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민의 테마에세이]청바지에 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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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길게는 이십여 년만에 재회하는 옛 친구들이 나를 보자마자 처음 던지는 말은 거의 두 가지로 한정된다. 먼저 "야,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사는 거야?"라는 말이 이어진다. 하나도 안 변했다는 건 얼굴 얘기가 아니라 복장에 관한 것이고, 여전히 그렇게 산다는 건 자기 틀대로 사는 인생을 고집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내 오랜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내가 처음으로 청바지를 입었던 건 다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사업 관계로 외국 출장이 잦으셨던 아버지는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였던 어느 상표의 청바지를 사가지고 오셨다. 물론 내 것이 아니라 형한테 간 선물이었고, 형이 얼마간 입다가 바지 밑단을 안으로 접어서 박음질한 뒤 내 바지가 됐다. 그때부터 형이 먼저 입고 그 바지를 차례대로 물려받게 된 우리 남매는 지금까지도 정장을 입어야 할 특별한 날이 아니면 무조건 청바지로 통일된다.
당시 아버지의 지론은 이러했다. 값이 싼 바지 몇 벌을 사서 허술하게 입느니, 제대로 된 한 벌을 사서 오래 입는 게 훨씬 절약되는 거라 강조하셨다. 그런 말씀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일까? 살아오면서 나는 상대적으로 값이 비쌌던 어느 브랜드의 청바지만 고집했고, 그 전통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번 사면 오 년 이상 입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갈아입으며 지내다 보면 청바지 특유의 느낌이 잘 살아난다는 게 나의 고정관념이 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복장은 한 가지였다. 면 티셔츠에 청바지, 흰색 운동화 그리고 가방에 운동모자가 유니폼처럼 정해져 있었다. 교복 시절에도 하교 후에는 나의 틀로 돌아갔고, 대학 시절에도 역시 그 복장이었다. 심지어 군 복무 시절에 휴가를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청바지부터 입어 보는 일이었다. 정장만 입어야 하는 직장 생활을 접으며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캐주얼 복장으로 업무가 가능한 분야였고, 이후로 현재까지 나의 의상은 똑같은 그것이다.
너무 하나의 스타일만 정해놓은 탓인지, 나의 몸 체형은 대학 시절과 비교해서 변한 게 없다. 나이 마흔 정도가 되면 넉넉하게 늘어난 뱃살을 고민해야 할 텐데, 내 옷장을 열어 보면 대학 시절에 입던 청바지 몇 벌이 아직도 있고 대부분 외출이 가능할 만큼 잘 맞는다. 신축성이 적은 청바지의 특성 상, 내 몸에 바지가 맞는 게 아니라 바지 사이즈에 내 체형이 맞춰진 셈이다. 일부 브랜드는 내 허리에 맞는 남자 사이즈조차 없어서, 나는 오래 전부터 입었던 어느 회사 제품 하나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가족들이 면바지도 같이 입으라고 할 때마다 나는 무조건 거절했었다. 선물로 줄 테니까 한두 벌 사라고 해도, 나는 청바지 아닌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결혼을 앞두고 면바지를 살까 말까 고민했던 게 며칠이나 걸렸다고 고백한다면 믿어 주실까? 그건 솔직한 사실이다. 사서 입으면 그만일 것을, 혼자 고민하며 끙끙댔을 만큼 나의 사고방식이 한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의 회유와 적당한 협박에 넘어가서 밝은 색으로 두 벌을 구입했는데, 그 이후로 일 년에 열흘 정도 입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옷장을 열면 당연하게 손이 가는 건 청바지니까 말이다.
한 인간의 복장은 그 사람의 직업과 인생관과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는 법이다. 옷을 입는 스타일이 바로 그 사람의 성격인 것이다. 그래서 첨단의 유행만 좇는 사람들에겐 독자성과 주체성(identity)이 희박하다고 전문가들이 말하지 않는가. 자신에게 맞는 무언가를 정해놓은 것 없이, 무조건 남들이 좋다는 걸 따르는 사람의 성격은 자기의 주장보다는 남의 의견에 쉽게 휩쓸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것만 찾고 모든 관심을 그 쪽에 쏟아야 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할 대상으로 평가 내려지는 것이다.
