고민을 듣고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특강을 위해 그 누나의 학교에 찾아와 수업을 진행한 이가 당시 정립회관에 근무하던 박찬오 씨였단다. 현재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책임진 박찬오 소장이 이 지점에 등장하는 것이다.

“장애당사자로 활동하며 자립생활을 역설하던 그의 강의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누나는 수업이끝나자마자 박 소장님께 가서 제 얘기를 꺼냈대요. 입학거부로 진학 문제에 갈등하고 있는 후배가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냐고요. 제 얘기를 들은 박찬오 소장, 아니, 당시엔 정립회관 활동가였겠죠. 그 분이 며칠 후에 저를 학교까지 찾아와, 저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거기가 너를 안 받아줘서 못 간다면, 대학도 안 받아준다고 안 갈 거냐? 사회에서 안 받아주면 안 나갈 거냐? 장애인들 사는 데서만 평생 살 거냐?’ 그 당당한 말씀은 얼어붙었던 제 가슴을 일순간에 깨뜨린 빛줄기와 같았어요.”

박찬오 소장은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모든 수단을 동원하면서, 김원영 씨의 고교 입학을 거부하던 학교들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단다. 대화와 회유와 협박이 총동원된 협상의 결과는 입학허가였고, 김원영을 신입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고등학교는 화장실에 좌변기를 설치하고 출입구를 넓히는 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당시를 회고하던 김원영 씨 입에서 박 소장뿐 아니라, 그때 에바다 투쟁에 앞장서던 박경석 현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와의 만남까지 줄줄이 거론됐다. ‘실제 움직이는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언제든 연결의 끈을 갖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지는 대목이다.

 

우리에겐 분노가 필요하다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첫 학기는 ‘진짜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정말 매일 죽고 싶었다’는 그의 고백은 뜻밖이었다. 특수학교였던 재활원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간다는 건 완전한 패배자가 되는 것 같아 불가능했고, 더욱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갈 데가 없는 상태로 죽음만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가 가능해지는 그의 설명이 뒤따랐다. 생의 최초로 탈출했던 중학교는 특수학교였기에 장애인 중심이었지만, 일반 고등학교는 말 그대로 비장애 중심이었기에 1급 장애의 그는 황야에 홀로 내던져진 셈이 됐다는 것이다.

“일단 물리적으로 굉장히 불편했어요. 기숙사가 가파른 산기슭에 있었는데, 누구든 밀어주지 않으면 등하교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거든요. 게다가 샤워장이 공용이었다는 거, 평생 남들 앞에 몸을 보인 적 없던 제겐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고요. 두 번째는 심리적으로 너무 큰 벽에 부딪쳤어요. 비장애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이동수업을 몰려다니는데, 저 혼자 휠체어에 앉아 멀리서 뒤따라가야만 했죠. 남녀공학의 합반이었기에, 넘어지고 실수하는 저의 모습이 너무 창피하고 자존감의 파괴가 오는 거예요. 남자애들만 있는 반이었으면 좀 덜했을 텐데…. 특수학교의 이동편의시설에 익숙하다가 아무런 배려도 없는 학교의 모든 게 매일매일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물리적으론 너무 힘들고 심리적으론 너무 위축돼서 죽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그런데 반전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등장한다. 바닥으로 추락해 있던 당시에 모의고사를 봤는데, 존재감을 상실해 있던 김원영이 1학년 전체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꺾일 대로 꺾이고 숙일 대로 숙인 채로 지내야 했던, 죽음만이 해결책이었던 그의 고개와 어깨가 비로소 허리를 펴듯 제자리를 되찾게 되는 대반전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특수학교에서 보충수업까지 하며 익혔던 그 모든 게, 그에겐 메마른 스펀지가 물기를 듬뿍 머금듯 이미 내재화되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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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펴는 법을 모르면, 접은 채로 움츠린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좌우로 펼친 날개가 얼마나 넓게 펴지고, 얼마만큼 힘차게 날갯짓을 할 수 있는지를 직접 확인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넓게 날아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면 되는 일이다. 원하던 대학에서 지망하던 학과로 진학한 김원영 씨, 그는 인생 두 번째의 폭발을 체험했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몰입할 학문과 미래를 발견한 것이다. 전공에 파고들수록 느껴지는 건 해방감이었고, 비로소 ‘나’를 설명할 언어와 논리를 전공 안에서 찾아냈다고 했다. 그가 날갯짓의 방향을 새롭게 돌린 건 로스쿨이었고, 변호사가 된 뒤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완성이 아닌 ‘과정’에 머물러 있는 게 분명했다. 내면의 세상은 더 큰 자유를 지향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해도 많이 생기고,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하는 업무의 결과에도 만족하고 있어요. 그런데 실제 현장은 너무나 취약한 상황에 여전히 놓여 있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 차원에서 시급히 보완하고 해결해야 될 부분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게 장애 및 정신보건시설 조사와 정책연구이기에, 더욱 심층적으로 파고들고 연구해서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정신장애인들의 강제입원을 허용하는 일부 법 조항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헌법 불일치 판결을 내리고 개정을 공식화했는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위법에 따라 개정의 공식의견을 낸 이가 바로 김원영 조사관이다. 위헌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지난한 작업을 그가 담당했던 것이다. 성취의 만족보다는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곧 새로운 위헌 판결과 개정된 법률을 연이어 만나게 될 것 같다. 현 직위에 맞는 업무로서의 그의 성취도 물론 기원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연극무대 위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고 싶다는 기대도 함께 떠오른다. ‘자유’, 그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내 안에 있기에, 그걸 찾고 찾지 못하는 건 개인의 책임임을 되새기게 된다. 그의 삶을 마주보며 얻은 결론은 그것이다.

 

본문의 소제목들은 그의 저서인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의 소제목들 중에서 임의로 인용했음을 밝혀둔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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