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투도 나오고 매산이도 나왔네” > 문화


“감투도 나오고 매산이도 나왔네”

[오일장속으로] 강진 마량장

본문

[전라도 닷컴]

   
고금도 세동리 어부가 잡아 온 싱싱한 문어 ⓒ 김창헌
‘첫물내기’다.
고금도 가교리 정안님(65) 할머니가 올해 처음으로 뻘에서 맨 감태를 마량장에 내놓았다.
볼 것도 없다. 살까, 말까, 망설일 필요 없다. 한 재기 사 갖고 가면 더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완전 머크락(머리카락)이여. 시방 보드랍다고 해야제, 언제 하겄어.”
매생이도 나왔다. 숙마·신마마을 아주머니들이 가져온 ‘햇매생이’. “매산이(매생이) 사쇼. 손 시롱께, 얼른 폴고 갈라요.”
지나가는 고순덕(76) 할머니는 “감투(감태)도 나오고 매산이도 나오고 나올 것 다 나왔네” 한다.

    감태 한 재기에 천 원 고막 한 양푼에 오천 원 ⓒ 김창헌 “오리가 장사 다 해부네”

새벽 일찍 찾은 마량항은 분위기가 있다. 잔잔한 바다, 해변 공원에 하나 둘 셋 불을 밝힌 가로등.
짐 가득 실은 용달차들이 한 길을 택해 들어가면서 움직임이 있다. 불퉁거리는 차 불빛. 짐을 내리고 나르는 사람들. 여러 손 모인 화톳불 주위는 웅성웅성.
“짐장 끝났는가? 짐장을 해야 사람들이 나올 건디….” “여가 딴 디(데)보다 좀 늦어. 바다 보고 사는 사람들이라 (바빠서) 살짝 늦게 하던마. 오늘 새우젓장사 노나는 날이네.”
화톳불 쬐는 손이 바뀌고 바뀌며 날이 밝아온다. 좁은 길 큰길 따라, ‘종목’ 대로 줄느런한 물건들.
물건 늘어진 품새가 자연스럽다. 바다 가까이 어물전이 있고, 버스 정류장 앞으로 채소전이 선다.

   
우리를 빠져 나온 오리 한 마리가 이것저것 뒤집어 엎어 장날 분위기를 낸다. ⓒ 김창헌
‘오늘은 장날이요’ 하고 알리는 것은 한 마리의 오리. 가축전 우리에서 빠져나온 큼지막한 오리 한 마리가 할머니가 애쓰고 까온 굴 한 대접을 엎더니, 또 생선가게로 화들짝 ‘날아가’ 곱게 차려놓은 물고기와 새우젓을 뒤집어버렸다. 굴 파는 할머니도 생선장사도 멍하니 쳐다보기만. “뭔 일이여∼.”

사람들도 그 ‘가관’을 넋놓고 보다가 발쪽발쪽 웃는다. “오리가 장사 다 해부네.” 옷가게까지 진출하려는 놈을 뒤늦게 알고 달려온 오리장사가 가까스로 잡았다.

굴 까온 할머니들이 많다. 대구면 구수리 사람들이 상당수다. 한 할머니는 “내야 너믄(넣으면) 칭찬 받소” 하며 판다. 오늘 장에 굴이 많이 나온 것은 김장철이기 때문. 갯창에서 조새로 깐 구수리 굴로 김장을 해야 맛이 제대로 난다는 것.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짐치 맛나다’고 열 마디씩 해 준다는 것. “자연산인게 (초장에) 찍어 잡수믄 하릿내(하루 내내) 묵어.”

구수리는 고막도 좋다. 그러나 장에 가지고 나온 사람은 한 명. “말로 낼라고 안 갖과. 구수리는 사람들이 좋은게 더 주라고 하믄 사양을 못하고 퍼 줘 불어. 그라믄 말값(말로 받은 값)보다 못 나와 불어.” 직접 장에 가져와 팔면 업자에게 넘기는 것보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지만, 구수리 사람들은 마음 씀씀이가 커 오히려 손해본다는 것.

남호리 사람들도 자연산 굴을 많이 가져왔는데 오늘 개를 막아서다. “(마을에) 집들이가 있어. 잔치해야 한게 바다 못 가게 해. 오늘은 일 하지 말고 다 같이 놀자고. 요놈 얼른 폴고 오후에는 장구 치고 얼씨구 절씨구 해야제.” 바다에 ‘못 나가’ 시간이 났다. 어제 깐 굴을 가져왔다. 굴이 잘 나간다. 한 할머니는 가져온 굴을 통째로 넘기고 논다. “3만원에 싸게 줘 불었어. 내 굴이 질로 좋다고 한게, 굴 볼 줄을 안게”하며 웃는다. 굴 먹으려면 남호리로 오라고 한다. “하우스 지어 놓고 장사를 해. 불 때갖고 굴 꿔(구워) 줘.”

