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가을 햇살이 엷어지는 것은 > 문화


[동화] 가을 햇살이 엷어지는 것은

본문

  여름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었단다. 무더위와 매일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에 모두들 지쳐 갔지. 매미는 노래하기에, 농부들은 농사짓기에, 초목들은 초록색에... 오로지 신이 나는 건 해 뿐이었어. 원래도 힘이 센 해가 풀들이 자라듯이 여름내 자랐으니 얼마나 굉장해졌겠어. 엄청나게 크고 뜨겁고 밝아서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는 걸. 하여튼 해를 빼고는 모두가 푸념과 불만을 쏟아 놓기 시작했지.
위에서 내려다보며 아래 세상의 계절을 주관하시는 계절관리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지. 계절관리자는 딱 때를 맞추어 소슬바람을 불렀어.
“이젠 새로운 계절로 바꿀 때가 되었어. 그러려면 세상이 깨끗해야 할 테니 네가 먼저 가서 깨끗이 청소하거라. 내가 곧 뒤따라가마.”
계절관리자는 소슬바람에게 커다란 은빛 빗자루를 건네주며 말했단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슬바람은 온몸을 풀썩이며 세상으로 달려갔지.
곧바로 계절관리자는 조수를 데리고 가서 무지개 한 자락을 베어 왔어.
“무지개는 아주 특별한 때만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 난 세상의 모든 것에다 무지개를 넣어 주거든. 그 때문에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거지. 내일 부턴 대단히 바쁠 테니 오늘은 푹 쉬어야겠군.”
계절 관리자는 베어 온 무지개를 머리맡에 놓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
조수는 계절관리자가 그걸로 무얼 하려는지 다 알았지. 하지만 계절관리자는 그 일만은 절대로 조수에게 맡기지 않았어. 그럴수록 조수는 그 일이 너무너무 해 보고 싶었던 거야.
조수는 계절관리자가 깊이 잠들자 준비해 둔 것을 가지고 살그머니 세상으로 내려왔어.
소슬바람이 벌써 세상을 투명하도록 깨끗이 청소를 하고 빗자루를 던져 놓아서 산등성이는 억새 꽃이 은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지.
“휘 - 익”
조수는 신이 날 때면 늘 그러듯이 휘파람을 불었어. 그리고는 연습 삼아 무지개의 파란색을 듬뿍 찍어 쓱- 쓱- 하늘을 색칠했지. 그러자 금방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이 쫘-악 펼쳐지는 게 아니겠어.
“뭐 별거 아니군.”
조수는 계절관리자가 하던 대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무지개를 찍어 색깔을 칠하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조심조심. 고추잠자리 꼬리에는 빨간색을 칠하고 마타리에는 노란색을, 쑥부쟁이에는 보라색을, 구절초까지 칠하고 나자 자신이 붙었어. 그래서 들판의 색깔을 바꾸고 서해의 노을을 그리고 해변의 솔밭을 초록으로 색칠했지.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신이 나고 재미나던 일이 차츰 심드렁해지지 뭐야. 더구나 물감통을 들고 돌아다니는 일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고. 조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탁 퉁기며 소리쳤어.
“그래, 맞아! 그러면 될 걸 굳이 힘들게 돌아다닐 일이 뭐 있어?”
조수는 경치가 좋은 계곡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어. 그리고는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를 곱게 색칠해서 입구에 세워 놓았지. 이렇게 해 줄 테니 모두 오라고 말이야. 그리고는 바위에 걸터앉아 톡톡 발장단을 치며 기다렸어.
하지만 한나절이 지나도록 아무도 오질 않는 거야.
‘선전이 덜 됐나 보군.’
조수는 새로운 꾀를 생각해 냈어.
바위 둥지 속에는 막 털갈이를 준비하고 있던 아기 물총새를 있었거든. 조수는 그 아기 물총새에게 무지개의 일곱 색을 모두 칠했어. 부리는 주황색으로 날개는 남빛으로 깃털은 노랑으로...
그런 다음 물총새를 날려보내며 말했단다.
“자, 가서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거라.”
물총새가 날아오르자 파란 하늘에는 그대로 일곱 빛깔 무지개가 그어졌지.
조수는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 새끼 원앙새 한 쌍을 데려다 우선 수놈부터 곱게 곱게 색깔을 칠했어.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의 색을 칠하려 할 때였어. 연어는 물길을 거슬러서 호박은 데굴데굴 굴러서 담쟁이는 힘겹게 바위너설을 기어서 가을 색을 칠하려고 골짜기로 몰려왔단다.
조수는 휘-익 휘파람을 불고는 암놈 원앙새를 내려놓으며 말했어.
“넌 나중에 해줄게.”
그리고는 신바람이 나서 연어의 등에 노란 혼인색을 칠하기 시작했지.
멀리서 그 모습을 쳐다보던 허수아비가 쭈뼛쭈뼛 다가와 물었어.
“난 누더기만 걸치고 살아서 늘 춥고 슬펐는데 나한테도 예쁜 색깔 옷으로 바꿔 줄 수 있나요.”
“그러지 뭐. 하지만 차례대로 줄을 서요.”
색깔 칠하기에 바쁜 조수는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건성 대답했어. 조수는 그렇게 정신없이 색깔을 칠하고 칠하고 또 칠했지.
“어머, 이상하네.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요?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좀 보세요.”
목화였어. 목화는 벌써 꽃도 잎도 다 져 버렸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아직 다래가 달려 있어서 혹시나 하며 눈치를 보고 있는 터였지.
“바쁜데 그럴 새가 어딨어?”
조수는 목화에게 핀잔을 했어. 그러자 다래마다 꼭 다물었던 입을 벌리고 종알대지 뭐야.
