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영화 말아톤, 장애코드로 읽기 > 문화


화제의 영화 말아톤, 장애코드로 읽기

본문

 
요즘 영화계에 장애우 바람이 불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말아톤’인데, 장애우가 등장하는 영화로는 역대 최고의 흥행을 보이고 있다.
자폐장애가 있는 청년 배형진(22)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깨기에 충분한 영화다.
1월 27일에 개봉된 ‘말아톤’은 현재 전국 4백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한 영화관련업체에서 5천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두 번 보고 싶은 영화 1위에 선정될 정도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청년 초원이.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초원이는 달리는 것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리고 초원이 엄마는 이러한 초원이의 재능을 감지해 그의 능력을 한껏 펼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는다.
얼핏, 자폐가 있는 장애우와 그의 부모 쉽지 않은 삶에 대한 뻔한 줄거리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말아톤’을 본 관객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동안 장애우가 등장해온 영화나 드라마에서 갖추고 있던(?)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보는 이유 없는 동정어린 시선, 비장애우의 시각에서 짜 맞춘듯한 비현실적인 캐릭터 등에서 과감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애우의 이야기=감동’을 원하고 있는 대중들의 입맛을 세련된 방식으로 펼쳤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어쨌든 앞서도 말했듯이‘말아톤’은 그간 장애우의 영화에 비해 분명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이에 함께걸음은 ‘말아톤’을 ‘장애’라는 코드로 다시 한번 독자들과 감상하고자 한다.

 

기획①
  

                   ‘말아톤’에 대해 말하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것도 개봉 당일에. 그 영화가 ‘말아톤’이었다는 것이 큰 행운이다. 평일 대낮의 객석은 비어있었고 소수의 관객은 눈물과 박수로 환호하였지만 흥행여부는 불투명했다. 그러나 지금, ‘말아톤’은 개봉 한 달만에 전국 관객 4백만을 넘어섰고 당분간 흥행기록은 계속될 것 같다. 각종 매체에서 ‘말아톤’을 재조명하는 이 때에 장애코드의 관점으로 영화 ‘말아톤’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흥행했기 때문에’,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주목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서 아무래도 크게 흥행할 것 같다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기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한국영화에 장애우가 등장했다.
감독이 온전히 창조하는 영화 속 세상에서 그들은 각자의 역할과 목적을 가지고 감독의 의도에 맞게 충실히 움직였다. 또한 그들 중 몇 명은 주인공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애우가 주인공이었던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 시각장애우가 주인공이었던 ‘미소’의 경우, 태생자체가 상업영화를 표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외한다손 치더라도 ‘안녕! 유에프오’는 화려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잎새’는 극장에도 걸리지 못한 채 어렵사리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그밖에 인권영화나 전기영화를 표방한 몇몇의 영화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그런 영화들은 애시당초 일반 관객들의 관심영역 밖에 위치해있었다. 몇 년 간 장애우 화를 살펴보면서, 특히나 지난 해에 발표된 ‘미소’, ‘안녕! 유에프오’, ‘여섯 개의 시선’의 의미와 한계를 짚어보면서 2%의 부족함, 그런데 그 2%가 무엇인지 확실히 잡히지 않는 답답함을 느꼈었다.
지금, ‘말아톤’에 주목하는 이유는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답답함을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본문에 앞서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말아톤’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장애우 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영화 ‘말아톤’의 자리 때문이다. ‘말아톤’은 단순히 영화를 넘어서서, 장애해방(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상화와 사회통합)을 꿈꾸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시급히 이 글을 쓴다.

