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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동화] 산그늘 속의 푸른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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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산은 고즈넉합니다. 늘 왁자하던 약수터도 이때쯤엔 사람의 발길이 뜨악해 지고 산에는 이제 새 할머니 혼자뿐입니다. 오래 전부터 산에 살면서 새와 친한 할머니는 휘파람으로 새들을 부르고 새들의 말로 대화도 합니다. 그래서 다들 새 할머니라고 부르지요.

사람들이 어지럽힌 약수터를 치우다가 할머니는 물끄러미 물 속을 들여다봅니다. 소나무가 다른 꽃들처럼 드러내 놓고 흐드러지지 않는 송화를 살짝 피운 모양이에요. 바람결에 묻어 온 송홧가루가 고인 약수에 노란 색으로 떠돕니다.

그래, 세상에 비밀은 없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이렇게 표가 나는 걸. 할머니는 눈길을 들어 숲을 바라봅니다. 호위병처럼 늘어 서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는 쉴새없이 황금 햇살이 넘나들며 초록을 수놓아 갑니다.

 

뻐꾹! 뻐꾹! 뻐꾸욱!

 짙어 가는 초록빛 그리매 뒤에선 뻐꾸기가 목청을 빼고 참나무에선 지빠귀가 쉴새없이 둥지 속으로 먹이를 물어 나르며 재재거립니다. 할머니는 다른 산새들과는 다 친구가 되었지만 아직도 뻐꾸기하고는 친하지 못했습니다. 뻐꾸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로만 존재를 알리기 때문에 좀체 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움처럼 멀게 들리던 뻐꾸기 소리가 점점 가슴속으로 스며듭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뻐꾸기 소리를 듣던 할머니 눈가가 촉촉이 젖어 왔어요. 할머니는 뻐꾸기가 꼭 자기 자신만 같습니다.

저리 우는 것도 다 제 업보인 것을....... 그 아이는 잘 살고 있을까? 아마 지금쯤은 중년이 되었겠지. 그리워하는 것도 죄스러워 가슴 깊이 꼭꼭 묻어 두었던 생각이 불쑥 떠오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때 약수터 오르는 길로 인기척이 나더니 등에 가방을 멘 소녀가 나타났어요. 산 아래에 사는 단비입니다. 휴일이면 가족이 함께 올라오곤 해서 할머니하고는 벌써 아는 사이지만 단비는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반가움에 튀어나오려는 말을 어물어물 삼키며 할머니는 곁눈질로 단비를 살폈어요. 얼굴이 잔뜩 부어 있는 게 단단히 심통이 난 모양입니다.

 

뻐꾹! 뻐꾹! 뻐꾹!

인기척에 잠시 그쳤던 뻐꾸기 소리가 아주 가까이 에서 들립니다.

시끄러워! 이 못된 새야! 썩 꺼지란 말얏! 단비는 뻐꾸기 소리를 향해 발을 구르며 악을 쓰다가 성에 차지 않는 듯 돌팔매질까지 합니다.

쯧쯧쯧...... 말 못하는 짐승에게 그러면 쓰나. 할머니가 나무라자 단비는 볼멘 소리로 투덜거립니다. 쳇,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그래. 할머닌 뻐꾸기가 얼마나 얌체 짓을 하는지 아세요? 저런 못된 새는 혼내 줘야 한다구요. 이 세상에서 아주 없어져야 해요! 하지만 뻐꾸기는 산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옮겨 여전히 처량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뭣 땜에 이리 단단히 성이 났누? 학교는 벌써 끝난 게야? 아무래도 단비의 하는 양이 예사롭지 않아 할머니는 슬며시 속내를 떠볼 요량으로 말을 겁니다.

조퇴했어요. 머리 아프다고 거짓말하고서. 할머니! 내가 수수께끼 낼 게 맞춰 보세요. 물론 힌트도 있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맞추면 상도 드릴 게요.

그래, 상이라....... 그럼 한번 해 보자꾸나. 그런데 상이 뭔구?

멋진 제 춤을 보여 드리죠. 전 춤을 잘 추거든요.

단비의 엉뚱한 제안에 할머니는 맞장구를 칩니다. 속에 담아 둔 말을 하고 싶어하는 단비의 속내를 눈치 챘거든요.

 

첫 번째 힌트.

아빠, 엄마, 언니 고은이, 단비, 그리고 남동생 다한이. 단비 네는 다섯 식구입니다. 단비네 가족을 본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말을 합니다. 고은이는 아빠랑 국화빵이고 다한이는 엄마를 빼다 박았네. 근데 단비는 눈 씻고 찾아봐도 닮은 구석이 없어. 정말 단비는 다릅니다. 성격도 생김새도 하는 짓도. 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인 언니. 안방 샌님이 다한이. 하지만 단비는 공부엔 흥미가 없고 대신에 춤추고 노는 것은 아주 잘 합니다. 그래서 장래의 희망도 백댄서에요. 언니는 공부가 영 엉망인 단비를 한심하다고 하고 단비는 공부밖에 모르고 사는 언니가 불쌍하다며 늘 티격태격합니다.

두 번째 힌트.

