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 한 권의 책으로 시작된 인연 > 동화,만화


어느 하루 : 한 권의 책으로 시작된 인연

함께 읽는 동화

본문

 
재원은 부산을 향해 차를 몰았다. 2박 3일간의 출장길에 오른 그는 8년 전 부산에서 헤어진 혜민과의 기억을 떠올린다.
복학하고 4학년이 되던 해, 이미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혜민이 불쑥 결혼 얘기를 꺼냈다.
지병이 있으시던 혜민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집안에서 서둘러 결혼을 하라는 거였다.
졸업도 하지 않은 재원에게는 홀어머니와 동생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3개씩 해도 늘 빠듯한 그였기에 결혼은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우리 그만 헤어지자.”
“왜? 갑자기 왜 그러는데…. 결혼 이야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거야? 경제적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게.”
“우리 만난 지 7년이야…. 너에 대해 이제 아무 감정이 없어…. 미안해.”
 
 
재원의 말을 믿지 않는 혜민에게 모진 말들을 쏟아내며 그녀를 보내고 가난이 싫어서 미친 듯이 일만 했다. 그렇게 보낸 혜민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밀어내는 그 날의 기억은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프다.
 
 
재원은 출장을 마치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러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카페 책꽂이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글. 그림 이소은….”
 
 
한 장 한 장 읽다 보니 어느새 그는 그녀의 글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은 그의 시선을 오래도록 머물게 했다.
 
 
“이런 글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부산에서 돌아와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했다. 천천히 그녀의 글과 그림을 다시 보았다.
저자 소개에 ‘저의 긁적임의 흔적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이소은’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그 흔한 작가 사진 한 장 없이 간략하게 소개된 것도 그는 마음에 들었다.
 
 
‘어느 하루’ 이 책에는 그녀가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동화처럼 쓰여 있다.
그녀를 알고 싶어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깊은 아픔과 눈물을 담아놓았다.
아프고 눈물 나지만 그녀의 따뜻한 그림과 문장은 그의 마음에 힘을 주었다.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연락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에필로그에 작가의 짤막한 인사말 끝에 적혀 있는 단 한 줄의 이메일.
 
 
그는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았다는 아주 간략한 글을 보냈다.
답장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메일을 읽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메일을 보냈다.
이번에도 그녀는 메일을 읽지 않았다.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는 더 이상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메일을 확인하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에게서 온 메일을 떨리는 마음으로 열었다.
부족한 것 투성이인 자신의 책을 좋게 봐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다시 메일을 보냈다.
이번에는 하루 만에 그녀의 조금 긴 답장이 왔다.
그들은 그렇게 메일을 주고받으며 3개월을 보냈다.
그는 그녀에게 카톡 친구가 되자고 제안했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하며, 자신이 몸담은 직장의 홈페이지 주소를 보내주며 그곳에 들어가면 그가 소속된 부서, 직책, 이름이 다 나온다며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렇게 친구가 된 그들은 그가 출근하는 아침부터 잠드는 시간까지 매시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서로를 향해 달음질하던 그들은 그게 사랑의 시작인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서로를 향한 마음이 깊어지고 있었다.
 
 
소은의 마음에 재원의 존재가 점점 커지게 되자 “우리 좋은 친구가 되어요”라는 말로 그녀는 스스로 선을 그었다.
 
 
“친군데 자꾸 친구 하자고 하네~ 그럼, 말 편하게 할까요? 소은 씨, 나보다 다섯 살이나 적으니까. 하하.”
“그래요…. 우린 친구니까.”
“계속 친구만 해야 하나?”
“네. 계속 친구만….”
“친구를 계속하든 다른 걸 하든 우리 이제 만나야죠.”
 
 
만나자는 그의 말에 그녀는 친구로 아름답게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릴 때 사고로 다리를 다쳐 장애인이 된 그녀는 2년 전 남자친구 준혁이 있었지만, 그의 부모님이 그녀를 만나고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져달라는 말을 듣고 그와 헤어졌다.
그 사랑이 깊지는 않았지만, 장애 때문에 거절당하고 사랑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다시는 그런 상황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재원을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아름답게 기억되고 싶다는 마음도 커졌다. 장애가 있어서 부끄럽거나 당당하지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또 아프게 될까 봐 두려웠다.
친구 하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제 그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우린 여기까지예요. 이제 연락하지 마세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재원은 이유를 묻고 또 물었다.
 
 
어느 하루에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행복을 주고 그 행복이 때론 눈물이 되기도 하지만 아프게 기억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지난 이야기를 했다.
재원은 소은에게 얼어붙은 마음의 문을 열어 준 것은 바로 소은의 글과 그림이었다는 말을 하며 장애가 있고 아픈 기억이 있어서 오히려 더 좋다고 했다.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냐며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가난 때문에 비겁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8년을 후회하며 살았어요. 이제 우리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말아요. 늘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다 어느 하루, 당신을 만나고 통증이 없어진 거예요. 또 아프게 하지 마요…. 제발.”
 
 
재원의 진심에 소은도 마음을 열었다. 이미 그로 가득 찬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들은 햇살 가득한 어느 하루에 모든 날을 함께 하는 시작을 했다.
 
 
우리들의 어느 하루는 이별도 있었고 눈물도 있지만 우리들의 또 다른 어느 하루에는 행복도 있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 우리가 만나게 될 또 다른 날에, 오늘 이 하루의 기억이 빛날 수 있도록 조금 더 당당하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보아요^^ 
 
작성자글과 그림. 최선영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과월호 모아보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