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프로 장애우 출연, “이런 웃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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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제작단계부터 장애우 참여 필수
|KBS <폭소클럽> ‘바퀴달린 사나이’
|MBC <일요일일요일밤에> ‘신동엽의 D-Day’, ‘진호야 사랑해’
“어제는 XX, 내가 지하에 있는데 사람들이 까먹고 그냥 가버렸지 뭐야. 그래서 나 집에도 못 갈 뻔했잖아.”
필자가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애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노들장애인야간학교 박경석 교장은 교실에 둘러 앉아 수다를 떨다 이런 말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참고로 박교장은 휄체어 이용자다)
이 말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니, 소위 장애우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배려가 없을 수가 있어요?”하고 화를 냈을까? 아니면 “모든 건물마다 편의시설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입니다”라며 정색을 하고 편의시설설치 방안을 모색했을까? 아니다. 박경석 교장을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필자는 그 당시 해방감을 느꼈다. 침묵하거나 화내는 모습에 익숙했던 장애우의 이미지가 자신의 불편함을 센스 있게 호소할 줄 아는 멋진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들이 이 정도 사건에는 분노하지 말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통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뻤던 이유는, 비장애우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들을 커밍아웃(?)했을 때, 이렇게 함께 웃음이 통했던 장애우라면 용서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내심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박대운 씨
바퀴에 웃음을 싣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체장애우 박대운 씨는 5월 23일부터 KBS <폭소클럽>에서 ‘바퀴달린 사나이’를 맡아 시청자 앞에 나타났다.
이는 우리나라 코미디의 역사에서도 대단한 사건이다. ‘블랑카의 뭡니까, 이게’라는 코너가 이주노동자들의 심정을 대변하기는 했지만 코미디언 정철규 씨가 연기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바퀴달린 사나이’는 비장애우 코미디언이 휠체어에 앉는 대신, 장애우가 자신의 삶을 전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코너에 대한 우려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연기력이 부족한 장애우가 ‘바퀴달린 사나이’를 진행했을 때 자연스러운 웃음을 유도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 주 동안 코너가 진행됐지만 유행어 될만한 흥미 있는 문장이나, 기억에 남은 동작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 하나의 걱정은 이 코너의 의도가 잘 전달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다. 제작진의 의도와는 달리 ‘바퀴달린 사나이’코너는 자칫 비장애우들에게 “그래, 나는 장애가 없어서 행복하구나”라는 만족감만 주고 그친다면 이 코너의 의미는 사라진다. 아울러 장애우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고학력 남성 지체장애우’로 고착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이 코너는 일단 배치부터 적절한 편이다.
KBS의 대표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은 <개그콘서트>, <개그사냥>, <폭소클럽>이다. 이 가운데 <개그콘서트>, <개그사냥>이 10대와 20대를 겨냥하는 비교적 가벼운 스탠딩 코미디 형식이라면, <폭소클럽>은 30대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성인코미디다.
그리고 <폭소클럽>은 마른인간에 관한 끊임없는 연구를 진행하는 ‘유민상의 "X-파일’이나 ‘장웅, 윤석주의 시사대담, 진실은?’과 같은 사회성 짙은 코너들과 함께 등장하고 있기에 더 자연스럽다.
다행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박대운 씨와 시청자 모두 이 코너에 적응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첫 방송에서 그가 “길 가던 꼬마들이 저를 보면, ‘저 아저씨는 왜 다리가 없어?’하고 묻고는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아저씨는 다리가 없는 게 아니라 숏다리야’라고 말하죠.”라고 말했을 때 관객들의 난감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박씨의 굳어있는 표정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한결 재밌어졌다.
최근 방송에서는 “화장실에서 거기가 무거워 보인다고 들어주면 되겠습니까?”라는 적절한(?) 비유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일방적인 도움은 장애우들에게 오히려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신동엽의 D-Day’에서 ‘진호야 사랑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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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순 씨 |
봄 개편을 맞아 등장한 이 코너는 TV예능프로그램으로선 처음으로 장애우 이창순 씨가 개그맨 신동엽과 공동MC를 맞으며 주목받은바 있으나,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조기종영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이 코너는 장애우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일밤>의 코너들 가운데 가장 낮은 시청률을 보인바 있다.
