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영화를 주도하는 3인의 감독, 그들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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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계에 ‘문화’바람이 불고 있다.
2000년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문화센터를 개소하면서 문화나눔 1% 확보운동, 문화시설 편의시설 실태조사, 레저버디 활동, 방송모니터, 영상미디어 교육, 소모임 지원활동 등을 중심으로 ‘문화 향유권’을 주장했다.
삶 자체가 문화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동안 장애계는 기초생활보장과 교육권, 노동권, 이동권 등을 주장해 오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문화를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엄두도 못냈던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처럼 권리 영역에서 우선순위는 있을 수 없다. 단지 준비된 역량의 부족으로 ‘장애우 문화’라고 하는 정의조차 내리지 못했지만.
그러나 2000년도를 기점으로 장애계에 ‘장애우 문화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란 질문에 대한 구체적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는 장애우들이 거리로 나와 현장투쟁을 활발히 벌이면서 시작점을 같이 하는데, 이동권 투쟁을 기점으로 장애우들은 거점을 통한 조직화된 투쟁을 보여주었고, 잇따른 집회와 대국민 선전전에서는 시민들에게 더 친근하고 가깝게, 혹은 장애우 스스로가 자각하고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뭔가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그 중심에서 현실적 과제로 드러난 것이 바로 장애우 문화다.
‘장애해방가’, ‘이동권쟁취가’가 만들어지고, 투쟁 현장을 생생히 담아낸 영상물들을 다큐 영화로 제작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장애우들의 몸짓, 수화, 노래, 그리고 최근에는 직접 만든 영상물까지, 비장애우들 중심의 문화를 즐기기만 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와 생각을 노래, 춤, 영상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 독립영화 영역에서도 특별한 관심으로 분석과 유형을 재정리하고 있는 장애우 영화는 가장 선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일반 영화관에서 만날 수는 없다할지라도,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주최하는 인권영화제, 다산인권센터에서 주최하는 수원인권영화제, 독립영화제, 장애인권영화제, 제주 장애인권영화제, KBS의 독립영화관, KBS의 열린채널 등을 통해 장애우 영화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영상에 대한 관심와 참여는 매우 큰 폭으로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기회가 만들어졌다고 모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영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기술적인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 함께 할 이들이 필요하다.
<에바다, 그 끝없는 싸움>을 시작으로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 <노들바람> 등 장애문제에 초점을 두고 지속적인 제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박종필 감독.
<나는 행복하다>, <친구> 등 정신지체, 발달장애우들의 솔직한 일상을 다루며, 자신의 화두를 ‘장애’라고 말하는 류미례 감독.
<핑크 팰리스>란 첫 장편 다큐멘터리를 통해 장애우의 성(性) 문제를 전면에 제기한 서동일 감독.
지난 3월 26일~27일 제주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2ㅔ6회 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만난 이 세감독의 이야기를 통해 장애우 영화의 장미빛 내일을 살펴보았다.
장애우의 성을 본격적으로 다뤄 화제가 되었던 장편 다큐멘터리 <핑크 팰리스>의 서동일 감독(34세).
지난해 6월 <함께걸음> 에 실렸던 ‘장애우들이여 성적 권리를 주장하라’는 기사에서 나이 마흔이 넘도록 섹스 한번 해보지 못했다는 중증 뇌병변 장애우의 이야기를 보고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고 하여 만난 적 있는, <함께걸음>과는 인연이 있는 감독이다.
일반 회사원에서 늦깍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그의 영화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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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조연을 떠나 장애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모아 분석해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하고 있고, 또 그 글들을 모아 인터넷 뉴스에 게재하는 한편, 최근에는 ‘장애코드로 문화읽기’란 사이버 공동체 공간을 만들어, 당사자 입장에서 문화적 현상을 해석하는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통해서 보는 ‘영화’에 대한 류 감독의 시선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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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 작품들로 장애차별철폐 활동에서 가장 중심에 있기도 한 ‘핵심’으로, 또 영상은 하나의 결과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때로는‘배후’로, 어느 새 장애계에서는 함께 하는 ‘영상활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 획 3인3색, 장애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서동일 감독
“소통을 윈한다. 장애우 영화”
서동일 감독은 처음 <함께걸음>의 기사를 접하고 동질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졌고, 영화를 찍던 도중 그를 아는 사람을 만나 직접 충청도 산골마을까지 그를 찾아간다. 시골이라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심한 장애 때문에 연애는 꿈도 못꾸었다.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은 모두 출가를 하고 늙으신 노모와 살고 있다. 그나마 전동스쿠터가 생기면서 바깥 출입이 좀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외출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이 40이 넘었지만 그렇게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으니, 그는 지금 결혼도 그 무엇도 다 포기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여성과 자고 싶다”는 바람은 놓지 않고 있었다. 주변에서 홍등가를 알려주기도 했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실패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는 “비참했지, 비참했지”만 되뇌일 뿐이었다.
