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삶은 책상이 아닌 현장에 존재한다 > 사람 사는 이야기


진정한 삶은 책상이 아닌 현장에 존재한다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형숙 소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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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집회와 행사에 함께하다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늘어난다. 눈인사를 나누게 되고 손 흔들며 반가움을 전하게 된 이들과 3년, 5년, 10년을 지내는 동안, 이젠 허물없는 대화와 즉석토론도 가능해지는 관계로 발전하게 됐다. 그런데도 인간적인 ‘그의 삶’에 대해선 모르는 경우가 많아, 긴 대화를 나누고 싶은 얼굴들이 하나씩 둘씩 눈에 띄게 된다. 그래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이한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의 삶을 듣고 싶다고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듬직한 언니 같고 선배가 되는, 또한 아직도 막내처럼 모든 일에 솔선수범 앞장서는 이형숙 씨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우렁찬 투쟁 현장의 구호 대신, 웃음과 진지함으로 가득했던 대화의 시간이 인상적이었다. 어느덧 2017년 송년을 맞이하게 된 이 시점에서, ‘스스로의 과거’를 되돌아보듯 그의 인생을 함께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다.

 

느낀 그대로 말하고 행동했을 뿐

“사실 우리는 다 참으며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참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저는 참지 말자고 말씀드리고 싶거든요. 물론 안 참아서 더 나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제가 참고 살아왔던 인생이었기 때문에, 저의 삶 자체가 그 ‘참음’으로써 더 속박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 같아요. 갈수록 그걸 절실하게 느꼈거든요.”

현재 그의 명함 속 직함은 ‘노들장애인자립 생활센터 소장’이다. 그 직함 말고도 몇몇 조직의 위원장이나 대표의 입장으로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런데 이형숙 씨의 인생여정에는 남다른 특징 하나가 두드러진다. 짧게 요약한다면, 장애인권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느꼈던 생활과 사회의 부조리함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살아왔는데, ‘그게 알고 보니 장애인권의 투쟁이었더라’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저는 그냥 제가 겪는 일상의 문제들이 불편해서, 그 불편함을 저의 생활환경 안에서 공개적으로 얘기했을 뿐이에요. 서울이라는 중앙에서는 이동권 투쟁에다가 지하철 철로점거농성 같은 구체적인 활동들이 전개됐다는데, 당시 저는 그런 걸 하나도 몰랐거든요. 그냥 제가 살던 지역 안에서 불편하고 불합리했던 점들을 ‘까놓고’ 얘기하며 지냈을 뿐이에요. 그런데 아무도 그런 지적을 대놓고 하지 않다 보니까, 또한 그런 목소리가 있었다 해도 낮고 작게만 들리니까, 지자체 같은 담당 책임자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제 목소리만 상대적으로 크게 들렸던 모양이에요.”

그는 이론 중심의 구체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고 했다. 물론 지역의 자립생활센터 소장을 맡고 난 뒤부터 열심히 파고들기는 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구체적으로 장애계의 핵심 사안이라는 투쟁의 내용이 뭔지도 몰랐다며, 그는 대화 내내 ‘순진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의 현재 직위와 위치 같으면 얼마간 꾸미고 포장하며 자신의 입장을 ‘얼마간’ 가공해도 될 것 같았는데, 그는 시종일관 있는 그대로의 기억과 심정만 덤덤하게 털어냈다.

만남의 자리에서 모든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최종 확인 차원에서 한마디 질문을 덧붙였다. 정말 오늘 발언한 내용 그대로 적어도 되느냐고 말이다. 대답은 “그쵸!(그렇죠)”로 끝났다.

 

왜 하필 선거철이었을까?

우리 나이의 셈법으로 세 살이 됐을 때, 그가 얻은 건 소아마비였다. 건강하게 잘 자라던 아이가 어느 날 저녁까지 잘 먹고 잠들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고열로 신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논산 연무대가 있던 지역에 살던 그의 집안은, 인근에 외가 쪽 친척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한의원을 하는 이도 있어서, 심하게 아플 때는 밤늦은 시간에도 문을 두드리고 진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는 ‘하필이면’이라 해야 할 상황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선거철이었대요. 그래서 지역의 한의원 한의사들이 전부 다 대전으로 올라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양의원(일반병원)으로 갔대요. 새벽 4시즈음이었다고 엄마는 기억하시는데, 의사가 열을 재더니 40도가 넘는다고, 그래서 시급하다며 주사 한 방을 제게 놓았대요. 그 주사를 맞은 직후부터, 제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면서 축 늘어졌대요. 그때부터 전신마비가 왔던 거죠. 지역의 어르신들은 사람의 몸이 치료되는 과정의 증상을 민간요법처럼 잘 아시잖아요. 열이 천천히 내려가야 정상인데, 정말 순식간에 제 몸이 차가워졌다는 거예요.”