그간의 영화와 다른 점

 
영화 속 장애우의 모습에는 세상이 장애우를 바라보는 시선, 세상이 장애우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들어가 있다. 명작이라고 일컫는 <제 8요일>, <레인맨>의 경우, 영화적 완성도는 뛰어날지 모르지만 장애우의 영화 속 위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다운증후군 조지와 천재적인 자폐 레이몬드는 각각 세상에서는 성공했지만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해리, 그리고 거친 성격에 돈만 밝히는 찰리의 파트너이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끝나고 나면 비장애우 해리와 찰리는 인간적으로 변해있다. 장애우 영화를 선택하는 비장애우들의 의도 또한 다르지 않다. 일단 그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장애우들을 본다. 장애우들은 다르기 때문에 불쌍해보이기도 하고 또 다르기 때문에 위대해보이기도 한다. 어떤 경우, “(저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와 같은 깨달음을 얻으며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장애를 극복하는 인간승리의 전 과정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지켜보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수많은 영화들이 선택하는 장애우 캐릭터는 불쌍하거나 혹은 훌륭하거나, 그 둘 중의 하나이다. 영화는 바로 그 점들을 부각시키면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말아톤’이 마음에 드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간 장애우 영화에서 보여줬던 장애우-비장애우 파트너 쉽의 관습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를 명령받은 코치는 영화 끝까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마라톤을 포기하려는 엄마에게 “대회에 참가시키자”고 조언하지만 엄마가 싫다고 하자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고 대회 당일에도 항상 그랬듯이 숙취 때문에 늦잠을 자고 있을 뿐이다. 초원은 일관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자 할 뿐이고 그 과정에서 비장애우 누구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또한 장애우 초원 또한 비장애우 누군가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처럼 장애-비장애 구분 없이 서로 부딪히고 관계 맺으며 흘러가듯 살아가는 한 순간을 포착할 뿐이다.
두 번째, ‘말아톤’은 수많은 영화들에서 유포한 자폐에 대한 환상을 비웃는다. ‘동물의 왕
 