영화의 후반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수 아저씨 이야기. 어쩌면 서동일 감독은 드러날 수 조차 없이 가장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동수 아저씨의 처지와 일상을 통해 해결 지점을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 아니 서동일 감독은 해결 지점은 자기 몫이 아니라고 했다. 무성적 존재로 인정받는 장애우의 현실을 그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단다.
그러나 이 날 영화가 끝난 후 가졌던 감독과의 대화에서 그는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다. 반면에 억눌린 성, 하지만 끄집어내기 어려운 주제를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 영화의 미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구 DPI의 윤삼호 정책부장은 “우선 카메라의 위치가 항상 장애를 가진 사람들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며, 다큐 영화 속에는 은연중에 권력관계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세심하고 치밀한 사전 계획이 있어야 하며, 장애 특성에 따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모르고 접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을 꺼내며, 중간중간 무엇인가 의도하는 것처럼 질문하고 개입하는 방식이 불편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동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애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관계를 풀어가는 데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있었을 것”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은 후, “하지만 장애우와 비장애우를 상하의 관계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답변했다.
이 날 사람들은 “공창제를 주장하는 것이냐?”“너무 남성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등등 감독이 의도했던 바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많았다.
이에 대해 서동일 감독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동수 아저씨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옳고 그름 이외에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고 이제 남은 건 관객의 몫이죠. 그것들은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이제 이 현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며,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는 사회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과도하게 감독에게 어떤 판단을 요구하는 것 같아 불편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큐 영화의 특성은 카메라의 시선과 감독의 의도는 일치한다. 다큐가 작가주의 영화로 분류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었던 걸까.
“너무 일방적이라는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예요. 장애우들이 원하는 다른 방식과 형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작품에서 다 녹여내지 못했죠. 제작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어요. 인정합니다.” 그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영역이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속에서 성(性)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결론은 자신과 동수 아저씨의 성욕은 다르지 않다는 것. 이는 영화의 맨 마지막 자막에서도 표현된 것인데, 그는 공창제를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어쩌면 이 영화가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영화의 제목이 <핑크 팰리스-호주의 허가된 장애인 성매매업소,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장애우가 주고객이라고 한다>인 것처럼 그는 간접적으로 성매매를 인정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화의 주제를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려면 제목부터 잘 고려됐어야 했다고 충고했다.
함께 자리를 했던 류미례 감독은 “다큐 영화는 모든 시선이 감독의 시선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하며, “그런 점에서 서동일 감독의 작업은 드러내기 차원에서는 의미 있지만, 사회적으로 논쟁이 될만한 여지가 있는 주제에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살짝 비켜간 영화”라고 평했다.
새내기 감독의 첫 작품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기는 무리일 수 있다. 그 또한 “관객들의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후를 준비하겠다”고 말하며, 관객들이 솔직히 보고 느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의 영화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건강하고 밝은 장애우의 성(性) 담론이 형성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
글·사진 홍여준민 객원기자
기 획 3인3색, 장애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류미례 감독
“다큐는 끝나지 않았다”
류미례 감독은 이미 장애계에서는 친숙한 오래된 동지다. 주연, 조연을 떠나 장애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모아 분석해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하고 있고, 또 그 글들을 모아 인터넷 뉴스에 게재하는 한편, 최근에는 ‘장애코드로 문화읽기’란 사이버 공동체 공간을 만들어, 당사자 입장에서 문화적 현상을 해석하는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눔의집 장애인센터에서 일하는 정신지체, 발달 장애우의 일상을 솔직히 표현한 <나는 행복하다>와 <친구>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그 인연으로 장애인센터 운영책임을 맡고 있는 유찬호 신부와 부부의 인연을 맺어 이제 장애우들과의 삶은 그에겐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정신지체인의 성 관련 심포지엄에서 10분 짜리 짤막한 영상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류미례 감독이 ‘장애와 맺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것부터 시작하자.
