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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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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그 곳에 살고 있었다.
그 곳은 인적 드문 산골짜기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허허벌판도 아니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마을 한 가운데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 바깥으로 마루가 나와 있고, 손바닥만한 작은 마당도 있는 집에 남자가 혼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그 집에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냉랭한 바람만 찾아와 문고리를 흔들고 지나갈 뿐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그가 외출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가 집 밖을 벗어나는 경우는 이삼일에 단 한 번, 담배를 사러 마을 초입에 있는 가게에 갈 때뿐이었다.

그는 지팡이에 의지해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 놓았는데, 그 모습을 목격한 마을 노인네의 증언에 따르면, “다리를 질질 끌며 걷는데 한 걸음 떼놓고 서고, 또 한 걸음 떼놓고 서고, 남들은 한 걸음에 다녀올 거리를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것 같더라고, 어찌나 힘들게 걷는지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그에 대한 증언은 또 있다. 그와 이웃해 사는 집의 노파는 “갸가 말을 안 합니다. 누워있으면 죽은 거나 매한가지입니다. 어쩌다 한 번 문을 열고 들여다보면 송장처럼 누워만 있고, 내가 고함지르면서 이름을 부르면 그제야 희미하게 눈 한 번 뜨고 바로 도로 감아버리고 그럽니다. 겨우 숨을 쉬고 있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인적이 전혀 없는 그 집에 드문 일이지만 휴일, 잠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었다. 대처에 나가 사는 그의 형이 식솔들을 이끌고 찾아오는 경우였다. 그때 빈집은 잠깐 활기를 띠었다. 그의 형은 이십킬로짜리 쌀 한 포대와 빵 몇 개, 그리고 우유와 통조림 깡통 몇 개를 방바닥에 풀어 놓으며 어색한 표정으로 “잘 지내나?” 라고 물었고, 그는 고개를 주억거려 대답을 대신했다.

조카들이 겁먹은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삼촌 아픈 데는 없죠?”라고 작은 목소리로 물으면 그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 뿐, 잠깐의 부산스러움은 늘 형이 주머니에서 몇 장의 지폐를 꺼내놓는 것으로 끝이 났다. “또 올게, 담배 사 피워라.” 방문을 열고나서며 형은 늘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고, 그때마다 그는 가슴을 긋는 서러움에 휩싸여서 잠시 목이 메었다.

혼자 남겨진 그가 쓰러지듯 누워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당연하지만 그의 형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십여 년을 혼자 살았다. 그 긴 시간을 혼자 살았다. 긴 세월 동안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친구는 있었다. 그의 벗은 사람이 아닌, 바로 텔레비전과 쥐와 구더기였다. 그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놓고 살았다. 그는 간신히 벽에 기대 앉아, 또는 누워서 물끄러미 텔레비전에 눈길을 맞추고 하루를 보냈는데, 바보상자에서 무슨 내용을 방송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시선을 둘 데가 있고, 사람들이 떠드는 말소리가 들린다는 것 때문에, 그는 눈만 뜨면 텔레비전 전원을 켰다.

특히 텔레비전에서 말이 나온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긴 세월 혼자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을 잊어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텔레비전은 그가 말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지치지 않고 하루 종일 말을 쏟아냈다.

쥐가 그의 벗이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장애 때문이었다. 그는 팔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다리 근육뿐만 아니라 팔의 근육도 빠져나가서 막대기를 들 수 있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쥐들이 떼를 지어 찍찍거리며 방안을 휘젓고 다녔지만 그는 쥐들을 쫓아낼 힘이 없었다.

쥐들이 방에 둥지를 틀고 그가 밥을 먹다가 흘린 밥알을 주워 먹고, 쌀 포대에 구멍을 낸 다음 쌀을 훔쳐 먹었지만 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 쥐들을 방 밖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 쥐들이 전혀 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서 수시로 그의 몸을 벽 타듯 기어오르며 발가락을 쪼아대기도 했고, 그가 잠을 자고 있는 바로 코앞에서 같이 잠을 자고 같이 눈을 떴다. 이렇게 쥐들은 어느새 그와 한식구가 되어 있었다.

