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도 어려운 길, 예술은 도전의 성취입니다 > 사람 사는 이야기


비장애도 어려운 길, 예술은 도전의 성취입니다

피아니스트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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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행사장 무대를 촬영한 것이고, 안에는 조그만 조명등 하나만 눈에 띈다. 그건 ‘여기에 그랜드피아노가 있음’을 뜻하는 일종의 위치 표시가 된다. 그런데 객석 전체의 관객들은 가장 낮은 음성으로 “와아!” 하는 감탄사를 일제히 내지른다. ‘암전(暗轉)’은 연극에서 막을 내리지 않고, 무대 조명을 끈 상태에서 장면을 바꾸는 걸 말한다. 음악 공연의 무대에서 연주가 ‘암전’으로 진행된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연주자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최고 과정의 교육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으로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는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김예지 씨가 이번 만남의 주인공이다. 그 누구보다 넓은 세상 속에서 최상의 연주 활동을 펼쳐가는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안 보여서 안 보았던 아이

“장애를 가지고 뭔가 일을 하려 하면, 사람들은 제대로 못할 거라는 불필요한 편견을 먼저 떠올리죠. 할 수 없을 거라고, 어린 아이처럼 계속 의존만 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그런 반응들이 저는 정말 싫었어요. 가장 싫었던 건, 저의 의사결정을 제가 하지 못할 경우였어요.

저는 시각장애 때문에 아이컨택(eye contact, 눈 마주침)이 안 되잖아요. 사람들은 보통 눈이 마주쳐야 의사가 결정되고 결론을 낸다고 생각하죠. 최종 판단은 제가 내려야 할 일인데, 상대방은 같이 있는 저의 엄마 눈을 보며 대화를 나누려는 거, 저는 그게 참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가급적 저의 선택과 결정은 저 스스로 내리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대화를 나누기에 가장 편한 곳은 당연히 집이라는 그의 의견에 따라, 만남의 장소는 김예지 씨의 집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이것 또한 편견일까? 만나러 가면서도, 출입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도 내심 마음을 다잡기에 바빴다. 최고 과정까지 오른 인물이고, 게다가 클래식 전공자 아닌가. 무언가 무게감 중심의 대화가 오갈 것 같고, 몸에 익숙지 않은 예의까지 갖춰야 할 것 같아 일정 부분 부담감을 안은 채로 출입문을 열었다. 그런데 상황은 단번에 180도 반전했다.

무게감이니 예의니 하던 선입견 또한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활짝 웃는 얼굴로 “안녕하세요!” 반기는 김예지 씨의 모습은 뭐랄까, 오랜만에 방문한 삼촌이나 이모를 맞이하는 어린 조카의 해맑음 같다고나 할까? 간단하게 몇 마디 나누고 사진 한두 장 찍는 인터뷰인 줄 알았는데, 어느 지면에 어떤 내용으로 들어가는 만남인지를 뒤늦게 알게 된 그는 잠시의 양해를 구하며 방으로 향했다. 머리와 복장을 다시 준비하겠다는 의미였다. 늘 가장 편하게 입는다는 의상으로 갈아입고, 식탁 의자에 앉아 엄마와 함께 머리를 매만지면서도 그는 계속 자신의 일상 그대로를 말했다. 어린 조카처럼 말이다.

“전 머리가 엄청 길었거든요. 그런데 작년 말에 기부하느라고 이렇게 짧게 잘랐어요. 소아암 어린 아이들을 위한 가발 만드는 데 사용할 머리카락을 기부하는 행사가 있었거든요. 파마나 염색을 안 한 25cm에서 30cm의 생머리만 가능한데, 제 머리카락이 조건에 딱 맞아서 기부한 거예요. 생각보다 너무 짧아진 것 같아 적응이 잘 안 되네요. 두세 달 지나면 괜찮아지겠죠?”