그의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그 주사 ‘한 방’을 원망하신다고 했다. 이후 그는 일곱 살 전후가 될 때까지 누워서만 지냈단다. 몸을 추스르며 힘겨운 몸짓이라도 발걸음이 가능해졌을 무렵 그는 한 살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집안의 상황이 복잡해진 탓에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게 됐고, 열 살 터울이던 오빠도 아버지 곁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훨씬 이전의 일이지만, 6·25 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됐기 때문에, 전쟁 와중에 사라진 가족을 찾느라고 당시는 모두가 점쟁이들을 찾아갔대요. 정말 신통하게 잘 맞추는 점쟁이가 있다고 해서, 엄마가 그 집을 찾아가서 가정의 화목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문의를 하셨대요. ‘애를 하나 더 낳아라.’ 그 답을 얻고 나서 저를 갖게 됐다고 하셨거든요.” 만삭이 됐을 무렵,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했던 어머니는 아기의 탄생과 함께 찾아들 행복을 기원하며 그 점쟁이를 다시 찾아가셨단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난데없는 청천벽력이 되고 말았다 한다. ‘아들이고 딸이고, 이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낳으면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

 

가장 큰 나의 꿈,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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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또래들과 뭔가가 다르다는 거, 사실은 한참 어릴 때부터 느꼈죠. 왜냐하면 제가 못 걸었으니까요. 귀한 딸에게 뭔가 다른 공부를 가르치고 싶어서, 엄마는 저를 피아노 교습소로 데리고 가셨대요. 그런데 제 오른손에 장애가 있어서 피아노를 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답만 들으셨나 봐요. 그때 제가 느꼈던 건 아주 단순한 자괴감이었어요. ‘아, 내가 이것도 못하네?’ ‘아,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이렇게 많아지는구나….’”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고 표정으로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 한가운데는 항상 울분 비슷한 게 떠나지를 않았단다.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애들이 일제히 시골의 산과 들로 뛰어나가면, 그는 혼자서 힘겹게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모님들은 당시 그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하신단다. ‘밖에만 나갔다 오면 네 입이 이만큼 나와 있었다’고, ‘울며 들어오는 때도 많았다’고 말이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다 보니까, 그의 어릴 때 꿈은 현실과 반대인 삶을 사는 게 전부였단다. 사람들 말에 어머니는 늘 귀가 솔깃하셨다고 한다. ‘어디 가서 수술을 하면 나아진다’, ‘어디서 수술하면 잘 걷게 된다더라’, ‘내가 빨리 돈 벌어서 형숙이 너부터 수술시켜야겠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또한 덩달아 그 꿈에 빠져들었단다.

“어릴 때 제 마음과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사실 엄마예요. ‘너는 몸이 이렇게 불편하기 때문에, 네가 먹고 살려면 공부를 많이 해서 의사든지 약사가 돼야 한다.’ 그러면 저는 생각하는 거죠. 의사와 약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해도, 그렇게 하면 제가 먹고 살 수 있다니까 공부부터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거예요. 마음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 꿈 중에 가장 컸던 건 빨리 수술을 받는 거였어요. 걷고 싶어서요.”

 

살아남기, 견뎌내기, 도전하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는 당연히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한 뒤 졸업해서 직업을 갖겠다는 생각만 간직하고 있었단다. 하지만 집안의 상황은 대학 진학을 기약 없이 미뤄야 할 형편이 됐기 때문에, 그는 ‘잠시’라고 생각하며 이모네 집에 가서 한복 만들기를 배웠다고 한다. 대중적으로는 유명하지 않지만 알만한 사람들한테는 최고로 평가를 받던 이모님이 계셨는데, 그 분한테 배우며 나름 전문가의 길을 가게 됐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바느질만 하고 계시는 이모님의 모습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익숙했기에, 실은 중학교 시절부터 가끔씩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이모의 일을 돕곤 했었단다. 그런데 그게 그의 직업이 된 셈이다.