국’을 좋아해서 해설을 줄줄 외는 초원에게 “365 곱하기 27은?” 하고 복잡한 계산을 시켜보며 눈을 반짝이는 감독의 호기심은 그간 영화가 유포한 비장애우들의 오해이다. 그동안 많은 영화들에서 발달장애우는 천재, 혹은 신비로운 존재로 그려져 왔다. 신발 또는 발의 모양으로 정확하게 사람을 기억하는 ‘미믹’의 츄이, 큐브들을 잇는 통로에 새겨진 숫자 배열이 소수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큐브’의 카잔, 국가보안암호제조기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죽음의 위험에 빠진 ‘머큐리’의 사이먼, 사람들에게 닥칠 불길한 일을 미리 알아맞추는 ‘루나 파파’의 나세르딘, 그리고 더 설명이 필요 없는 ‘레인맨’의 레이먼드는 모두 발달장애우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죽음으로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린 ‘카드로 만든 집’의 샐리는 건축가인 엄마가 놀랄 정도로 복잡한 카드 집을 짓는다. 이제까지의 영화들은 발달장애우들을 세상과는 문을 닫았지만(자폐),  비장애우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만 그려왔다. 그러나 ‘말아톤’의 초원은 열심히 달린다.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가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여 꿈을 이루는, 그래서 평범한 비장애우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노력형 인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숫자연산을 묻는 감독의 호기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초원의 하품은 그래서 통쾌하다.
셋째, 장애우 가정에 대한 전형을 무너뜨린다. KBS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의 수아는 준이만 돌보는 엄마에게 불만이 많다. “엄마는 준이밖에 모른다”며 엄마와 아빠의 이혼을 결사적으로 막는다. ‘오아시스’의 종두는 천덕꾸러기이며 ‘길버트 그레이프’의 어니는 길버트의 벗어나고 싶은 짐이다. ‘베니와 준’의 베니는 여동생 준을 돌보느라 평생 데이트 한 번 못해봤으며 ‘금쪽같은 내새끼’의 진수는 잠도 재워주고 옷도 입혀주는, 세살 아이와 같은 무능력자이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영화, 드라마, 소설에서 장애우 자녀는 두 가지 모습으로 그려져왔다. 그 중 하나는 짐이나 천덕꾸러기 신세였고 또다른 모습은 부모의 각별한 애정 때문에 비장애우 자녀를 애정결핍에 빠지게 만드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말아톤’의 초원과 주원 형제의 모습도 초반에는 그런 전형 중의 하나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주원은 엄마에게 “나는 반항이라도 하지. 초원이 쟤는 도대체 뭐야?”라고 따진다. 주원의 불만은 초원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엄마의 자기중심적인 애정에 향해있는 것이다. ‘말아톤’은 장애아-비장애아 구도를 답습하지 않는다. 그것을 살짝 뛰어 넘어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 실체에 대해 묻고 있다.
장애우 영화로서 ‘말아톤’의 가장 큰 파격은 장애극복의 신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말아톤’은 자폐아 초원의 써브쓰리 달성에 감격하지 않는다. ‘말아톤’의 클라이맥스는 달리고 싶어 하는 초원의 손을 엄마가 놓는 그 순간부터 시작하고 지쳐 앉아있던 초원이 초코파이를 내던지는 순간에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이후 빗줄기를 맞고 도로변의 사람들과 손을 맞대고 얼룩말과 함께 초원을 달리고 일상의 수많은 사람들과 손을 맞대는 판타지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는 가슴 벅차게 마무리된다. ‘말아톤’은 감동적인 영화이다.
그러나 뭉뚱그려진 감동 말고 장애코드로 읽어낼 때 영화는 세밀하게 분석될 수 있다. “달릴 때만큼은 (비장애우들과) 다르지 않다”라는 엄마의 믿음은 장애극복의 의지이다. 엄마에게 착한 아들이 되고 싶었던 초원은 엄마의 그 모든 바램을 온전히 받아 안는다. 그러나 모두가 떠나간 길에 홀로 남겨졌을 때, 누군가 주고 간 초코파이를 들고 일어서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이끌어왔던 초코파이,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엄마의 기쁨을 생각하지만, 초원은 곧 그것을 버린다. 처음엔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달렸을지 몰라도 이제 초원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초원이 초코파이를 버릴 때, 영화는 관객들의 예상, 바램 또한 사뿐히 버린다. 자신들과는 다른 자폐 초원이 장애에 굴하지 않고 써브쓰리를 달성하는 감격의 순간을 기대하는 관객들의 예상을 마다하는 것이다. 초원은 달리고 싶은 것이다. 기록을 위해서, 메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이다. 자기의 마음으로 달리고 바로 그럴 때 사람들과 손을 스치며 소통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들은 자폐아의 인간 승리가 아니라 한 영혼의 홀로서기에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초원이 단 한 번 활짝 웃는 결말 부분에서 함께 웃을 수 있다.
‘말아톤’은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로 성큼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말아톤은 자폐장애가 있는 배형진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형진 씨와 그의 어머니가 영화 속의
주인공들과 만났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나오는 츠네오의 동생은 “장애우하고 처음 얘기해봤다”면서 무척 신나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또한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필자는 웃을 수 없었다.  비장애우 중심의 세상 속에서 수많은 문화생산물들에 장애우가 등장하는 이유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장애가 특별하게 여겨진다는 건 그만큼 그 사회의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세상,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해방세상으로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말인 것이다. 그 길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최근의 문화현상들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는 장애우 쿼터제이다. ‘말아톤’ 개봉 직전에 KBS 인간극장에서는 영화배우 강민휘 씨의 이야기, ‘천사, 배우되다’가 방영되었다. 강민휘 씨는 올 9월 개봉 예정인 박흥식 감독의 ‘엄마 얼굴 예쁘네요(가제)’에 주인공 광호의 친구로 출연한다. 비중이 큰가, 배역이 사실적인가는 논외로 치자. 중요한 것은 실제 장애우가 영화 속 장애우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천사, 배우되다’에는 강민휘 씨가 배역에 몰두하여 노력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 것이다. 시작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렇게 시작되는 길 끝에는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이런 시도들이 반복되다보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우 배역을 장애우가 연기하는 것이 특별하지 않게 될 것이고 수많은 장애우 영화들의 리얼리티 부재 문제도 가볍게 해결된다.
쿼터제의 또다른 내용은 모든 영화에 장애우가 꼭 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와니와 준하’의 수화를 쓰는 애니메이터, ‘아멜리에’의 길을 묻는 시각장애우, 채소가게 정신지체 장애우, ‘더 록’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휠체어 장애우와 같은 캐릭터들은 그저 거기 있다. 지나가는 행인이 빨간 옷을 입었는지, 파란 옷을 입었는지가 중요하지 않듯이 앞에 열거한 영화들에서 등장인물들의 장애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그런 사람이 거기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비장애우들만 살아가는 것이 아닌데 영화에는 비장애우만 등장하는 현재의 모습들은 뭔가 불합리하다.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장애우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현실을 위해 이동권, 노동권, 교육권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동시에 함께 꾸는 꿈의 결정체인 영화 속에서라면 지금이라도 그런 세상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아톤’과 같은 영화를 기다린다.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미담은 필요하다. 여전히 장애로 인한 고통,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성공담은 희망을 준다.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 씨가, 또 영화배우 강민휘 씨가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듯 현실 속에서 장애극복의 신화는 꾸준히 발굴되고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라면, 영화 속에서라면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영화의 기본 속성은 판타지이다. 우리들의 판타지 속에서 장애는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장애에 대한 풍부한 시선을 담고 있으면서도 장애가 아닌 사랑, 그 인연의 유한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아톤’이 배형진 씨의 써브쓰리와 철인3종경기 완주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장애극복이 아닌 소통과 독립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는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없이 모두가 함께 꾸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말아톤’의 성공의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의 마음 속에는 장애를 극복한 자폐아 초원이 아니라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자신의 꿈을 찾아 독립한, 나와 다르지 않은 한 젊은이가 남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한국의 장애우 영화는 그렇게 진화해가며 장애해방의 그 날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많고도 많다.

