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동화] 자운영 우표로 붙이는 편지 > 문화


[함께 읽는 동화] 자운영 우표로 붙이는 편지

본문

꼭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눈을 들면 눈길이 닿는 데마다 온통 황홀한 분홍빛 천지다. 오늘은 도란이의 마음도 분홍빛이다. 비로소 여기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마음을 누구에게든지 털어놓고 싶어진다.

도란이는 늘 가지고 다니는 공책을 펼치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편지 쓰기는 여기 와서 생긴 도란이의 버릇이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 뻐꾸기 소리가 유난히 슬프게 들리던 날도 도란이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한번도 그 편지를 부친 적이 없다.

 

보고 싶은 친구에게
잘 지내니? 난 도란이야.
갑자기 사라져 버린 나를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그때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인사도 못하고 떠나오고 말았어.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또 가슴이 꽉 메인다. 3년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눈시울이 젖어 온다.

도란이네는 도시의 평범한 중류 가정이었다 아빠는 조그만 공장을 운영했고 도란이와 동생 보람이는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이 살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많았고 떠들썩하니 집에까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호 아저씨도 자주 오던 아빠 친구인데 딴 사람들하고는 좀 다른 분이었다. 도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가 살고 있었는데 못생긴 채소나 옥수수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손수 농사지은 것이라며 자랑했다. 손톱 밑에 흙물이 배이고 검게 탄 얼굴에 촌티가 나는 아저씨를 보고 아빠는 자유인이라느니 괴짜라느니 하면서 놀려댔다. 그러면 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야, 세상에 신간 편하기는 그만이더라. 누구 눈치를 보나 안달할 일이 있나. 하늘 의지해 사는 농부만큼 사람의 본성을 유지하며 사는 직업이 없더라구. 몸이야 좀 고달프지만 그야 뭐, 마음 고달픈데 비할 바는 아니고. 하여튼 그렇게 살 수 있는 네가 부럽다."

"어려울 거 없어. 욕심만 줄이면 되는 걸.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 해. 농사지을 땅이랑 살집이랑 내가 다 마련해 줄 테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빠는 아저씨를 부러워했고 그러면 아저씨는 금방이라도 아빠를 데리고 갈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아빠가 하던 공장이 부도가 났다. 공장은 순식간에 남의 손으로 넘어 갔고 변변한 세간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살던 집을 비워야 했다. 그런 도란이네를 아무도 아는 척 하지 않았는데 영호 아저씨만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도란이네는 그렇게 아저씨에게 이끌려 아저씨 고향으로 왔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도란이네를 살붙이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모두들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인데도 한사코 트럭에서 이삿짐 내리는 걸 거들었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 푸근한 인심에 아빠 엄마의 응어리졌던 마음도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도란이는 아연실색하여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까 싶을 만큼 외진 두메 산골에 그만 기가 질려 버린 것이었다. 영호 아저씨네를 빼면 마을 사람들이라곤 모두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는 노인들이었다. 귀신이 살 것 같은 빈집이며 죄다 낡고 늙어 세월에 밀려나 쓸모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림 속처럼 조용하기만 해서 이따금씩 마을까지 내려와 우짖는 산새 소리조차 적막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된 슈퍼마켓은커녕 학교도 교육청에서 운행하는 노란 색 통학 버스를 타고 30분이나 가야 했다. 이런 시골에선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야지 이런데서 어떻게 살겠어."

 도란이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짐을 챙겨 놓고 떠나자는 말이 나오기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그건 도란이 혼자 생각일 뿐이었다. 엄마 아빠는 살아 갈 궁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보람이는 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영호 아저씨네 아들인 민규, 승규랑 짝짜꿍이돼서 들로 산으로 싸돌아다니는 재미에 빠져서 그런지 군소리 없이 지냈다. 도란이의 희망은 이 귀양지 같은 산골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란이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아빠가 농사를 짓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건 배신이야, 이럴 수가 없어."

도란이는 혼자서라도 떠나겠다고 작정하고 짐을 챙겨 들고 나왔다. 그러나 버스도 고작 하루에 두 번밖에 들어오지 않는 산골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막막했다. 진종일 마을 어귀를 돌다가 느티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펑펑 울음을 쏟아 놓았다.

도란이의 편지 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외로움과 슬픔과 절망을 편지에 쏟아 놓았지만 그것을 부치지 못했다.