   
“성제간 주믄 어떻게 그렇게 맛있냐 그려”

“감티가 금세 나왔다냐. 안 쓰요?”
“안 써. 쌉쓰름하니 맛나.”
감태라고 하는 사람보다 ‘감투’ ‘감티’라고 하는 이들이 더 많다.
모다 감태 나오기만을 기다린 모양이다. 정안님 할머니는 “짐장할 때 감투지도 같이 하는 집이 많어. 따로 담기도 하고, 짐치하고 붙이기도 하고”.
“히쳐(씻어) 갖고 썰어 갖고 참지름 깨 치고 소금에다 무치믄 맛이 지대로(제대로)여. 고치(고추)물 해서 담아(담가) 노믄(놓으면) 최고고. 담아서 성제간 주믄 어떻게 그렇게 맛있냐 그려. 간 맞추기가 애라(힘들어). 쪼까(조금) 짜게 하믄 감투가 써.”
“지금은 우수 없다” 한다. 감태지 담가 놓으면 그렇게 맛있을 때, 맛보려는 사람이 많다. “또 잔돈을 다 가져가 불었네.” 우수 안 줘도 장사가 잘 된다.
그런데도 한 할머니는 “손 가기 전에 얼른 줘. 내 손이 가면 두 개 잡아 불어” 하고 기어이 우수를 요구한다. “우수가 한나(하나)제, 두 개여. 세상 법칙이 우수는 한나제 두 개 아녀.” “긍께, 한나 줘.”

   
호박 네 덩이로 만든 '탑' ⓒ 김창헌
다른 할머니는 얼굴을 내민다. “나 봐봐. 나 모르겄어? 지비(당신)꺼 꿀(굴) 많이 가져 간 사람인디….” 하는 수 없다. 많이 갈아줬나 보다. 우수 하나가 얹어진다. “재수 받으시오.”
그때부터 “요 집마니로 줘” 하는 말이 이어진다. 난처해진 할머니, “요새는 꿀을 까제, 감티 매기가 힘들단 말이오” 하며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한다.
파래 장사는 감태 나온 통에 손해본다. 파래 사러 온 사람이 감태 장사 앞으로 몰린다.

작년 대덕장에서 만난 고금도 교성리 정간심(75) 할머니도 그때처럼 마량장에서 감태를 팔고 있다. 재기로 해 온 것은 이미 팔아치웠고 뻘에서 매온 상태 그대로인 감태를 팔고 있다. “쩍 하나씩 있을지 모른게 막 물에다 넣지 말고 한번만 추려서 해묵어.”

지금은 마량장에만 감태를 가지고 온다고 한다. 대덕장에는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섣달에는 간디, 동짓달엔 못 가. 시방은 감투가 연하디 연해 갖고 대덕까지 갖고 가믄 삭아버려.” 정간심 할머니도 우수를 안 준다. “섣달에 감투 하나씩 주께. 시방은 감투가 없단게.”
인기가 좋아 감태 못 산 사람도 있다. “도란장(돌아온 장날)에 또 오요?” “이라고 (잘) 폴린디 지비 같으믄 안 오겄어?” 장에서 가장 먼저 자리 털고 일어난 두 할머니다.

    주말에 주문이 많다. 혼자 하기엔 벅찬 하루다(왼쪽) 대야에, 상자에...,불안해 보여도 할 일은 한다.(오른쪽) ⓒ 김창헌 “새벽에 물 봐 온 거여. 가져가서 잡솨 봐”

고금도 칠인리에서 온 아주머니는 크디큰 고기만 가져왔다. 큰 컨테이너 상자도 작다. 주낙배로 잡은 삼치와 부시리. “이런 고기는 고금서만 가져 와.”

부시리는 방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더 납작하다. 그래서 ‘평방어’ ‘납작방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말인 ‘히라스’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기도 하다. “부시리를 방어라고 하믄 방어인 줄 알고, 방어를 부시리라고 하믄 부시리인 줄 알어. 구별을 못해. 횟집에서 바가지 쓰기 쉽제.” 부시리는 몸통 가운데가 노란색 줄이 확실히 있고 방어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다.