글 류미례 (푸른영상, 기록영화 연출자)

 

 

기획②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엄마와 KBS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 준이 엄마와의 가상대화

 

바람난 ♥♥♥이 엄마를 꿈꾼다

 

“그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 우리 집에서 로마는 준이야.”
지난 2월 27일 KBS <부모님 전상서>에서 안성실(김희애 분)과 말다툼을 하던 박창수(허준호 분)는 성실이 말꼬리를 준이(유승호 분)에게로 돌리자 이렇게 읊조리며 하던 이야기를 접는다.
누군가의 부모가 되면서 우리는 자녀와 함께 다시 태어난다. 자신의 배에서 나온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성숙하는 게 인간이다. 그 자녀에게 장애가 있다면 그 감정은 더욱 각별해지는 법이다. 성실이네 가정의 기준이 준이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요즘 언론의 관심이 이 특별한 부모들에게로 쏠리고 있다.
KBS 일일연속극 <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정신지체장애아동이 가족의 한 구성원을 차지하더니, 주말연속극 KBS <부모님 전상서>에는 아예 자폐증 장애아를 키우는 성실의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로 등장했다. 자폐증 장애우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실화를 영화화 한 <말아톤>은 최고의 흥행성적을 올리며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모두들 이들의 가족에 마음 아파한다. 특히 <부모님 전상서>의 안성실과 <말아톤>의 경숙(김미숙 분)이 보여주는 모성애는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본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말이 성실과 경숙에게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한 여자’가 사라진 지 오래된 이 땅에서 ‘착한 엄마’노릇을 고수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라운과 스크린에 있는 두 엄마의 만남을 ‘상상’ 속에서 추진했다.


▲kbs 부모님전상서의 한장면
안성실(준이 엄마. 이하 안) : 안녕하세요. 초원이 어머니.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경숙(초원 엄마. 이하 경) : 영광이라뇨(웃음). 그래 준이는 어쩌고 이렇게 나오셨수.   
안 : 아직은 방학이라 준이 누나가 집에 있어요. 그런데 저 사실 초원이 엄마한테 은근히 불만이 많았던 거 알아요? 
경 : 뭐유? 혹시 초원이 얘기 듣고 시어머니가 전화한 거 아니예요?  
안 : (박장대소를 하며) 아시네요. 소문을 들어보니까 초원이 엄마는 애를 마라톤까지 시킬 정도로 키웠다던데. 너는 뭐하고 있냐고 온갖 잔소리를 해서 하루 종일 우울했답니다.
경 : 압니다. 그 마음. 징글징글하게 잘 압니다. 그래요. 저도 주변에서 그런 얘기 많이 들었죠. 저도 가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에서 성공한 장애우들 보면 “아,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우리 초원이가…”하고 자책을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이를 통해 엄마를 점수 매기는 듯한 시선은 견딜 수 없어요. 초원이는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고 열심히 했을 뿐인 걸요.
안 : 결국 아들 자랑이네요(웃음). 그래 초원이는 요즘 뭐하고 지냅니까?
경 : 공장에 다니고 있어요. 직업이 마라토너는 아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초원이가 마라톤을 완주했을 때만 기억해 줍니다. 그게 가슴이 아파요. 사실, 초원이가 공장 다니거나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을 더 즐거워했으면 좋겠습니다.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답게 초면임에도 초원이 엄마와 준이 엄마는 대번에 마음이 통했다. 두 사람은 시종일관 웃으며 묻고 답했지만 눈빛으로 서로의 가슴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를 훤하고 읽고 있는 듯 했다. 대화는 둘러가지 않고 지름길을 택하며 점점 깊어갔다.