구더기는 처음 방구석에 있는 쓰레기를 모아 놓은 봉지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처음에는 눈으로도 셀 수 있을 정도로 몇 마리 뿐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수십 마리로 불어나 버렸다. 그의 방에 구더기가 들 끓은 데에는 상한 음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밥을 먹으면서 너무 많이 반찬과 밥알을 방바닥에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팔에 힘이 없어서, 장애 때문에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제대로 입에 넣는 게 불가능했다. 반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가 숟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집어 들면 태반이 입에 닿기도 전에 방바닥에 떨어졌다. 역시 장애 때문에 걸레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방바닥에는 늘 밥알과 반찬이 널려 있었고, 거기 구더기가 기생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은 구더기가 몇 마리가 보이나, 눈으로 구더기 숫자를 세는 일이 그의 중요한 하루 일과가 되었다. 이렇게 텔레비전과 쥐와 구더기와 벗하며 한 세상을 살던 그가 어느 날 죽었다. 때는 찬바람이 쌩쌩 불며 이번에야 말로 나뭇가지를 꺾겠다고 덤벼들고, 나무는 바람에 저항해서 온몸을 떨어대며 구슬피 울어대던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는 거리가 아닌, 그렇다고 담배 사러가다 넘어져서 땅에 코 박고 죽어 있는 모습도 아닌, 방 안에서 싸늘하게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그렇지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이 살고 있던 방에서 얼어 죽는 다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거짓말 하는 거 아니냐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가 얼어 죽은 상황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나름대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과 집을 버리고 대처로 나간 형이 그에게 해준 유일한 배려는 방안에 수도관을 설치해 준 것이었다. 장애 때문에 마당에 있는 수도를 사용할 수 없는 그의 사정을 고려해서 방에서 밥도 해먹고 설거지도 하라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수도를 설치해 주고 그의 형은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고향을 떠났는데, 이런 눈물겨운 배려가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 날 밤, 바깥 추운 날씨에 영향을 받아 그가 살고 있는 방도 시베리아 냉방이었다. 그는 연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잠 못 들고 있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누운 그는 어떻게든 눈을 감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펑 하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그가 이불을 내려 보니 머리맡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하얀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수도관이 추운 날씨에 얼어 터진 것이다. 그는 느릿느릿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처음 한 상황 대처는 덮고 있던 이불을 수도관에 씌우는 일 이었는데, 그러자 물은 사정없이 방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깔아놓은 이불이 젖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젖고 그의 몸도 젖어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물이 방문턱까지 차오르자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달빛이 훤히 비추는 바깥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그는 추운 날씨에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마루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애로 인해 뼈밖에 남지 않게 된 그의 다리가 얼기 시작했다.

그는 그 상태로 정물화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루에 나온 흔적이 발견된 그가 마루가 아닌, 마당도 아닌, 방에서 이불을 덮은 채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된 건 의외였다. 이런 경우 추측이 가능한데,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죽음을 예감한 그가 한데서 얼어 죽으나, 젖은 이불을 덮고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판단하고, 사후에 사람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마지막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방으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고 예상할 수 있다.

생전의 그는 소원이 단 한가지였다. 살아있는 동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내다 죽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그는 이 소원을 절대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한밤중에 달을 쳐다보면서 작은 소원을 빌었다. 달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그의 죽음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그가 죽고 난 후 인권위원회 주도로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는 농촌에 살고 있는 한 장애인이 얼어 죽은 이유를 철저히 따진 다음 다시는 얼어 죽는 장애인이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서 복지부에 건의하겠다는 취지로 열렸는데, 청문회에 불려 나온 사람은 그의 먼 친척뻘 되는 한 여성, 그의 주소지가 있는 면의 사회복지사 남성, 그리고 그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형, 이렇게 세 사람 이었다.

