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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어요. 들어줄 사람이 없어도, 오래 전 할머니가 햇살이 빗겨드는 마루에 종일 걸터앉아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살아온 인생을 회상했듯이 나도 내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싶어요.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얘기를 왜 굳이 하려 하느냐고 투박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인생은 각자 사는 거니까. 각자의 인생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는 세상의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좋으니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그렇게 뜸을 들이냐고요? 아무 이야기도 아니에요. 그냥 살아온 얘기예요. 특이한 게 있다면 장애를 가진 여성이 겪어야 했던 한 시절 이야기지요.  
한 시절은 어떻게 시작되나요? 한 시절이 시작되기 전에 분명 그 전의 세월이 있었겠지요.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여자의 경우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게 틀리지 않다면 저도 그 세월을 거쳐 한 시절에 다다랐을 거예요.
내 나이 스물 일곱 살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어요. 아기를 임신하고 세상이 온통 무지개 빛으로 보였을 때 처음 불행이 찾아왔어요. 뱃속의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걸 거부한 거였어요. 아기를 유산하게 된 거죠. 설상가상으로 유산 후유증으로 자궁에 혹 까지 생겨서 자궁을 통째로 들어내야 했어요. 시어머니 말에 의하면 이제 영영 여자구실을 못하게 된 거죠. 그 지경이 되자 신파극에 나오는 장면이 곧바로 현실이 됐어요. 아이 못 낳는 죄로 시집에서 쫓겨나야 했어요. 그래도 그때 새벽 찬이슬을 맞으며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을 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그때 나는 아직 젊었으니까요. 바람대로 나이 서른 세 살에 아이 하나 딸린 남자를 만나 재혼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오 년을 그 남자와 별탈 없이 살았어요. 그랬는데 내 나이 서른 여덟에 두 번째 불행이 찾아왔어요. 뭐 흔하고 거리에 널린 이야기지요. 알고 보니 남편이 나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저는 큰 충격에 빠졌어요. 충격에 빠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쓰러졌고, 병원에 실려갔을 때 의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내가 큰 충격을 받아 뇌가 손상이 돼서 뇌졸중 장애를 갖게 됐다고 말했어요. 혹시 뇌졸중 장애가 무슨 장애인지 아시나요? 맞아요. 사람들이 흔히 풍 맞았다고 얘기하는 바로 그 장애예요. 이 장애는 편마비 장애가 특징이죠. 한쪽 손과 한쪽 발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예요. 저는 왼쪽 팔과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됐고, 그렇게 팔자에도 없는 장애우가 됐어요.

 

장애를 갖게 되면서 당연히 죽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죽는 게 어디 맘대로 되나요. 질긴 목숨 무심한 세월에 맡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지요. 재혼한 남편이 저를 거두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고, 그래서 병원 침대에 누워 살 길이 막막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을 때 같은 병실의 환자가 얘기해 줬어요. 네가 살길은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는 길뿐이다. 너는 장애가 있으니까 신청하면 바로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적에 남편이 있으면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다. 어차피 같이 못 살 거라면 빨리 남편과 이혼하고 정부에서 주는 혜택을 받아라. 대충 이런 얘기였어요. 그렇지 않아도 남편과는 같이 못 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남편에게 전화해서 이혼하자고 말했어요. 그때 남편이 전화기 저 편에서 한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데, 남편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지 않아도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돼서 이 참에 호적도 정리할 겸 이혼하려고 했다. 나 원망하지 말고 어디에 가서 살든 잘 살아라” 마치 남의 일인 듯 무심하게 말했어요.
남편과 이혼하고, 갈 곳이 없었던 저는 한동안 여동생 집에 얹혀 지내야 했어요. 여동생은 혼자 되고 장애까지 가지게 된 저를 정성껏 돌봐줬지요. 그렇지만 오래가지는 않았어요. 피를 나눈 자매도 냉정한 현실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제부가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를 역력하게 드러내자 어느 날 동생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저에게 말했어요.
“언니,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아이 아빠가 언니 때문에 집에 들어오기 싫대. 그래서 말인데 내가 여기 저기 수소문해서 알아봤거든. 옥천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에 언니 같은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있대. 식구들도 많지 않고, 또 목사님이 운영하는 시설이니까 지내기가 괜찮을 것 같아. 들어가려면 돈은 조금 들겠지만 내가 알아서 할게. 언니 당분간 거기 가있으면 안될까?”
동생이 말끝에 흐느꼈어요. 그 모습을 보는 제 심정은 찢어질 듯 아팠지요. 사실 그때 저도 더 이상 동생 집에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저 때문에 동생 가정이 깨지는 걸 두 눈뜨고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어디로든 떠나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라고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그래서 동생이 말을 꺼내자 망설이지 않고 시설에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칠 후 동생 집에 들어갔을 때 가지고 들어갔던 검은 가방을 다시 챙겨들고 저는 먼 길을 떠났지요. 그 날 버스 안에서 차창 너머 바라본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네요. 