예지 씨는 사진 촬영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더니, 거기에 대해서도 양해와 부탁을 덧붙였다. 자신은 스스로 자세를 잡지 못한단다. 그래서 그걸 지정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웃는 건지 어떤 표정인지 스스로 모니터링이 안 되다 보니까, 100장을 찍어도 마음에 드는 게 두세 장 나올까 말까 할 정도란다. 알아서 마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하니까, 믿고 맡기겠다며 그는 다시 환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도 시력은 물론 나빴지만, 자동차 번호판 정도는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병원에서 망막색소변성증이라고 진단한 거예요. 그래서 엄마의 판단에 따라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잘 안 보이는 글씨를 애써 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글 내용을 이해하게 되다 보니까, 저는 제대로 보려는 노력을 접고 안 보기 시작했어요. 이만큼 편하게 읽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왜 눈으로만 보려 하나 하며, 그 어린 마음에 안 보며 살고자 노력했던 거예요. 좀 특이한 경우가 되겠죠?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당시는 어차피 안 좋아지는 과정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치료에 대한 미련은 부모의 마음이 더욱 절실한 법 아닌가. 그런데 엄마 역시도 딸의 의견에 따라 ‘보는 걸 포기’하며 인정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단다. 국내 최고의 대학병원에서 망막색소변성증이라며 갖은 치료과정을 다 진행했는데, 또 다른 최고의 대학병원에 가니까 시신경 위축이라며 전혀 다른 진단과 치료법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림일기 안에 자기 글과 그림을 적고 그리던 아이였지만, 엄마는 그 시점에서 결단을 내렸단다. 더 이상 눈을 건드리지 말자고, 수술이든 뭐든 더 이상 나아질 거라는 희망 대신 현실을 인정하자고 말이다. 비록 보이진 않더라도, 딸의 두 눈이 맑은 눈동자의 상태로 계속 남게 하는 건 치료중단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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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견인 ‘찬미’가 한 발을 들고 잠든 모습처럼 누워 있다. 가장 행복하고 자신이 사랑 받고 있음을 느낄 때 취하는 찬미만의 독특한 자세라고 한다.

긍정의 마음이 열어준 가능성

“그나마 눈으로 봤던 걸 기억하면서 사는 분들도 적잖게 계시다고 들었는데, 저는 기억을 기억하면서 살지 않아요. 왜냐하면 기억은 계속 만들어가는 거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지금 현재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도 나중에는 기억이잖아요. 저의 인생관이 그렇기 때문인지, 저는 과거에 얽매지 않아요. 봤던 기억을 기억하기보다는 현재를 잘 살면 되고, 현재의 기억에 충실하면 되잖아요. 이 시간이, 이 만남이, 이 인연이 좋은 기억으로 두고두고 간직되면 되니까요.”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그 내용이 진지해질수록, 다른 만남과 구분되는 특징 한 가지가 마음에 떠올랐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모든 걸 생각하는 이는 처음이 아닐까 싶어진 것이다.

‘긍정적으로 산다, 이젠 극복했다, 좋은 생각만 하려 노력한다’는 차원이 아닌, 그 사람 자체가 긍정으로 가득 채워진 인물임이 분명하다는 의미가 된다. 부엌에서 식사준비를 하시던 엄마가 한 말씀 거드셨다. 힘들고 어렵다며 죽고 싶은 일투성이였을 사춘기 시절에도, 딸은 ‘눈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하소연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왔던 걸까? 혹시 피아노와 함께하는 음악에서 생겨나는 힘이 아니었을까?

“사실 저는 꼭 피아노를 고집했던 건 아니었어요. 워낙 음악을 좋아했고 여러 악기도 조금씩 다룰 줄 알았지만, 우선 먼저 피아노에 제가 다가갔어요. 다른 집처럼 엄마의 성화? 그런 건 없었죠. 오히려 반대로 엄마는 하지 말라고 계속 말리셨거든요. 초등학교 1,2학년 때부터 피아노가 좋았어요. 그때는 작고 검은 건반 두 개와 세 개 아래에 흰색 건반이 가득하다는 것 정도는 눈에 보일 때였죠. 참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뭘 누르는지를 볼 능력은 안 됐고,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어요. 제 손끝을 일일이 따라갈 시력은 안 됐던 거죠. ‘피아니스트가 아니면 안 돼!’ 이런 결심이 앞섰던 건 아니었어요. 자연스럽게 좋아했고 계속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혼자만의 꿈을 갖게 됐고, 그 꿈과 함께 피아노를 좋아하며 지냈던 거예요.”

그럼 피아노가 전공으로 결정된 건 언제였을까? 대학 진학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자, 예지 씨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해야 할 입장에 서게 됐단다. 일단 음악 분야를 원했고, 나중에 직업으로도 음악을 하고 싶다는 게 전제조건이 됐다고 한다. 당시는 음대에 장애인 특례입학 같은 게 없었기에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작곡 분야로 가려면 새로운 레슨을 받아야 했기에 이미 늦은 상태가 돼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찾게 됐단다. 대안이라기보다는 이미 가장 잘 하고 있는 것, 그게 전공이 되면 최고의 선택이 될 일 아닌가. 피아노는 그렇게 해서 그의 인생 안에 중심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00학번으로 피아노 전공의 특차입학을 해서 2004년 2월에 졸업하고, 3월부터 음악교육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어렸을 때는 음악 자체가 좋았고 피아노도 연주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계속했던 건데, 대학생활을 하다 보니까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게 세상이라는 걸 점점 더 크게 배우게 됐죠. 뭔가 직업을 가져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이 세계의 모든 게 너무 어려운 거예요. 직업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그 직업을 갖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까지도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도 좋아하는 걸 놓기는 싫어서, 나름의 대안으로 음악교육 전공으로 특수교육대학원에 들어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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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하다, 하면 되니까

