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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만들어 갑니다

폭력의 진화에 대한 영화 ‘폭력의 역사’

본문

여러분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시는지요?
저는 여기서 성선설과 성악설 혹은 종교적 인간상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20세기 초엽에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그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인간은 누구나 본능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되며, 이 본능은 삶에 대한 것, 혹은 에로스적인 것과 죽음 혹은 타나토스적인 것으로 구분된다.’라는 명제를 남겼습니다.

이 명제는 우리 삶 속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가령, 아기의 탄생은 산모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 혹은 타나토스적인 것에서 시작되며, 인간의 자살은 또 다른 세상을 열고자 하는 삶에 대한 의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본능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오늘 소개할 영화는 그런 일상의 폭력에 대한 우리의 상반된 모순에 대한 이야기,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 2006)입니다. SF적인 영화를 통해 인간 본성의 변형을 주로 그렸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이 이제는 인간 내면의 모순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기계를 통한 성적 환타지(크래쉬)나, 파리로 변해버리는 인간(플라이)의 모습이 아닌 우리 내면의 본능사이의 충돌에 대해 현미경을 들고 촬영하듯 해부해 나갑니다.

평범한 소시민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톰 스톨(비고 모텐슨 분)은 좋은 가장이고 좋은 이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식당에 침입한 흉악한 범죄자 2명을 정당방위로 죽이게 되면서 지방의 선량한 영웅이 됩니다.

이것은 이제 벌어질 톰 스톨 개인의 삶속에 숨겨져 있는 폭력에 대한 들추기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필라델피아로부터 또 다른 갱단이 찾아와 자신이 톰 스톨이 아닌 조이 쿠샥이라는 사람으로 과거에 갱단의 일원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톰은 자신이 갱단이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지만 이들과의 싸움에서 과거 자신의 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톰 스톨은 과거 갱단의 일원이었으며 새로운 삶을 살고자 현재의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이 알아차리게 될 무렵 가족들은 톰을 두려워하고 멀리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정말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톰 스톨은 필라델피아로 향하고, 거기서 또 다른 사람을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갱단과의 싸움에서 벌어진 모든 것이 정당방위였겠지만, 폭력은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마치 인간이 악한 놈과 더 악한 놈으로 구분된다는 고통스런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집니다. 인간 내면의 이중성, 일관되지 못하는 우리의 불안한 정체감이 비고 모텐슨의 명연기에 녹아듭니다.

영화 속에서 인디애나 주에서 필라델피아로 옮기는 장면에서 비고 모텐슨은 양쪽 지방의 사투리를 각기 다르게 표현됐다고 합니다. 현대적 정체성의 혼돈과 균열현상. 그리고 폭력과 살인 등은 그 결과에 따라 수반되는 자연스런 인간 본능의 표현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늘 괴롭힘을 당하던 톰의 아들이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된 후에 가해지는 위협들에 대해 폭력으로 응징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폭력의 유전 혹은 폭력의 순환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야기 하듯이 이 영화는 캐나다 출신의 감독에 의해 보인 미국 내분의 모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미국인의 일상에 놓인 폭력에 대한 이중적 태도로 인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총기 살인이 일어나는 곳이면서도, 자신들의 집을 지키는데 총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며 여전히 총기를 버리지 못하는 모순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침공에 대한 추악한 변명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또 다른 하나의 진실을 던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말없이 식탁에 않은 톰 스톨을 대하는 가족들의 모습입니다.

과거 자신의 자리에 돌아온 톰에게 아내는 기도(미국이 청교도 국가임을 잊지 않기 위한 설정이기도 합니다)를, 아들은 빵 조각을 그리고 어린 딸은 접시와 포크를 가져다줍니다. 톰과 가족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받아들입니다. 마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세계 평화도모라는 구실로 인가하는 유엔본부의 태도와도 같습니다.

매일 일어나고 있는 우리 주변의 폭력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하고 계신지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적재적 공생관계를 시인하는 것이 되고 간접 가해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작성자이영문 (아주대학교의료원 정신건강연구소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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