 

그렇게 저의 한 시절이 시작됐어요. 제가 보내진 곳은 소망의 집이라는 미인가 시설이었는데, 운영자인 목사님과 사모님이 있었고, 원생은 저를 포함해 여덟 명이 있었지요. 정신지체 장애우가 다섯 명, 청각장애우가 한 명. 장애우는 아니지만 지능이 낮은 성인 남성이 한 명, 그리고 지체장애를 가진 저 이렇게 여덟 명이 원생이라고 불려졌어요. 그리고 동생 말대로 소망의 집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너무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온통 논과 밭만 널려 있을 뿐 주위에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없었지요.    
사실 전 그곳에 가기 전 이런 작은 시설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어요. 시설이라면 높은 담이 쳐져있고,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돌보는 직원들이 원생들에게 밥도 갖다주고 옷도 입혀주는 큰 시설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작은 시설이 있다니 저로서는 뜻밖이었지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작은 시설은 이 곳 말고도 전국에 걸쳐 많이 널려있다고 하더군요. 쉽게 얘기하면 작은 시설은 사회에서 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보기 싫으니까 내다버리는 쓰레기 하치장 같은 곳이죠.
작은 시설은 사람들이 흔히 미인가 시설이라고 부르는데, 미인가 시설은 대부분 종교인들이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사람들의 후원금에 기대 운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장애를 가지게 된 후 하나님을 믿게 됐지만, 사람들은 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돈을 갖다 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봐요. 그러니까 작은 시설에 후원금을 많이 갖다 주죠. 어느 날 목사님에게 전해 들었는데, 요즘 추세가 큰 수용시설은 정부가 지원을 많이 하니까 그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정부 지원이 없는 소망의 집 같은 작은 시설에 후원금을 더 많이 갖다 준대요. 그런데 작은 시설에 후원금을 갖다 주는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작은 시설도 사실상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는 거죠. 그것도 한 두 푼이 아니라 거액의 지원을 받고 있어요. 제가 자세한 내막을 얘기해 볼게요. 작은 미인가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원생은 대부분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등록이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제가 원생으로 있었던 소망의 집을 예로 들어보면 여덟 명 원생이 모두 기초생활보호대상자고 원생 한 명이 평균 월 삼십 만원의 생계비를 정부로부터 지원 받고 있는데, 삼십 명 곱하기 여덟 명이면 월 이백 사십 만원을 정부가 지원하는 거예요. 그리고 원생 대부분이 중증장애우니까 장애수당까지 합치면 삼백 만원이 넘는 돈이 꼬박꼬박 목사님 수중에 들어가는 거죠. 원생들은 정부가 생계비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요. 시설에 후원금을 갖다 주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모르죠. 왜냐하면 목사님은 밖으로 다니면서 정부 지원을 한 푼도 받지 못해 시설 운영이 어렵다고 늘 얘기하니까, 사람들은 목사님 말만 철떡 같이 믿고 천국에 가는 면죄부를 사기 위해 부지런히 후원금을 은행계좌로 송금하는 거죠.
역시 훨씬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원금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미인가 시설이다 보니 관에서 운영에 전혀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운영비 지원을 하지 않으니까 간섭할 명분도 없겠지만 그래도 원생들도 국민이니까 어떻게 사나 들여다 볼만도 한데 가끔 라면 상자 몇 개 갖다주고 생색만 낼뿐 관에서는 원생들이 어떻게 사나, 끼니는 제대로 잇나, 도대체 사는 형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하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원생들은 모두 버려진 사람들이니까 높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당연한 거겠죠. 그렇지만 그렇게 높은 사람들이 우리를 외면하면서 중요한 건 원생들이 사실상 노예 상태에 놓이게 됐다는 거예요. 누구도 시설 운영에 간섭하지 않으니까 시설에서는 운영자가 왕이었어요. 소망의 집에서도 운영자인 목사님이 죽으라면 그 자리에서 꿈뻑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했어요. 그래야 무지막지한 매를 피할 수 있었으니까. 죽는 것 보다 더 아픈 매를 피하려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실제로 죽어야 했어요.