먼저 그의 외사촌 형수인 여성이 입을 열었다.
“추석 지나고 장에 갔는데 우연히 도련님 이웃에 사는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래서 우리 도련님 잘 있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갸가 누워서 입만 뻥긋하고 있고 산송장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기에, 그 소리 듣고 안 가볼 수 없어서 다음 날 귤 한 봉지 사들고 도련님 집에 가봤어요.

가보니까 진짜 도련님이 눈만 뻥긋거리며 시체처럼 누워 있었어요. 방안은 온통 쥐하고 구더기 그리고 파리들 천지였고, 상한 음식 때문에 악취가 진동했어요. 도련님 머리는 서캐와 부스럼 때문에 하얀 백발이었고, 손발톱을 깎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발톱이 얼추 십 센티미터 가까이 자라 있었고요, 수염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어요. 그 날 제가 가서 방을 대충 치워 드렸어요. 머리도 감겨드리고 발톱도 깎아 드렸죠.

그런 다음 집에 왔는데 도련님이 너무 비참하게 사시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려서 그 후로도 몇 번 일부러 시간을 내서 도련님 집에 갔어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방에 신김치가 있길래 내일 장에 가서 고등어 사와서 신김치랑 같이 조려드려야겠다 그러니까 도련님이 안 먹는대요. 그래서 왜 안 먹느냐고 물어봤더니 고등어를 안 먹어봐서 못 먹는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이런 식으로 도련님은 안 먹어봐서 못 먹고 안 가봐서, 안 간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하루는 내가 보기에도 도련님 장애가 무척 심했는데, 장애 등급은 5급 경증장애인으로 되어 있어서, 병원에 가서 장애 등급을 다시 받으면, 정부에서 주는 혜택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병원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안 간대요.

그러면 이렇게 혼자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장애인 수용시설에 가서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도련님 얘기가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수용시설에서 장애인을 때리고 가두고 밥도 주지 않더라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시설에는 가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도련님이 시설에 가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도련님에게는 정부에서 나오는 약간의 돈이 있었어요. 도련님도 본인이 기초생활수급자이고 매달 정부에서 이십 만원이 약간 넘는 돈을 통장으로 입금시켜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 돈 때문에 시설에 가는 것을 거부한 거죠. 그런데 돈이 나오면 뭐해요. 도련님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도련님이 죽고 난 후 사고다, 아니다 사실상 타살이다 말들이 많지만 저는 도련님 방에 전화기 한 대만 있었어도 도련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고 봐요. 전화만 있었어도 소방서에 전화해서 살 수 있었는데 도련님은 전화 한 대 놓을 돈이 없었던 거예요. 제가 도련님이 살아있을 때, 전화 설치하는데 십칠 만원이 필요한데, 내 형편이 넉넉지 못하니까 일단 도련님 돈으로 전화 놓자. 전화라도 있어야 도련님이 어디 아픈지 안 아픈지 알 거 아니냐고 얘기했어요. 그랬는데 도련님이 전화 놀 돈이 없다는 거였어요.

 제가 정부에서 돈이 나오는데 돈이 없다는 얘기가 무슨 말이냐고 하자 도련님 얘기가 통장을 형이 관리한다는 거였어요. 제가 그러면 형 한테 돈을 달라고 얘기하라고 다그쳤어요. 그랬더니 도련님 얘기가 형님도 조카 셋 데리고 어렵게 사는데 그냥 놔두라는 거였어요. 그 말 하면서 짓던 처연한 표정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제가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씀드린 수 있는 건 평소에 친척들과 형이 도련님을 잘 돌봤다는 말은 근거가 전혀 없는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다음은 그의 형이 증언대에 섰다.
그는 고향 인근 대처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동생의 죽음에 대해 형인 제게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동생을 고향집에 방치해 놓은 것에 대한 비난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이제 중학교에 들어간 딸부터 어린이 집에 다니는 딸까지 딸이 셋 있고 마누라까지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뼈빠지게 일해 봤자 한 달 수입은 백오십 만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처지에서 동생을 데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동생은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근이양증 장애를 갖고 있어서 제대로 걷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동생을 돌봤습니다.