안 : 에이. 괜히 마음 짠하게 왜 그러실까. 마라톤 얘기나 좀더 해주세요. 
경 : 초원이를 통해 엄마노릇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깨달았지만 그 코치선생님에게도 많이 배웠어요. 뭐냐면, 알고 보니 그 분 기러기 아빠더라구요. 엄마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아이들이 지쳐가는 걸 본 사람이죠. 저를 통해 자신의 아내를 본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억지로 마라톤을 시키는 게 싫었던 거죠. 나중에야 알았어요. 저는 그 사람을 단순하게 장애우를 이해 못하고 그런 아이를 키우는 부모 심정을 모르는 사람으로만 단순하게 취급했죠. 
경 : 그나저나 이혼 하니 어때요?   
안 : 후련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고 그래요. 기가 막혔죠. 애 때문에 힘든 건 솔직히 저 아닙니까? 바람이 나려면 내가 나야지 왜 자기가 나냐구요. 
경 : 저도 남편 때문에 고민이 많아요. 애 한테만 정신을 쏟으며 20년넘게 살아보니 어느날 우리가족은초원이랑 내가 한편, 초원이 동생이랑 남편이 한편. 이렇게 갈렸어요. 진짜 후회가 되요. 준이 엄마는 아직 젊으니까 그렇게 살지 마세요.
안 : 저는 사실 이혼하고 나서 남편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특히 준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야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툭하면 아이나 저에게 폭력을 쓰고 바람까지 핀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어요.
경 : 맞아요. 때린 놈은 또 때리고 바람 핀 놈은 또 피워요. 지금부터라도 성실씨 인생을 찾아요. 준이 더 잘 키울 수 있어서 좋고. 더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어서 좋고. 행운이네(웃음).
안 : 초원이 엄마는 뭐가 후회된다는 거예요? 초원이도 그만하면 우리 바닥(?)에서는 잘 키웠는데….     
경 : 초원이를 낳았을 때 제가 너무 어렸고, 인터넷이 없었다는 게 제일 후회됩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부모들이 경험담을 많이 나누잖아요. 그게 얼마나 큰 정보가 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저는 그냥 초원이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잘 키우는 것 인줄 알았어요. 장애는 병이 아니라는 것도 몰랐구요. 초원이의 인생을 좀더 냉정하게 보고 제 자신을 추스르며 살아야했는데…. 제가 행복한 것이 초원이도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겠수? 그리고 초원이 아빠나 초원이 동생에도 아무런 역할을 주지 않았어요. 
안 : 그래요. 요즘 엄마들은 달라요. 그리고 달라져야 해요. 옛날에는 애 때문에 죄의식 느껴서 부부생활을 못하기도 했다면서요? 세상은 저만치 앞서나가는데 이 바닥(?)의 변화는 너무 느려요. 저도 밖에 나가서는 웃지 않는 게 버릇이 됐어요. 애가 저런데 저렇게 웃음이 나오냐는 소리듣기 싫어서요.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차라리 우울해 보이면 사람들이 안 건드리니까 좋아요. 저 참 바보 같죠?
경 : 세상이 우리가 변하길 원하지 않는 거죠. 장애우 문제를 가족 안에서, 그것도 가장 손쉬운 엄마의 힘으로 해결하길 바라는 거죠.   

그렇다. 이들은 왜 세상이 착한 엄마를 원하는지 그 차가운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두 엄마는 눈물이 많은 만큼 웃음도 참 많았다. 살면서 초원이와 준이가 얼마나 자신을 기쁘게 했는지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하더니 나이가 비슷한 초원이 동생과 준이 누나로 소재가 옮겨갔다.