도 마찬가지였어요. 목사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해야 했어요. 맞아서 생긴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살기 위해서는 목사님이 시키면 지옥에라도 뛰어들어야 했어요. 저는 여성이거든요. 갇힌 곳에서 여성인 저에게 남성인 목사가 뭘 원했겠어요?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거 아닌가요. 거기다 그나마 지능이 온전한 원생은 나 혼자 뿐이었는데, 목사가 저를 가만 놔둘 리 없죠. 맞아요. 짐작대로 원장인 목사의 지긋지긋한 성폭행의 마수가 저에게 뻗쳐온 거였어요.
그 일이 일어난 건 제가 소망의 집에 간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어느 날 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서 목사에게 동생 집에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목사가 선선히 내 자가용으로 다녀오자고 해서 목사 자가용을 타고 동생 집에 가게 됐어요. 차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고, 단 둘이 있는 차안의 공기가 서먹서먹해서 목사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됐지요. 어떤 말끝에 제가 “목사님 이런 얘기 들으면 웃으실 지 모르지만 제가 예전에 몸이 성했을 때는 목사님과 같이 장애우들을 위해 봉사하고 살고 싶었어요”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목사가 갑자기 표정을 바꿨어요. 목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잠시 일별하더니 “그랬니? 착한 심성을 가졌네. 그렇지만 봉사는 몸이 성하지 않아도 할 수 있어. 예를 들면 말야…”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목사가 앞을 보고 말했어요.
“사실은 내가 심한 당뇨병을 앓고 있어. 거기다 버거씨 병에 걸려서 한쪽 다리를 절단한 것은 너도 알지. 그래서 나 요즘 무척 힘들거든. 네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지만 병 때문에 마누라와 부부관계도 못해. 남자가 구실을 못하니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구, 그 고통 너는 모를 거야. 그래서 말인데…”
목사가 또 뜸을 들였어요. 나는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미를 몰라 당황해 했지요. 저절로 얼굴이 능금처럼 빨개졌어요. 목사는 그런 나를 외면한 채 말을 이어가더군요.
“너 혹시 네덜란드라는 나라 아니? 나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신문에서 보니까 그 나라에서는 나처럼 성문제로 고통받는 남성장애우를 위해 여성들이 섹스 자원봉사를 해준다고 하던데, 너 아까 장애우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지. 어려운 일인 줄은 알지만 여기가 네덜란드라고 생각하고 성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나를 위해 봉사해 줄 수 없겠니?”
저는 비로소 목사가 말하는 의미를 알 수 있었지요. 왜 그런 말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바로 신앙을 입에 올려 목사의 제안을 거부했어요.
“목사님, 그런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는 거예요. 그리고 제 몸은 하나님 거라서 나도 내 몸을 내 맘대로 못해요. 내 몸은 하나님 몸이니까 절대 목사님에게 줄 수 없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제 대답이 단호하지 못했나봐요. 아니면 목사가 작정하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일이 그렇게 된 지도 모르죠. 목사는 제 대답에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했어요.
“나도 목사니까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면 서로 양보해서 이러 방안은 어떠니? 너 몸을 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대신 입으로 해주면 어떻겠니? 그것마저 안 된다면 나 화낼 거다…”
목사가 어색했는지 말을 마치고 하하 소리내어 웃었어요. 그걸 오럴섹스라고 한다죠. 입으로 해주는 거요. 그 날 목사가 서둘러 휴게소 구석진 곳에 차를 세웠고, 저는 목사가 요구하는 대로 고개를 숙이고 그 짓을 해줬어요. 왜 그랬을까. 그 순간 눈에 뭐가 씌어 목사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걸 계기로 목사에게 은혜를 입어 시설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간사한 마음이 들어 그랬을까. 어쩌면 둘 다가 이유로 작용했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그게 한 시절 제가 겪어야 했던 지긋지긋한 성폭력의 시작이었어요.