그 이유를 따져보자. 먼저 이 코너의 줄거리는 장애우 스스로가 미션수행을 통해 또 다른 장애우들에게 장애인리프트차량을 기증한다는 내용이다. ‘러브하우스’나 ‘아시아, 아시아’, ‘눈을 떠요’ 등의 코너를 통해 사회문제가 되는 이슈를 예능프로그램에서 적절히 소화해 냈던 MBC의 저력은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이 코너는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실패했다. 먼저 이창순 씨의 역할은 매주 줄어들었다. 같은 장애우의 입장에서 매주 등장하는 미션수행자들과 적절한 대화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와 신동엽은 눈높이부터 맞지 않아 화면을 볼 때 시선이 불편했으며, 결국 신동엽의 멘트에 고개만 끄덕이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지적한대로 장애우들의 도전기는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며 한 개인의 불행이라는 장애우에 대한 잘못된 인식하에 기획·제작되었다는 점 ▲장애 문제의 책임을 당사자와 가족 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해나가도록 노력해야할 방송 본연의 공공성과 합목적성을 져버린 점, ▲여전히 장애우는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며 자신도 힘든 중증장애우임에도 불구하고 더 불쌍한 장애우를 위해 스스로 나서 그동안 받기만 했던 시혜와 동정을 베풀게 한 점 등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면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
‘러브하우스’등의 코너에서도 장애우는 수차례 등장했으나 시청자들은 많은 호응을 보였다. 그러나 ‘러브하우스’는 주인공들이 집을 바꾸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 점이 거꾸로 러브하우스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시청자입장에서 덜 부담스럽게 웃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상상원정대’에서 세계 각국의 놀이기구체험을 보며 웃던 시청자들이 힘겹게 산에 오르는 장애우를 보면서도 웃음의 요소를 찾으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제작진도 이번 코너의 실패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고 있다.
담당 임정아 PD는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고 생각한다. 처음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문 방송인이 아닌 이창순 씨가 MC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녹화당시에는 이창순 씨도 많은 대사를 하지만 결국 편집과정에서 잘려나갈 수밖에 없는 화면이 많았다. 여러 가지 애로사항들을 예상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진행한 것이 실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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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 군 |
현재 수영선수인 발달장애우인 김진호 군이 9월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수영에 서투른 비장애우 신동엽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는 모습이 기존의 장애우 프로그램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있으며, 사회적응훈련을 하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자막을 통해 ‘자폐증’에 대해 설명을 곁들이는 것도 진호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자폐증에 대한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에 감정적으로 빠지는 것을 적절히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진호 군이 발달장애우의 특성상 방송에 길들여진 뻔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프로그램의 재미를 준다. 다만, ‘천사’등의 표현으로 발달장애우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실제 연령보다 지나치게 어리게 대하는 것은 위험해 보이기는 하다.
아울러 이 코너는 영화 <말아톤>으로 발달장애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나온 코너라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특히 비장애우들에게 발달장애우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오해되거나 시설에 갇혀 있는 어두운 모습으로 각인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가장 대중적인 매체에서 발달장애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이런 노력은 늦었지만 반갑기 그지없다.
사실 이 코너가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장애우와 비장애우 뿐만 아니라, 장애우와 장애우가 서로를 이해하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장애우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다른 장애유형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일밤>게시판에는 한 지체장애우가 ‘자폐아’는 장애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글을 남겨 제작진을 당혹하게 하기도 했다.
방송은 아직 “목마르다”
이러한 코너를 통해 많은 장애우·비장애우 시청자들이 필자가 10년 전 느꼈던 해방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웃음은 이해와 공감, 동질감의 표현이다. 시사교양프로그램이 해야 할 역할이 있고, 오락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제 더 많은 웃음을 요구해야 할 때다.
‘바퀴달린 사나이’코너에 박대운 씨 뿐만 아니라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같이 나와도 좋고, 때로는 비장애우와 함께 나와 서로에게 적나라한 질문을 주고받으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기를 바란다.
또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많은 발달장애우를 방송을 통해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 만나지 않으면 오해와 편견만 쌓이고, 서로를 이해할 기회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경인방송‘사랑의 릴레이’를 진행했던 시각장애우 심준구 씨나 ‘신동엽의 D-Day’ 의 이창순 씨의 사례를 경험한바 있다.
방송이 이런 시도들이 공익적 이미지를 확보하기 위해 장애우를 이용했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기획단계에서부터 장애우들과 함께해야 한다.
글 황지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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