“남자 저고리는 무거워서 여자 한복 위주로, 그 중에서도 깨끼저고리라고 해서 여름 한복을 집중적으로 만들었어요. 속이 비치는 재질이라서 바느질을 두 배 더 해야 하는, 손길이 아주 많이 가는 작업이었거든요.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돈도 많이 벌었죠. 한 벌 만드는 데 남들이 네 시간 넘게 걸리는 걸, 저는 두 시간 반 만에 끝낼 정도로 손놀림도 빨랐어요. 손의 장애가 지장을 주지 않을 수준 안에서,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던 거예요.”

‘잠시’라고 생각했던 한복 만들기가 7년 넘게 이어지는 동안, 그는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됐단다. 이렇게 정지된 자세로 하루 종일 일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 무슨 일을 하건 외부로 돌아다니는 게 자신에게 맞는다는 걸 몸과 마음으로 확인하게 됐다는 것이다. 운전면허를 취득했기에 운전이 가능했고, 세 바퀴로 개조한 오토바이로 언제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실내보다는 밖으로 향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발목을 잡는 아니, 삶의 틀 자체를 바꾼 사건이 발생했단다.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들어간 집안의 연대보증이 잘못돼서, 정말 엄청난 빚이 그의 이름 앞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소형 집 한 채 값에 해당되는 금액의 굴레에서 헤어나기 위해, 그는 당시 거주지였던 경기도 의정부에서 보험설계사도 5년 했고, 예정에도 없던 화장품 외판원도 병행하면서 빚 청산 하나에 모든 걸 매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 엄청난 금액을 거의 다 해결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는 제3자의 추측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대목일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나니까, 컴퓨터를 배워야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역에서 알아봤더니 무료 컴퓨터 강좌가 있다기에, 찾아가서 문의하니까 장애인 직업훈련을 하는 데였어요. 컴퓨터 교육, PC 조립, 워드, 그런 걸 1년 과정으로 배우는 건데, 장애인들만 모여서 배우는 자리에 함께하는 건 처음이었던 거죠.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그 이전까지는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걸 저는 너무 싫어했거든요. 어디서 나오라 해도 안 나갔고, 어떤 자리에서든 어울릴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거죠. 그랬던 제가 그 강의실에 앉아 있게 된 거예요.”

 

한 걸음씩, 또 한 걸음 더

그게 2004년 전후의 일이라고 기억하는데, 이형숙 씨는 당초의 우려와 달리 강의실 분위기에 점점 익숙해졌단다. 다양한 장애유형의 인물들 속에서 처음 듣는 새로운 정보를 접하며 조금씩 친해지다 보니, 나중에는 1년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는 생각까지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반장과 팀장까지 맡았다고 하니, 게다가 그 강좌를 함께 들은 이들과의 모임을 몇 년 더 이어갔다고 하니, 그의 인생 최초의 ‘장애인들과의 어울림’은 일단 성공을 거둔 셈이 된다.

“2006년인가? 이사를 간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애인복지관이 설립됐어요. 그래서 컴퓨터 관련 강좌를 새로 들었고, 그러면서 장애인들과의 어울림이 훨씬 자연스러워진 거예요. 그 이전까지는 제가 사회성이라는 게 굉장히 한정돼 있었잖아요. 그동안의 사회라는 건 이모 밑에서 계속 바느질했던 거, 그렇게 계속 빚을 갚아나갔던 거, 보험설계사 같은 일을 했던 그런 것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장애인들과 함께하다 보니까, 뜻밖에도 굉장히 편하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 즈음부터 제 생활의 축이 장애인들과의 관계로 서서히 바뀌게 된 것 같아요. 무슨 인권이나 운동의 개념 같은 건 아예 몰랐고, 당시엔 말 그대로 친목이 전부였죠.”

그 장애인복지관에서 새로 만든 장애여성모임에도 함께했는데, 마음이 참 잘 맞는 이들이라서 열심히 활동했단다. 또한 중앙에서 온 중증장애여성 활동가들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됐다고 한다. 저만큼 중증장애를 가졌는데도, 장애와 인권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하고 정리하는 모습에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런 ‘이형숙’에게 하나씩 둘씩 손짓을 전했던 모양이다. 의정부지역에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준비한다는데, 그 운영위원회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게 됐단다. 그때까지는 자립생활이 뭔지도 몰랐지만, 일단 함께하게 되면서 그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세상과 최초로 연결이 된다. 그렇다면 ‘장애인 인권’이 뭔지, ‘자립생활’이 뭔지도 몰랐다던 그를 지역에선 왜 주시했던 걸까?