목사는 자신의 말대로 버거씨 병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무릎 아래부터 절단한 장애우였어요. 저와 같은 장애우였지만 처지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극명하게 갈렸죠. 어쨌든 목사는 시설이라는 자신만의 왕국에서 권력을 가진 왕이었고 저는 미천한 원생 노예에 불과했으니까 노예는 왕이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해야 했지요.
목사는 절단한 다리 때문에 혈액순환이 안 된다고 자주 통증을 호소했어요. 그러면서 밤과 낮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저와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장애 여성 정희를 불러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라고 명령했어요. 그런데 목사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은 상관없었는데, 다리를 한참 주무르다보면 어느새 목사 손이 나타나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성기 쪽으로 이끄는 거였어요. 결국 다리가 아닌 목사 성기를 주물러주게 되는 꼴이었고, 저는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해야 했죠. 몇 번은 그 짓을 거부했지만 소용없었어요. 목사의 완력이 강해서 팔을 뺄 수 없었지요.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저는 거의 날마다 그 짓을 계속해야 하다보니 수치스러워서 밤에 잠도 안 왔어요. 어떻게든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그래서 하루는 목사에게 말했어요.
“저 아무래도 다른 데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염치없지만, 목사님은 아는 시설이 많으니까 저를 위해 다른 시설을 알아봐 주실 수 없나요?”
그랬더니 목사의 반응은 실망했다는 표정이었어요. 얼굴을 찡그리면서 목사가 말했어요.
“너 여기서 나가면 갈 데 없다. 기껏해야 판잣집이나 다리 밑에 가서 살 수 밖에 없을 걸, 내 말은 네가 여기서 나가면 여기보다 훨씬 더 열악한 데로 가게 된다는 거야, 그렇게 알고  그냥 참고 살아.”
“목사님, 저는 더 열악한 곳에 가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냥 여기서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제발 보내주세요.”
내 말뜻을 안 목사가 벌컥 화를 냈지요.
“얘가 좋게 봐서 그동안 잘 대해줬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하네. 너 오늘 한 번 맞아 볼래!”
그러면서 목사가 저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때렸는지 아세요? 빗자루 있죠. 빗자루 대가 있잖아요. 그 대를 휘두르며 사정없이 저를 내리치는 거였어요. 제가 아프다고 울면서 사정해도 소용없었어요. 목사는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제가 맞아서 실신할 때까지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어요.
그 다음날부터 저는 목사가 바라는 대로 순한 양이 되었어요. 맞기 싫었으니까, 나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닌 이제 죽은목숨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목사가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했어요.  
목사는 다리를 주물러 줘야만 잠을 잘 수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밤마다 다리와 성기를 주물러줬는데, 시간이 가면서 목사가 대담해져서 옆에 자기 마누라가 있는데도 자기 성기를 만져달라고 손으로 신호를 보내는 거였어요. 사모님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 해서 거부했더니, 그게 이유가 돼서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또 실신할 만큼은 아니지만 무지막지한 매를 맞아야 했어요. 별 수 없었어요. 말했잖아요. 목사는 왕이고 저는 노예니까 노예는 왕의 말을 들어야 별 탈이 없는 거죠. 저는 고분고분해졌고, 제가 고분고분해지니까 목사가 본격적으로 성추행을 시작했어요.
목사가 숙소 옆에 잇대 허름한 가건물을 짓고 다용도실이라고 이름 붙이더군요. 그리고 거기에 침대를 갖다놓고 거기서 자기 시작했어요. 사모님은 안방에서 자고, 말하자면 한 공간에서 부부가 별거를 한 거죠. 목사가 사모님과 따로 자기 시작했다는 거, 그게 뭘 의미하는 거겠어요? 맞아요. 목사가 성기 주물러주는 거에 만족하지 않고 본격적인 성추행을 하겠다는 의지 표현에 다름 아니었지요.