예지 씨는 대학원 진학 당시가 엄마와 가장 큰 갈등이 진행됐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일단 시작한 피아노 전공이기 때문에, 완성을 위해선 유학을 다녀와야 한다는 게 엄마의 강력한 의견이었다고 했다. 일단 실력을 인정받고 있을 때 도전해야 하고, 서양음악이기에 유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말씀이셨단다. 하지만 음악교육대학원이라는 차선책을 택한 예지 씨와의 의견은 접점을 찾지 못했고, 그는 자신의 생활을 직접 책임지기 위해 한 시각장애인복지관에 음악선생님으로 취직을 해서 학업과 사회생활을 병행하게 됐다고 한다.

대학원과 직장 생활을 동시에 한다는 건 너무 힘든 나날임이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봐도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그때 찾아들었단다. 연주 활동 제의와 무대 공연 일정이 계속 그에게 찾아들었다는 것이다. 연주를 한다는 건 치열한 개인 연습과 사전 합주 과정이 필수인데, 학업과 직장의 병행이던 당시의 그에겐 어느 것 하나 집중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뿐이었단다. 그래서 1년여 만에 복지관 음악선생님은 그만두고, 국내외를 바삐 오가는 일정으로 연주활동에 그는 다시 전념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저는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됐어요. ‘정말 유명한 사람만이 성공하는 게 음악이다.’ 당시까지 저는 그렇게 생각했고, 대학교 때 다른 친구들이 각종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는 걸 보면서도 ‘성공하는 극소수’ 중심으로만 판단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를 필요로 하는 연주활동이 폭넓게 진행되면서, ‘정말 유명한 극소수’가 아니더라도 음악의 성취를 이룰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좁은 현실에 얽매일 필요 없이, 제가 개척을 하면 훨씬 새롭고 확실한 다른 방법들이 생길 거라는 믿음 같은 게 떠올랐던 거죠.”

대학원의 음악교육 전공을 석사학위로 마무리한 뒤,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유학이었다고 한다. 오랜 준비 끝에 그는 가장 조건이 잘 맞던 미국의 피바디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밟게 됐단다. 피바디 음대를 다닌다는 건 세계 최고라는 의미와 같다. 세계 모든 클래식 음악인들이 선망하는 그 대학에 예지 씨가 유학을 갔다는 것, 그건 당시 그의 실력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대변하는 증거가 된다. 그렇지만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 눈에 보이는 건 빛의 유무(有無)뿐인 그에겐 언어의 벽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단다.

“영어로 모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거, 그건 비장애의 입장에선 느끼지 못할 엄청난 장벽이 됐어요. 저는 안 보이잖아요.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학생들은 영어를 다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교수님의 표정이나 분위기만 봐도 대충 눈치껏 따라갈 수 있었대요. 그런데 저는 모든 말을 일단 100% 이해해야만 따라가는 게 가능했죠. 저한테는 ‘눈치’라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영어를 공부해야 했어요.”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만큼 그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으로 늘어났다지만, 그 과정이라는 건 우리의 가벼운 상상을 뛰어넘는 가시밭길이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단 하나의 리포트를 적고 제출하기 위해 10권, 20권의 책을 읽어야 했다는 것, 게다가 전문용어뿐인 영어로 된 원서였고 더욱이 그는 시각장애를 가진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근본적인 회의감이 그의 가슴에 밀려들었단다.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지? 나는 여기에 피아노를 치고 배우러 왔는데,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책만 붙들고 씨름하는 기억밖에 남지 않는 이 생활은 뭐지?’

“정말로 영어로 작문했던 기억만 나는 거예요. 그래서 연주만 할 수 있는 과정으로 옮기게 됐어요. 2009년 9월에 석사를 끝내고 연주 중심의 연주자 과정을 밟게 된 거죠. 왜냐하면 저는 정말 많은 연습을 하고 싶었거든요. 실제로 그런 목마름이 있었어요. 연주 중심의 과정에 몰두하다 보니까, 활동의 제의가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죠. 그래서 한국에 와서 연주도 하면서, 저의 지향점이 어딘지를 본격적으로 떠올리게 됐어요. 최종적인 완성이 무엇인지, 저의 인생의 이름으로 깨닫게 된 계기가 됐던 거예요.”