“나중에 들어보니까, 해당 주최 측에서는 저한테 그런 마인드가 있어 보였대요. 어쩌면 제 가슴에 평생 담겨 있던 분노가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죠. 실제 그랬던 모양이에요.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저는 굉장히 당당하게 말을 했던 것 같아요. 상대가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졌다 해도, 저는 제가 생활 속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불합리함을 있는 그대로 거침없이 표현했거든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라면, 당당하게 발언해야 맞는 일이라고 저는 늘 생각했으니까요.”

 

오늘도 나는 현장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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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강의를 열심히 수강했던 그는 ‘방문강사자격증’도 얻었기에, 신청한 가정을 직접 찾아가서 장애당사자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일 또한 몇 년 간 계속했단다. 그 방문강사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중증)장애인 당사자를 만난다는 건 만나서 얘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라는 거, 교육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게 가장 중심이 돼야 한다는 사실이 하나의 결론으로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전부 다 저를 찾았어요. 특히 발달장애아 부모님들은 저한테 따로 부탁하시곤 했죠. ‘꼭 우리 애를 맡아 달라’고요. 방문강사라는 이름으로 일하면서, 지역의 장애인들을 정말 많이 만났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봐도, 저는 그 당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정말 열심히 마주했던 것 같거든요.”

그런 ‘이형숙’이란 인물을 가만히 놓아둘 리는 없는 일이다. 운영위원을 맡고 있던 센터의 소장 자리가 공석이 되자, 운영위원회는 이형숙 운영위원을 소장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소장은 장애당사자이어야만 한다’는 조항 때문에 자신이 추천된 줄 알고, 그는 일단 뭐든 배워 보자는 심정으로 받아들이기는 했단다. 그런데 ‘소장’이 할 일은 센터의 업무 이외에도 따로 쌓여 있는 법이다. 대외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공식적인 모임에는 ‘소장’의 이름으로 참석해서 발언도 해야 한다.

“그렇게 중심부의 임무가 제게 계속 던져지다 보니까, 저의 입장과 위치가 점점 무거워지는 거예요. 의정부에도 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니까 만들자고 했고, 활동보조가 너무 부족해서 늘려야 하는데 그게 안 되면 싸우자고 했고, 이동권 편의가 전혀 없으니까 이것도 제안하자고 했고, 그러다가 정말 얼떨결에 시청 앞에서 천막농성까지 하게 됐죠. 여기서 ‘얼떨결’이라는 건 농성을 열심히 준비했던 활동가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항상 부조리에 대항하며 발언하던 저 자신이 막상 천막농성에 들어간다는 건 정말 예상도 못했다는 의미예요. 그런데 그 농성을 겪으면서, 이후 또 다른 싸움들을 진행하면서 저는 확실한 잣대를 갖게 됐어요. 한마디로 말해, ‘앉아서 펜대만 굴리는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경기도에서 장애인콜택시 도입은 의정부시가 처음이다. 이후 평택과 수원으로 싸움이 확산되게 됐는데, 전국 단위의 단체가 모여 있던 중앙, 다시 말해 서울에서는 이런 궁금증이 진지하게 전해졌다는 후일담도 들린다. “경기도의 이형숙이 도대체 누구야?” 시설 출신도 아니고 특정 학교나 어느 회관 출신도 아닌, 말 그대로 ‘장애계의 족보’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1인의 등장’이 적잖은 화제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 삶의 과정을 거쳐 온 그가 이젠 ‘중앙’으로 첫 진입을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명함 속 직함이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으로 새겨진 것이다. 담담하게 털어놓는 그의 감회 속에는, 앞으로 나아갈 그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가 드러나는 듯하다.

“그냥 제 갈 길을 가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런데 갈수록 확실하게 느끼는 게 있어요. 현장에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그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장애인의 현실을 직접 직시한다는 건, 책상에 앉아 서류로만 해결하려는 관료적 의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죠.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만 보이고 깨닫게 되는 건 따로 있는 법이에요. 저는 오늘도 현장 속에서 현실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속에서 저 스스로도 성장해 왔고, 지금도 성장하는 것이죠. 이젠 장애인자립생활의 진정한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여러분도 모두 힘내세요!”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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