 

목사가 그 방에서 어떻게 성추행을 했느냐면, 먼저 저와 정희를 불러요. 그런 다음 다리를 주무르게 하다가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면 정희를 바깥 서재 쇼파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내보낸 후 저에게 침대 위로 올라오라는 소리는 못하고, 목사가 침대 밑으로 내려와요. 목사는 당뇨병 때문에 발기부전이어서 삽입은 안됐는데, 사모님이 보면 안되니까 제 아래쪽 옷만 벗기고, 자기 혼자 제 몸 위로 올라와서 성기를 문지르고 사정하고 그랬어요. 저는 목사가 애를 쓰는 동안 가만히만 있으면 별 탈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었지요.
그런데 저도 미쳤나 봐요. 제가 목사의 그 짓을 받아주면서 목사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내 딴에는 희생정신을 발휘한다고, “목사님. 하고 싶으면 저한테만 하세요. 다른 애들은 건드리지 말고요.” 이렇게 말했어요. 목사가 다른 정신지체 아이들을 건드릴까봐 애가 달아서 그런 말을 했는데, 저는 결혼 경험도 있고, 남 여 관계도 알지만 정신지체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목사가 그런 짓을 하면 당하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래서 어차피 봉사할 거면 내가 하겠다. 다른 아이들은 건드리지 마라 이렇게 얘기했던 거예요. 제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겁이 났던 건 목사가 기회 있을 때마다 성경책에 나와 있는 너는 내 것이다 라는 말씀 있잖아요. 목사가 그 구절을 입에 올리면서 여자아이들한테 “너희는 소망의 집에 왔으니까 온 날로부터 내 것 이다.”라는 말을 강조했기 때문이에요. 모르겠어요. 목사가 저 모르게 다른 아이들을 불러 그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 짓을 안 했다고 보는데, 정희가 “아빠가 내 젖꼭지를 물었어.”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아마 정희에게 더 이상의 나쁜 짓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고분고분해졌는데도 목사의 폭행이 그치지 않았다는 거예요. 목사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아내가 눈치 챌까봐 더 때리게 된다. 그러니 이해해라.” 그러면서 수시로 매를 들었어요.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고, 말을 들어도 맞고, 말을 듣지 않으면 더 맞고, 매 앞에 장사 없다고 거의 매일 맞다보니 저는 몸 이곳 저곳이 쑤시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렇게 말라 시들어 가는 꽃처럼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어요. 동생이 찾아온 거였어요. 저는 동생을 보는 순간 이젠 살았다 싶었죠. 저는 목사 눈을 피해 동생을 붙잡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어요.
“목사가 나를 밤마다 성폭행 해. 그리고 때리기도 하거든. 나는 이제 이 곳에서 단 한순간도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 다른 시설을 알아봐 줘. 제발 은순아, 너 집에는 안 갈게. 오라고 해도 가지 않을게. 이 곳에서 나를 빼내주기만 하면 너 모르는 먼 곳에 가서 살 거야. 제발 나 좀 살려줘…”
동생이 놀랬는지 토끼눈을 하고 제 얼굴을 한참 쳐다봤어요. 그러더니 “정말이야?”라고 물었어요. 제가 고개를 끄덕였죠. 동생은 목사를 만나야겠다며 사무실로 쓰는 작은 방으로 향했어요. 얼마 후 돌아온 동생은 “알았어 언니, 내가 다른 곳을 알아볼게. 몇 개월만 참고 있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말하는 표정이 하나도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어요. 나는 직감으로 동생이 목사의 “아무 문제없다. 언니가 이 곳을 나가고 싶어서 없는 일을 지어내는 거다. 데리고 갈 형편이 되면 데리고 나가면 되겠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면 그냥 놔둬라. 내가 명색이 목사인데 누구를 성폭행하고 누구를 때리겠느냐, 언니는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거다. 언니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라.”라는 거짓말에 속아넘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아니면 저를 다시 떠맡아야 되는 게 부담스러워서 목사의 말이 뻔한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별 일 없이 동생은 가고, 그 후 동생은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세상이 다 그런 거죠 뭐. 제가 인생은 어차피 각자가 사는 거라고 했잖아요. 동생은 동생대로 삶이 있으니까, 아이들과 살아야 하니까 언니인 저를 외면한 거겠죠. 저는 그래서 동생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아무튼 동생을 통해 시설을 벗어나는 게 실패하면서 절망에 빠진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원생들은 의무적으로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새벽예배를 드려야 했거든요. 예배를 드리다가 졸면, 그게 이유가 돼 밥을 굶어야 하고, 하다 못해 예배 시간에 방귀를 뀌었다고 하루 금식이라는 처벌을 받고 매를 맞기도 했어요. 예배가 끝나면 밥을 먹고 그 다음 청소를 하고, 소나 개들에게 사료 주고, 논밭에 나가 일했는데,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또 맞아야 했어요. 밤이 되면 또 목사가 부르고, 도대체 이게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인가요? 어차피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목숨, 저는 죽어서라도 시설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원생 중에 정신과에 다니며 수면제를 타다 먹는 원생이 있었어요. 저는 그 원생의 수면제를 몰래 훔치기 시작했지요. 한 알 두 알 훔친 수면제가 열 알이 넘자 저는 주저하지 않고 수면제를 삼켰어요. 그런데 질긴 목숨이어서 그런지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어요. 다시 시설에 실려왔고, 저의 자살 시도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지요.