류 감독은 대학 졸업 후 잠시 민예총의 월간 민족예술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영상이 글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많은 것을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영상미디어 교육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새로운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98년 푸른영상을 찾아간다. 그 전에는 노동자뉴스단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기도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단다. “저처럼 아무 경험 없는 사람이 부담스러웠겠지요.”
학생 시절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 영상과 노동운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찾은 곳이었지만, 할 일이 많았던 곳이기 때문에 경력이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빗나간 인연 때문에 류 감독이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이번 제주장애인권영화제에서 류 감독은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이의 화두라 할 수 있는‘장애코드로 문화읽기’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지, 어떤 대안이 모색되어야 하는지 등등을 이야기하는 강사로 초청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혼자서 작업해 왔지만 당사자의 입장이라는 관점에서 검증이 필요했다고 한다. 장애우가 등장하는 영화를 분석하며 일정한 패턴과 분석 틀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보다 많은 조직과 연대해 어떤 식으로 문화적 태도를 가질 것인가 고민되었고, 그래서 공동체를 만들어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장애여성문화공동체 ‘끼판’의 활동을 보며, 다양한 장애와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장애문화를 생산해 내는 진지의 역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조직적인 네트워크 체계로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감독은 방송, 영화 산업에 직접 참여 직접적인 당사자 목소리 담아내기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라는 세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최근 장애당사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드러내는 작업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 참 좋다”며 그 속에서 자신도 많은 걸 배우고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영상활동가를 키워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는데, 테크닉보다 내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풀어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그 진정성을 녹여내는 작업이 바로 영상활동이라고 정의했다.
감독이란 표현 대신 영상활동가라 칭하는 것에서 류 감독이 꿈꾸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류 감독은 박종필 감독의 <노들바람> 을 보고 “노들, 하면 박경석 교장선생님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는 분들이 계시다는 걸 알았어요.”고 말했다.
박 감독과 류 감독은 서로의 작업을 도와줄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다. 박 감독이 하라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단다. 뭔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고 싶다고.
류 감독은 지난 해 말 여의도 천막농성이 한창일 때 KBS에서 방송을 하고 나오다보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벼움 혹은 내가 혹시 사기 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되물음을 하곤 했다고 고백했다. 류 감독은 남편인 유찬호 신부가 공동체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래, 좋겠다, 싶었단다. 하지만 장애 문제를 접하면서 자꾸만 ‘다름’‘차이’이란 무엇인가가 점차 받아들이기에 만만치 않은 무엇임을 알게 되었다고. 2000년 첫째 딸 하은이가 다운증후군일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는 행복하다> 작업 이후였기 때문에,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과연 그럴 수 있는지, 자기 문제로 다가오니 긴장되고 무서웠단다. 그 순간 허탈하고 오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에게 내재된 차별의식이 존재하고 또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난 99년도 장애인센터에 들어온 한 여성장애우가 정신지체도 아닌데, 23년 간 집에만 있었다고 한다. 알콜중독 아버지로부터 폭행 당하며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그녀가 센터에 와서 일을 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지금은 자립해 전세방 하나를 마련했고, 실밥 따는 게 소원이었다가 요리사, 집 있는 남자와의 결혼 등으로 그 꿈이 점점 변해가는 걸 보며,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지금도 촬영중인데, 그녀를 추적하는 것은 나를 솔직히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주변 환경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인간다운 삶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녀의 모습을 담아내며 류 감독은 또다시 ‘자기 들여다보기’를 시도하고 있다.
“운동을 꿈꿨지만 난 자유주의자”라고 당당히 말하는 류 감독의 힘은 자기성찰과 솔직함, 그리고 약자들과의 연대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싶다.