▲영화 말아톤의 한장면 안 : 초원이 동생도 사춘기겠군요.
경 : 네. 초원이 때문에 챙겨주지 못해서 언제나 미안하죠.
안 : 준이 누나도 그래요. 사실 그 애도 부담이 많은가 봐요. 우리 보다 초원이나 준이를 더 오래 지켜보며 살테니까. 
경 : 맞아요. 그래도 요즘 애들은 솔직하고 똑똑한 것 같아요. 초원이랑 평생같이 살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건 안하더라구요. 얼마 전에는 인터넷에서 그룹홈이나 후견인 제도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우연히 봤어요. 이제 아이들 세대는 달라져야지요.
안 : 이거. 기자가 있으니 대화가 좀 교과서적으로 나가네(웃음). 부모교육이 제대로 됐으면 좋겠어요. 비장애자녀라는 표현은 좀 우습지만 장애가 있는 형제와 함께 자라며 받는 상처들이 따로 있을 텐데 어떻게 지도해야 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요. 그런 프로그램도 좀 다양해졌으면 좋겠어요. 장애 형제가 있는 아이들이 같이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았으면 좋겠구요. 이거 어서 어서 우리 애랑 초원이 동생이랑 만나게 해야겠구만. 
경 :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마지막으로 솔직 토크나 한번 해봅시다. 다음 세상에도 준이 엄마로 태어날꺼유?
안 : 물론이죠. 100번 다시 태어나도 준이 엄마로 태어납니다. 준이가 저를 벌써 다시 태어나게 했는걸요. 준이가 아니었다면 인간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가열차게 고민하며 살수 있겠어요? 슬픔도 두 배지만 기쁨도 두 배죠. 대신 다음 세상에는 바람난 준이 엄마할랍니다. 애 남편한테 맡기고 매주 요가도 다니고 싶구요. 결혼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을겁니다. 남편이 저 때리면 바로 신고하고 다음날 이혼하고 싶고요. 준이의 장애도 빨리 인정하고 싶어요. 준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더 천천히 알아보고 싶고요. 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고…. 마지막으로 준이 마라톤 시켜서 꼭 감독이랑 바람나야지!. 

영화 <말아톤> 도입부에는 이런 나레이션이 나온다.
“초원이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어. 엄마가 아프면 초원이 기분은 어떨까? 기쁠까? 슬플까? 화가 날까? 겁이 날까?”
누가 초원이라고 할지라도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게 힘들다.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이 슬프다가도 이제 세상에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슴을 떨 것이다. 또 이제야 엄마의 마음을 알듯한데 그것을 갚을 기회를 주지 않는 하늘에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부모 속을 시커멓게 태웠던 불효자라면 이제야 자신이 그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마음에 한편으로 기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 사회는 초원이 엄마에게도 질문을 던질 때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마음에는 어떤 공식과 정답도 없다. <말아톤>에서 초원이 엄마에게  “초원이를 키우는 기분은 어떨까? 기쁠까? 슬플까? 화가 날까? 겁이 날까”라고 묻는다면? 만약 우리라면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에도 정답이 없을 것이다. 이 땅의 수많은 ‘준이’엄마와 ‘초원’이 엄마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브라운관과 스크린 속에 보여 지는 똑같은 엄마들의 모습은 아쉽기 짝이 없다. 특히 장애가 있는 특별한 자녀를 키우는 책임이 오로지 엄마에게만 쏠려있는 것을 모성애로 미화하는 것은 모든 가족에게 불행일 뿐이다.
또 우리에게는 준비가 필요하다. 모두가 장애우가 될 수 있듯 누구나 장애우의 가족이 될 수 있고 장애우의 부모, 형제가 될 수 있다.
한줄 더 보태자면 결코 장애우는 우리가 떠안아야할 부담스런 존재가 아니다. 매스컴 안의 장애우가 가족 안에서 골칫덩어리이자 갈등의 원인으로만 묘사되는 부분도 분명 짚고 넘어가야할 지점이다.     

글 황지희 객원기자

* 본 가상기사는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두 엄마들의 캐릭터를 토대로 각종 관련 기사,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작성자류미례, 황지희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