마을 어른들은 농사를 짓겠다는 아빠보고는 "짓던 농사도 팽개치고 떠나는 판에 참, 별일도 다 있네." "괜히 세상 물정 모르고 덤벼드는 거지 얼마나 갈라구."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아빠는 영호 아저씨를 따라 다니며 열심히 농사일을 배웠다. 얼굴이 오이 장아찌처럼 검게 변하고 밤이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아빠는 독하게 버텼다. 그러던 아빠가 쓰러졌다. 영호 아저씨랑 하루 종일 동네 박 영감님네 논에 농약을 해 주고 난 뒤였다. 농약 중독이라고 했다. 다행이 아빠는 큰 탈없이 일어났고 도란이는 만세를 부르고 싶을 만큼 기뻤다. 이제는 아빠가 여길 떠날 거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농약이 독하기는 참 독한 모양이야. 아주 혼났어."

 아빠는 몸서리를 치면서도 떠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약 한번하고 나면 벌레는 물론이고 메뚜기 잠자리도 눈에 띄지 않는 데 그 독한 걸 꼭 해야 하는 건지."

 영호 아저씨와 아빠는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더니 무공해 유기농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평생 농사를 지어 온 마을 노인은 고개를 저었지만 아저씨와 아빠의 결심은 굳었다. 교육을 받으러 다닌다, 퇴비를 만든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채소는 온통 벌레 구멍 투성이였고 수확은 형편이 없었다.

그렇게 해가 바뀌었다. 봄이 오기도 전에 논바닥에는 새싹이 새파랗게 돋더니 얼마 안가 분홍 물감을 쏟아 부은 듯 온 천지를 분홍 꽃으로 물들였다. 가을에 씨를 뿌렸던 자운영이었다.

그런데 영호 아저씨는 그 꽃을 경운기로 갈아엎었다.

 

"어머, 아저씨! 뭐 하시는 거예요!"

놀라는 도란이에게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자운영은 이렇게 거름을 하려고 키운 거야."

"그래도 이건 너무 해요. 자운영이 얼마나 슬프겠어요."

"맞아요. 이렇게 한창일 때 쟁깃밥에 떠 넘겨져 흙 속에 묻히는 꽃을 보니 나도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사람이 필요에 의해 가꾼 것이지만 너무 잔인한 짓이야."

엄마가 도란이 편을 들자 아빠도 거들고 나섰다.

"이건 정당하지 못한 일이지. 세상을 힘의 논리나 경제력으로만 따진다면 작고 힘없는 것들은 이 세상에 살아남기 어려워."

아빠는 공장을 남에게 넘기던 일을 생각하는지 얼굴이 어두웠다.

"이거야, 원. 그러고 보니 나만 된통 나쁜 사람 같군. 나도 좀 못할 짓이다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농사 포기할 수는 없잖아."

아저씨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다음해에 농사를 짓지 않고 놔두어도 되는 빈땅에도 자운영을 심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한 해 농사를 끝내고 영호 아저씨랑 도란이네 식구들은 구석구석 씨앗을 뿌렸다. 그 꽃씨들이 자라나 지금 이렇게 온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도란이는 쓰던 편지를 이어서 썼다.

 

지금 여기는 온통 꽃으로 가득한 꽃 세상이야.

하지만 이 꽃이 저 혼자서 핀 건 아니란다.

사람들이 씨를 뿌리고 가꿨기 때문이야.

이렇듯 아름답고 좋은 세상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었어.

서로 배려하고 도우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지.

그 일은 지금 어른들의 몫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우리들이 세대까지 숙제로 남겨질 거야,

도시에 사는 너희도 그것을 알았으면 해서

자운영 마을로 초대하는 거야. 한번 와서 보지 않을래?

-자운영 마을에서 도란이가


도란이는 이제 편지를 마쳤다. 편지를 접어 넣고 봉투에 주소도 적었다.

자운영 분홍 꽃 더미 속에서 보람이랑 민규랑 승규가 뒹굴며 도란이를 부른다. 아이들이 쏟아 내는 웃음소리가 무수한 나비 떼와 함께 날아오른다. 잠시 생각에 젖어 있던 도란이는 편지 봉투 위에 자운영 꽃 하나를 붙였다. 그리고 우체통으로 향한다. 자운영 우표를 따라 나비가 난다
 

 

 

 

글 정진숙(동화작가)

작성자정진숙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