 

진정한 성취를 원한다면 도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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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10여 년 전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독자 여러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시각장애인 안내견학교를 운영하던 모 그룹의 TV 광고에 한 여성이 안내견과 함께 출연해서, ‘나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다른 세상을 안내견을 통해서 만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내용을 한동안 방영했던 일이 있었다. ‘그 여성’은 그 다음 해엔 미국 CNN 등을 통해 방송된 같은 그룹 해외판 광고에도 안내견과 함께 출연해서 비슷한 내용을 ‘연출’했던 바 있었다. 여기에서 ‘그 여성’은 누구일까? 바로 김예지 씨다.

“공부를 하다 보면 ‘일단 여기까지’라는 타협점이 없게 되는 상황이 와요. 최종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선, 남은 마지막 단계까지 끝을 봐야 한다는 상황을 깨닫게 되는 거죠.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에요. 미국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제대로 하려면 박사과정까지 마쳐야 그 다음 인생의 발판이 마련된다는 거, 그건 어디나 다 똑같았어요. 그래서 가장 좋은 조건이었던 한 대학을 결정하고 박사학위까지 마쳤어요. 그 대학은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패다고지(pedagogy), 그러니까 교육학의 교수법까지 함께 이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죠. 실기라면 실기, 이론이면 이론, 이렇게 분리해서 따로 하는 게 대부분인데, 이렇게 두 개의 영역을 동시에 열어놓은 박사과정은 정말 흔치 않았거든요. 거기서 저는 모든 학위의 최종 과정을 마치게 된 거예요.”

이 글의 서문에서 ‘여성으로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는 표현을 적어놓았다. 그렇다면 시각장애를 가진 여성은 전문 피아니스트가 없다는 의미일까? 그건 아니다. 전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이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유례가 없다’는 건 해당 분야의 최고 학위까지 함께 갖추고 활동하는 전문 피아니스트가 없다는 걸 뜻한다. 피아노로 도전할 수 있는 관련 분야의 박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이, 그가 바로 김예지 씨라는 말이 된다.

“실기강의를 위해 대학에서 학생들과 일대일로 피아노 앞에 앉을 때마다, 저는 제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최고 덕목을 항상 강조해요. 개인적인 미적 표현력이 다 달라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 연주자들의 모든 연주가 다 똑같으면, 우리가 무얼 하려고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 그 많은 연주회를 찾아다니나요? 당장 유투브에 얼마나 좋은 연주가 많은데요. 그냥 집에서 똑같은 CD를 각자 듣는 게 차라리 낫지, 굳이 ‘그 연주자의 그 연주’를 들으러 움직일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는 국내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는 이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유학을 통해 얻게 된 건, 결국 ‘같은 곡을 연주해도 자기만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개성을 갖춘 이가 진정한 음악가이고 진정한 예술가’라는 결론이었다고 한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늦어지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자기만의 감수성’이라는 의미가 된다.

“음악은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서,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이에요. 음악을 한다는 거, 예술을 한다는 건 사실 먹고 산다는 걸 먼저 생각하면 아예 손도 대지 말아야 할 영역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 현실을 먼저 알고 시작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실용주의 중심의 이 사회에선 ‘모든 게 현실’이잖아요. 그걸 알고 시작하는 것과, 몰랐다가 닥치는 건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되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아니, 정말 근본적인 맹점은 아무도 그런 얘기를 미리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맞는 말이다. 가르친다는 모든 이들은 ‘참고 견디면 얻게 되는 열매의 달콤함’만 강조한다. 예술인데도, 창조적인 영감을 얻어야 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인 창작의 영역인데도, 가르치는 이들이 외치는 건 결국 ‘나를 따르라’는 의무감만 올가미로 내던진다. 그게 악순환의 연속일 뿐이라는 걸, 그들 스스로가 눈을 감으며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선대에서 배웠던 것처럼 말이다.

“예술은 장애가 있어서 어려운 게 아니에요. 장애가 없어도 어려운 게 예술이에요. 그걸 감안하고 시작해야 하는 게 모든 예술 활동이고, 예술을 인생의 업으로 삼으려 하는 이들에겐 그런 절실하고 단호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늘 생각해요. 그런 모든 불합리한 전제조건과 난관을 직시하면서까지, 정말 내가 이걸 내 인생의 절대목표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가, 그게 진정 확실하다면 저는 적극 추천을 드리고 싶어요. 장애가 없는 이들도 하다 보면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게 예술의 영역이잖아요. 그만큼 힘들고 어렵지만, 그만큼 깊은 성취를 얻게 만드는 세상이 따로 존재한다는 거죠. 눈앞의 현실만 따라가는 이들이 지향하는 성공보다 훨씬 값진 결론을 얻게 되리라는 거, 저는 진정한 도전을 하는 이들에겐 분명한 답이 생길 거라는 믿음과 확신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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