그런데 십 년 전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이미 대처에 나와 있던 저는 고향에 농사지을 땅이 한 뼘이라도 있었으면 돌아갔겠지만 불행히도 유산으로 물려받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식구들과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대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한 달에 한 번 고향집에 들러 동생이 먹을 쌀과 반찬을 사주고 돌아오는 것으로 제 의무를 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먹고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어떤 달은 동생에게 가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럴 때면 저 대신 고향에 사는 친척들이 동생을 돌봐줄 거라고 철떡같이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고향은 우리 씨족들이 사는 집성촌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도 동생을 돌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생을 돌봐달라고 친척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제 처지에서 제가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때 저도 책임을 면하기 위해 동생에게 집에서 고생하지 말고 수용시설에 가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동사무소를 통해 동생이 갈만한 시설을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랬는데 부양가족이 있으면 시설에 가는 게 힘들고 시설에 들어갈 수 있어도 월 얼마의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동생을 시설에 보내는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가난한 제 처지에서 월 몇 십만원의 돈을 부담해야 한다는 게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제 진심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는 동생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한 동생을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찢어질듯 아팠지만 그냥 저렇게 살다가 죽어도 어쩔 수 없다. 이게 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아까 정부에서 동생에게 나오는 돈 얘기가 나왔는데, 그 얼마 되지 않는 돈, 처음부터 저는 동생에게 네 돈이니까 네가 가지고 있다가 쓰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는데 동생이 삼촌으로서 조카들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그 돈으로 조카들 과자나 사주라며 극구 통장을 제게 맡겼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제가 동생을 데려올 처지가 됐다면 동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겠지요.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제가 못 배우고 가난한 걸 원망할 수 밖에요.”

이번에는 그의 주소지가 있는 면의 사회복지사가 증언할 차례였다. 그는 면에서 4년째 사회복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생전의 그는, 근이양증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제가 보기에 몸의 장애뿐만 아니라 지능도 떨어진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화 자체가 잘 안됐습니다. 매달 가보지는 못했는데, 왜냐하면 제가 관리하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3백명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만 특별 관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래서 동네에 출장 갈 일이 있으면 한 번씩 들여다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집에 가보면 그는 항상 웃고,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잘 있는지 물어보면 고개나 끄덕거리고, 그가 살던 집에 가보면 알겠지만 비탈길에 집이 있다 보니 외출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농촌 실정에 그를 도와줄 자원봉사 인력을 구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제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매달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비를 통장에 입금시켜 주는 정도였는데, 그 돈은 본인이 돈을 찾아 쓰기 힘드니까 형이 대신 관리해 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가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아 시설 입소를 권유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시설에 안 간다고 그러고, 형도 안 보낸다고 그러니 제가 임의로 그를 시설에 입소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집에서 얼어 죽은 것에 대해 저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농촌 현실에서 장애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더 문제다 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례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제가 관리하고 있는, 면내에 사망한 그 처럼 혼자 사는 장애인 열다섯 명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조사 결과 열다섯 가구 모두 한겨울인데도 보일러를 꺼놓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일러를 왜 꺼놨느냐고 물어보니까 연료비가 없어서 꺼놓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대신 전기장판 하나로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것이 장애인들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결국 이번에 사망한 그 처럼 농촌에는 언제 동사할지 모르는 장애인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얘기죠. 물론 비약이긴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사회복지사의 증언을 끝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나 다 책임이 있는 그의 죽음에 대한 청문회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작성자글 이태곤, 일러스트 이상윤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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