글·사진 홍여준민 객원기자
기 획 3인3색, 장애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박종필 감독
“영상, 장애해방을 위한 또하나의 무기”
박종필 감독은 영상미디어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확산해나가는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직접 영상을 만드는 작업 외에도 장애우와 함께 하는 영상미디어 교육과 그것들을 선보이고 대중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애인권영화제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장애차별반대, 장애해방이란 구호가 나오는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면서 피 흘리고 연행되는 속에서도 카메라를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왜 화나 않고 카메라 던지고 싶은 순간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죠. 두번 정도는 싸운 것 같은데,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 그것이라 생각하죠” 류미례 감독 또한 그가 현장에서 잘 참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성격이 직설적이고 다혈질이지만, 그는 “그림 그리면서 많이 단련된 것 같다”며, 긴호흡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번 자신을 다독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라니? 그는 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작업실이나 전시실 안에서나 볼 수 있는 작품보다는 걸개그림이나 판화 등을 통해 사회에 저항하는 수단이자 무기로 미술활동을 했다. 재수 시절, 학원에서 전시회라도 할라치면 택시운전을 하시는 아버지가 시간을 내어 함께 참여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빈민, 소유, 자본, 그런 단어들이 고민의 중심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에 들어가서도 민중미술이라는 것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여하튼 그가 다큐인에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작품은 98년 < IMF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 >이다. 그는 이때부터 꽤나 주목받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급부상했는데, 이유는 그의 진정성이 카메라와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박 감독의 접근은 애초부터 달랐다고 한다.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고 이것저것 촬영한 것이 아니라 함께 걸식에 들어간 게 2월, 카메라를 댄 건 그로부터 5개월 후였기 때문이다. 노숙인들과 얼굴을 트고 스스럼이 없어지고 난 후에야 그들의 동의를 구해 영상기록을 시작한 것이다. 후문에 의하면, 이 소문을 들은 일본 NHK에서 탐날 만큼의 액수를 제시하며 구입의사를 밝혀오기도 했지만 노숙인과의 신뢰를 고려해서 이 또한 일단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더 소외된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눈길이 자꾸만 갔고, 노동의 경계에서 강제로 쫓겨난 이들의 삶을 추적하고 싶었던 것은 당연했던 것 같다. 그러다 운명의 그이를 만난다. 박 감독은 “내 인생은 그 때부터 꼬였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지만 표정에는 동지적 신뢰가 묻어나 있다. 이동권연대의 박경석 공동대표. 99년 6월쯤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박 대표는 에바다 문화제 때 사용할 수 있는 영상물을 하나 제작해 달라고 주문했고, 엉겁결에 승낙한 그는 현장에서 취재와 촬영을 하다가 에바다의 본질을 알게 된다. 그 때 나온 작품이 <끝없는 싸움-에바다>인데, 그 후 2002년 다시 < 에바다 투쟁6년 - 해 아래 모든 이의 평등을 위하여 >를 제작하게 된다. MBC PD 수첩에서 양비론의 시각으로 접근해 양측 다 문제 있고, 그래서 아이들만 죽어간다는 식의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지켜본 해 아랫집의 학생들과 재단 측에 있던 학생들 이후 삶의 모습은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아이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몇 년 간의 투쟁 속에서 서로가 상처를 받고 있었지만, 이를 어떻게 치유하는가의 모습을 해 아래집 학생들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에바다를 통해 처음으로 장애문제의 본질을 알게 되었고, 사람들이 잘못된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을 도무지 지켜볼 수 없었다고 한다.
여하튼 그는 거의 99년부터는 한 번에 몇 가지의 주제를 잡고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노들야학에서 제안한 <노들바람>과 이동권연대에서 제안한 <이동권투쟁보고서-버스를 타자> 등등 거의 동시에 2-3년의 작업 끝에 나온 값진 결과물들이었다. 그리고 값진 그 무엇을 사람들은 정확히 알아보았다. 그의 작품은 거의 모든 인권영화제, 독립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영상매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와 사실을 전달하고픈 수많은 장애우들의 관심을 끌었다. 장애계가 곳곳에서 미디어교육을 실시하고 영상관련 프로그램들을 만드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일종의 억눌린 요구를 해결하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는 움직임이라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 또한 그라는 존재가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다는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그는 앞으로 교육활동에 충실하고 싶단다. 환경이 점점 좋아지고 있고, 장애당사자들의 시선에서는 그동안 가늠하지 못했던 일상의 억압과 차별이 세심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영상이 영상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사회와 소통하는 한 방식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한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는 시설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애초 출발이 에바다이기도 했지만 장애문제를 고민하다보면 궁극적으로 시설이 가장 열악한 사각지대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는데,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작품을 끝내고 사람들에게 내보일 때, 일반 대중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듯 자각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작업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가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는 감독이라 불러도 영상활동가라 정의하는 게 더 적절할 듯 싶다.
글·사진 홍여준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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