 

제 제 얘기를 그만 할게요. 어쨌든 저는 우여곡절을 거쳐서 시설을 벗어날 수 있었어요. 지옥 같은 시설을 벗어났지만 갈 곳이 없는 제 입장에서는 세상이 다 소망의 집 같은 시설이지만 그래도 목사같이 저를 때리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디에 가서든 숨은 쉬고 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시설을 벗어났냐고요? 아 참 그 얘기를 하는 걸 깜빡 잊었네요.
사람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소망의 집에서 목사말고도 나를 좋아하는 남자가 한 명 있었어요. 왜 장애우는 아니지만 지능이 낮은 성인 남성이 한 명 원생으로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 분은 나이 오십이 넘은 남자였는데, 저 모르게 저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나 봐요. 어느 날 글쎄 갑자기 그 분이 저에게 다가오더니, 제 볼에 뽀뽀를 했어요. 그랬는데 그 모습을 사모님이 본 거예요. 사모님이 바로 목사에게 일렀고, 목사는 저를 불러 “너는 내 건데 왜  지조 없이 다른 남자를 좋아하느냐”며 실신할 정도로 두들겨 팼어요. 온 몸에 퍼렇게 멍이 들었는데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며칠이 지나도 멍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거울에 비친 멍 자국이 시퍼런 제 얼굴을 보게 되고, 그 모습을 보면서 사는 게 너무 슬프다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그대로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목사 몰래 그 남자를 불러 말했어요. “우리 이 곳에서 도망쳐서 먼 데 가서 같이 살아요. 먼저 나가는 사람이 가족에게 연락해서 이곳을 벗어나는 거예요. 내 말 알아들었죠?” 저는 저를 이 곳에서 벗어나게 해 줄 가족이 없으면서도 그 남자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 마침내 기회가 찾아 왔어요. 목사가 외출하고 사모님도 원생들 데리고 병원에 가느라고 소망의 집이 텅텅 비었어요. 저는 전화기를 들어 다급한 목소리로 택시를 불렀어요. 금방이라도 목사가 나타나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저는 두려움을 이기고 대문 앞에 나가 택시를 기다렸죠. 억겁의 시간이 흐른 후 택시가 왔고, 저는 황급히 택시 뒷좌석에 올라타면서 소리쳤죠.
“아저씨 빨리 역 파출소에 데려다 주세요!”
그렇게 저는 시설을 벗어났어요. 나중에 전해들은 얘기인데, 내가 나오던 날 저녁 다급해진 목사가 여자 원생들을 한 명씩 일일이 불러서 “누가 조사 나오면 절대 성폭행 없었다고 말하라.”고 다그쳤대요. 그리고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정희에게는 ‘정희야 내가 폭력한 거 절대로 말하면 안 돼, 너와의 섹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라는 글을 쪽지에 써서 줬다는데, 이건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판 거였죠. 나중에 경찰이 조사 나갔을 때 목사는 일관되게 성폭행 사실을 부인했는데, 이 쪽지가 휴지통에서 발견되는 바람에 결국 고개를 숙여야 했지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건 목사 부인이 한 말 이예요. 사모님은 목사의 성폭행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보는 앞에서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병신들을 건드리겠느냐.”고 당당하게 소리쳤어요.

기까지가 내가 지옥에서 보낸 한 시절 얘기예요. 주절주절 늘어놓다 보니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네요. 저는 지금 소망의 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갈 데가 없어서 저를 받아줄 다른 시설을 알아보고 있어요. 저의 소망은 작은 방 한 칸 얻어 밥 해먹고 그냥 사는 건데 그 소망도 이루기가 힘드네요. 제가 어디로 보내지게 될지 모르지만 제발 성폭행과 폭력이 없는 곳에 갔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잠도 실컷 자고 밥도 꼬빡 꼬박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제 주제를 아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뿐이에요. 그런데 어디로 가죠? 어디로 가야 하죠? 제가 갈 데가 이 세상에 과연 있기나 한 건가요?

글 이태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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