군복이나 교복처럼 어느 집단을 하나의 복장으로 통일하는 이유는 유대감과 소속감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개개인의 개성을 하나의 잣대로 규제하려는 의도가 더욱 크다. 군대에서는 군복과 운동복뿐 아니라 속옷과 양말까지도 똑같은 걸 지급하고 구입하게 한다. 개성보다는 통제이며, 선택보다는 획일화를 강조한다. 군대의 특성이라고 해야겠지만, 무엇이든 통제가 지나치면 일탈을 낳는 법이다. 복장과 함께 사고(思考)마저 일률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늘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우리는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할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이 청바지 하나로 이어졌다고 해서, 이 자리가 그걸 예찬하는 자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내게 있어서 "청바지"라는 말은 내 삶을 여기까지 오게 한 동인(動因)이었기에, 언제나 적지 않은 생각의 여지를 던져놓곤 한다. 그냥 편하고 좋아서 입었던 옷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옷을 입어도 될 인생을 찾게 만들었고, 그 다음 결정에서도 선택의 방향을 한쪽으로 몰아가게 규정지었다. 넥타이를 맨 정장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고 했고, 출퇴근이 아닌 자율에 의한 자유가 내 삶의 법칙이라고 인도했다.
십오 년 전의 청바지가 아직도 튼튼한데, 최근에 구입한 것들은 일 년만 입어도 무릎과 엉덩이 부분이 쉽게 찢어진다. 가격은 엄청 올랐는데 품질은 훨씬 형편없는 제품이 됐다. 상품의 생명을 짧게 해서 재구입을 유도하기 위한 상술일까? 분명히 어린 시절보다는 얌전하게 입고 활동 또한 적은데도, 요즘의 옷은 내구성이 엉망이라고 나는 단정 지을 수 있다. 나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실제로 같은 제품을 입고 테스트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긴 세상이 그렇게 변한 건지도 모르겠다. 휴대전화의 경우처럼 화려한 외양의 신제품이 쏟아지면서도, 내구성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뒷전이 되는 게 요즘의 흐름이다. 더 빨리 소비해서 새로 구입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한두 번 떨어뜨리면 작동조차 되지 않는 제품들이 대부분이다. 자동차도 마찬가지 아닌가. 십 년, 이십 년을 타도 고장과 애프터서비스의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막상 구입하고 나면 곧장 신제품이 나온다. 비슷비슷한 제품인데도 새 것이 나왔으니 그 이전 것은 무조건 낡은 중고로 취급된다. 조금 오래 타면 수리비용만 늘어난다. 부속품을 찾기도 어렵다. 터놓고 얘기해서 새 것을 사라는 말과 같다. 젊음과 질김의 대명사였던 청바지마저도 쉽게 찢어져서 새 것을 사야 하는 추세에 맞춰지는 모양이니, 견고하고 튼튼한 것의 상징을 이젠 무엇이라 해야 할지 궁금해진다.
여담을 줄이고, <청바지에 관한 추억>이란 제목처럼 진짜 기록해야 할 기억을 이젠 여기에 새겨야 할 것 같다. 나는 형과 누나 그리고 여동생이 무슨 이유로 청바지를 즐기는 삶을 살게 됐는지 그 이유가 늘 궁금했었다. 삶의 방향도 다르고 취향도 제각각인데, 왜 바지에 관해서는 똑같은 고집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나왔다.
1987년 봄에 이승의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는 모 대학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에, 천안 인근 지역에서 영면의 안식을 취하셨다. 상(喪)을 당한 유가족이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그냥 울었다가 허탈하게 웃었다가 하며 정신을 놓고 있는 상태뿐이었다. 그런데 하관(下官)을 마친 뒤의 일이다. 죽은 자의 무언가를 태워야 하는 의식이 남아 있다고 했다. 죽음을 별로 접하지 못했고, 접했다 해도 세세한 절차를 모르던 나는 어머니께서 보자기에 싼 무엇을 태우겠다는 말씀에 생각 없이 소각장으로 따라갔었다.
그런데 보자기에서 나온 건 아버지가 늘 입으시던 남방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구두였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의 신발은 그 구두 한 켤레였다. 새 구두가 두어 켤레 있었지만, 아버지는 정말 고집스럽게 다 떨어진 구두 하나로 살아가셨다. 또한 아버지의 바지는 늘 청바지였다. 그런데 그 구두와 청바지를 태운다는 건 아버지의 외출복이 완전히 사라짐을 의미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실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아버지 당신의 모습이 청바지였다는 것을. 또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자란 우리 남매에게 아버지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바로 청바지였다는 것을.
나의 아내도 청바지를 즐긴다. 돌이 갓 지난 딸한테도 아기용 청바지를 입힌다. 내 딸이 성장하면서 청바지만 입는 아빠를 보고 무슨 생각을 간직하게 될까. 아버지인 내 복장을 처음부터 똑같이 보며 자랐기에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엔 깨닫게 될 것이다. 아빠의 상징은 청바지이고, 청바지가 바로 아빠를 얘기해 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옷이 그 사람의 성격과 직업을 말해 준다고 했는데, 나는 나의 욕심을 가끔 아내한테 말하곤 한다. 딸이 청바지가 어울리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억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글쎄, 아빠 엄마의 복장을 보며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현되지 않을까? 다른 욕심이 아닌 복장에 관한 소망을 품는 걸 보니, 여전히 내 눈에는 청바지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채지민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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