혈액형 검사를 했는데 단비는 AB형입니다. 그 말을 들은 언니가 무시하듯 말했어요.

아무리? 또 덜렁거리다가 잘못 들었겠지.

아니야. AB형 맞다니까.

바보야, 그러니까 잘못들은 거라구. 아님 주워 왔던가. 그건 O형 아빠와 B형 엄마 사이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야! 단비는 언니가 또 잘난 척을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언니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버리려고 구조를 청했는데 아빠 엄마는 애매하게 판정을 유보했습니다.

세 번째 힌트.

언니는 중학교 1학년, 단비는 초등 학교 5학년 그리고 다한이는 4학년. 여태 까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등록 등본을 보고는 달라졌어요. 이단비, 92년 1월 4일 생. 이다한, 92년 12월 28일생. 그러니까 쌍둥이도 아니면서 단비와 다한이는 동갑인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네 번째 힌트.

지난번 단비의 생일이었습니다. 친구들을 마중 가다가 대문 밖에서 그 여자를 만났어요. 언니라고 하기도 아줌마라고 하기도 애매한 젊은 그 여자는 뚫어지게 단비네 집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누구세요?

아, 아니다. 집을 잘 못 찾았나 보다.

그 여자는 도망치듯 가 버렸지만 전 날밤 내려 두텁게 쌓여 있는 눈 위에는 그 여자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학교 앞 문방구에서 정신없이 인형 뽑기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단비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어요.

누구야? 아까부터 너만 쳐다보고 있어.

또 그 여자였습니다. 그 무렵부터 전화가 오면 엄마는 단비의 눈치를 살폈어요.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한참씩이나 아빠랑 둘이서만 소곤거렸습니다.

마지막 힌트.

드디어 엄마 아빠가 단비를 안방으로 불렀습니다.

엄마는 장롱 깊이 간직해 두었던 보퉁이를 꺼내 주었는데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옷이랑 기저귀 같은 오래되고 보잘것없는 아기 물건이었어요. 손가락 끝으로 들어올리며 의아해 하는 단비에게 엄마가 말했습니다. 단비야, 넌 하느님이 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이야. 무슨 말이냐 하면...... 망설이는 엄마 대신 아빠가 어렵게 입을 떼었습니다. 저기 말이지. 엄마 아빠가 너를 낳지는 않았지만....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널 낳아 준 분이 따로 있어. 치, 내가 뭐 맨날 어린앤 줄 알아? 아직도 놀려먹으려고 하게. 그래, 단비야! 이젠 너도 알 때가 됐어. 그래서 얘기하는 거야. 이게 네가 우리한테 올 때 입고 있던 옷인데 너와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물건이야. 그리고 이것도........

엄마는 누렇게 색이 변했지만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는 쪽지도 보여줬어요. 92년 1월 4일 생.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하고 맡깁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용서하세요. 엄마는 단비를 끌어안고 계속 뭐라고 말했지만 단비는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뻔한 답이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다시 듣는 것은 견딜 수 없어요.

 

약속대로 춤 보여드릴께요. 나 아주 잘 춰요.

할머니가 말 할 틈을 주지 않고 단비는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미친 듯이 온몸을 흔들어 대며 악을 씁니다.

아시겠죠? 난 업둥이라고요!

넌 여전히 단비다. 엄마 아빠가 널 낳지 않았다고 단비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니?

 그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문제는 그 여자예요. 나를 만나겠대요. 난 싫어요! 도저히 엄마로 인정할 수가 없다구요! 남의 집에다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뭐하러 다시 찾느냐구요!

단비의 얼굴엔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줄줄이 흘러내립니다. 친딸이 아닐 거라는 예상을 하고 부터 단비는 춤을 추지 않았어요. 언니처럼 다한이처럼 되고 싶어서 억지로 언니 흉내를 냈었습니다. 단비는 할머니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바로 어버이 날이예요.

안다. 그래서 나도 이맘때가 되면 쓸쓸하단다.

학교에서 부모님에게 드릴 꽃을 만드는데........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뻐꾹! 뻑뻐꾹! 뻐꾹!

단비에게 쫓겨갔던 뻐꾸기가 어느새 또 참나무 가까이 와서 울고 있습니다.

단비야, 뻐꾸기가 왜 저리 우는지 아니?

아직도 흐느끼는 단비의 등을 토닥이며 할머니가 말합니다.

아마 저기 지빠귀 둥지에다 알을 낳았을 게다. 그 새끼에게 제 소리를 새겨 주려고 저렇게 우는 거지. 사람들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를 비난하지만 뻐꾸기는 천성적으로 둥지를 지을 줄 모르는 걸 어쩌겠니? 어린 새끼를 비바람 모진 한데다 놔 둘 수는 없으니까. 뻐꾸기는 제 새끼를 남에게 맡긴 벌로 저렇게 숨어서 우는 것이지. 자식을 남에게 떠맡긴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만 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거란다.

단비는 할머니 말을 속속들이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뻐꾸기를 미워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종일 산그늘에 숨어서 우는 뻐꾸기의 푸른 울음은 메아리가 되어 5월 산을 채웁니다.

 글/정진숙 동화작가

작성자정진숙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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