“자꾸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
조수는 버럭 짜증을 내더니 구름을 뜯어 벌어지는 목화다래를 꽉꽉 틀어막았어. 그러고 하던 일을 계속했지.
마침내 허수아비 차례가 되었단다. 허수아비는 다소곳이 몸을 맡기고는 예쁘게 바뀔 모습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어. 조수는 색깔을 푹푹 찍어서 대충 문질러 대고는 등을 밀어냈단다.
허수아비는 제 모습을 물에 비춰 보려고 서둘러 계곡으로 내려갔지.
그런데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온 골짜기를 울리는 게 아니겠어. 그제야 모두들 허수아비를 쳐다본 거야. 얼룩덜룩 지저분한 허수아비가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있었어.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모두가 허리를 잡고 웃다가 자기들도 맑은 계곡물에 비춰 본 거야. 금방 골짜기 안이 왁자하니 난리가 난 거야.
그제야 조수도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어.
“맙소사!”
한마디로 엉망이었지. 너무 바빠서 그만 붓을 깨끗이 빨지 못하고 색깔을 칠하다 보니 모든 색이 뒤섞여 버린 거였어.
떡갈나무랑 멧토끼랑 고슴도치랑...색깔을 망친 것들이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며 조수에게 달려오고 있었지.
“아이, 참.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이냐?  에라 나도 모르겠다.”
조수는 그들을 피해 산 위로 달아났어. 정상에 다다르자 아직도 쫓아오나 뒤를 돌아보다가 조수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단다. 물감통은 떨어져 산 아래로 굴러갔고. 그 통에 물감이 사방으로 튀어 온 산이 온통 울긋불긋하게 물이 들었지.
하지만 조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간신히 산을 넘었지만 조수는 쉴 수 없었단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있었거든. 세상 나들이가 처음이어서 돌아가는 길을 잘 모르는 조수는 해를 따라가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탱자나무가 가시를 뻗어 조수를 붙잡고는 놔주지 않는 거였어.
“그냥 가면 안돼!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새파랗단 말야.”
그러고 보니 거기는 가을로 바뀐 게 하나도 없었어. 그래도 조수는 얼렁뚱땅 그냥 지나칠 셈이었지.
“아, 미안 미안. 그치만 어떻게 해 줄 수가 없구나. 난 지금 굉장히 바쁘거든.”
그런데 탱자나무들은 촘촘히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조수를 몰아넣고 가시를 곤두세웠어.
“안돼! 너 땜에 이런 거니까 갈려면 제대로 해 놓고 가!”
해는 곧 서쪽 하늘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가시 울타리 안에 갇힌 조수는 발만 동동 굴렀어.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조수는 비어져 나오려는 울음을 깨물며 위를 향해 애원했지.
계절관리자는 조수가 하는 짓을 다 보고 있었어.
“이제야 네 가 한 짓을 알겠느냐? 쯧쯧쯧쯔... 모든 것에는 다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이 있거늘 그걸 네 마음대로 바꾸려 하다니 어리석기는.”
계절관리자는 아래를 쳐다보며 근엄하게 꾸짖으셨어.
“정말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벌을 내리신 대도 다 받을 테니 본래대로 되돌려 주세요.”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좀 더 혼쭐나야겠지만 잘못을 뉘우친다니 이번만은 특별히 봐 주마.”
계절관리자는 위 세상과 아래 세상을 한바퀴 둘러보고는 막 서쪽 하늘을 넘는 해를 불러 세웠어.
“잠시 멈추거라! 아무래도 네가 힘을 좀 써야겠구나. 부탁한다.”
“제가요?”
“그래. 아직 익지 못한 저들에게 가을이 되게 해 주려무나. 그러면 너한테도 상을 줄 테니...”
계절관리자는 해가 너무 크고 세어진 것도 은근히 걱겅이었거든. 그래서 좀 조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어. 해는 계절관리자가 말을 거역할 수 없었지.
해는 다닥다닥 달린 탱자뿐만 아니라 수줍게 속살거리는 아가위 열매에게도 아끼지 않고 햇살을 한줌씩 덜어 주었지. 그랬더니 파랗던 열매들이 무르익고 향기가 솔솔 흘러나올 때쯤엔 황금처럼 햇살이 아주 얇아졌단다. 햇살을 너무 많이 덜어 주어서 해의 기운이 다 빠진 거였지.
약속대로 계절관리자는 햇살이 얇아진 가을 해에게 상으로 일찍 일찍 들어가 쉴 수 있게 해 주었단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며 겨울까지 지내고 나면 봄에는 다시 힘이 날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떼를 지어서 저희들끼리 떠드느라 남의 말은 듣지 못하는 청둥오리들은 그때서야 소식을 듣고 계곡으로 왔지 뭐니.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본래대로 다시 되돌려진 뒤였는걸. 뿐만 아니라 조수가 다시는 엉뚱한 짓을 못하게 계절관리자는 그대로 세상을 고정시켜 버렸지.
때문에 원앙은 수놈만 예쁜 색깔이 된 거고, 목화다래는 구름 같은 목화솜을 입에 물고 있고, 가을산은 온갖 색깔이 다 섞여서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고...
뒤늦게 계곡에 다다른 청둥오리들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고 있지.
혹시 물총새가 날아오르며 하늘에 그리는 무지개를 보거들랑 세상 모든 것에는 다 그런 무지개가 들어 있다는 걸 생각해. 그러면 아무리 현실이 고단하고 슬퍼도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으니까.

 

글/정진숙(동화작가)

작성자정진숙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