고금도 세동리 김춘자(71)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서 잡은 것을 가져와 판다. 대야를 살피면, 세동리는 문어잡이도 많이 하고 붕장어 갯장어 뻘떡기 낙지 놀래미 눈볼락 쏨뱅이 등등 나오는 게 많다.
한 할머니는 “생전 이것이 안 보이더만 나왔네. 이 맛난 것이 만원. 매운탕 끓여노믄 질(제일) 맛있는디” 하며 쏨뱅이를 사간다. 한 아주머니는 “앙당거리고 싸납고, 그런 사람 보고 뻘떡기 같다고 한디, 춘게(추우니까) 죽은 것처럼 있네” 하며 게를 사간다. 세동리에서 뻘떡기는 징어리(정어리) 고등어를 넣은 툼발(통발)로 잡는다.

김춘자 할머니가 손님들에게 추천하는 것은 붕장어.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아나구(아나고, 붕장어)가 막 잡은 것하고 안 그런 놈하고 맛이 완전히 달러. 여기치는 새벽에 물 봐 온 거여. 가져가서 잡솨 봐. 더 살 것인디 그럴껑게.”

한 뭇(열 마리)에 만 원하는, 말린 붕장어도 인기가 있다. “우리 동네에서 마당 젤 깨끗하고 방이고 마루고 밥티 주숴 먹게, 정갈하게 하고 사는 양반이 말린 거여.”
처음 보는 것이 있다. 미꾸라지처럼 생겼는데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다. ‘포들챙이’란다. “도팎(돌) 밑에가 있어 갖고 잡기 징하게 애라. 장어랑 똑같이 해묵어. 꿔(구워) 묵고 매운탕으로 해 묵고. 몰려서 무시에다 찌개를 하믄 포근포근하니 맛있어.” 지금 잡기에는 짠한 마음이 든다. “바구(바위) 드끼믄(들치면) 시방 두 마리가 오그리고 있어. 사랑하고 있어. 그럴 때여.”

문어를 산 손님이 봉지에 갱물(바닷물)을 좀 넣어주라고 하는데 그냥 가라고 한다. “문어는 물 없이 놔둬야 오래가. 낙지랑 틀려.”

    섬에는 염소를 많이 키운다. 장날 흑염소장이 서 장터는 더욱 소란하다. ⓒ 김창헌 “약산 흑염소가 질로 값이 많이 나가”

마량장은 강진장 장흥장과 함께 흑염소장이 열리는 장이다. 인금 섬에서 흑염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 특히 흑염소로 이름난 약산도가 있어 외지에서도 일을 만들어 마량장에 온다.

30여 마리의 흑염소가 장 한복판에서 통통 뛴다. 장사들은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보이려고 염소 수염도 깎아주고 빗으로 털 손질도 해준다.
흑염소 장사를 한 지 20년이 넘었다는 정연진(71) 할머니는 “약초섬, 약산 흑염소가 질로 값이 많이 나가” 한다.

방목해 키운 흑염소 값이 집에서 사료 먹인 흑염소보다 절반 가량 더 비싸다. 구분은 어렵지 않다. “사료 묵은 놈은 (털이) 시껌해 갖고 윤기가 있고 방목한 놈은 풀만 묵고 자라서 털이 부옇고 꺼칠해.” 방목 염소는 발굽이 성치 못하다.
약산도 방목 흑염소는 혀의 위쪽을 보고 구분한다. 검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약산 흑염소이고 혀 위쪽이 희면 아니다.

장흥 회진장에서 만났던 생선 파는 김정심(68) 할머니를 이곳에서 만나 좋아라 했는데 반가운 얼굴이 또 있다. 졸이고 졸여 달디단 오산엿을 파는 박창엽(71) 할머니. 대덕장에서 만난 할머니다. ‘조각엿’을 한 볼태기 입에 넣어준다. 마량장과 장흥장을 다니고 있으니 다음에는 장흥장에서 또 보기로 했다.

산 배추를 경운기에 싣던 노인 부부가 한 할머니를 만나더니 무척 난처해한다. “어쩌끄나!” 한다. 올해 가뭄으로 배추 농사를 망쳤다. 배추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웃지간인 시골. 할머니는 사람사는 정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 보고 그냥 도라고(주라고) 하제. 몇 포기나 된다고. 속상하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야채장사를 하는 연동리 김순자씨는 "재래종 생강이 이렇게 나온 데 없어라" 한다. 이녁 밭에서 나온 것이 장에 많이 나온다는 얘기다.

    "머리에 여(이어)주기만 해."(왼쪽) 장흥 대덕면 '오산엿'이 마량장에도 나와 아이들의 관심을 끈다.(오른쪽) ⓒ 김창헌 “식량 사러, 대나무 사러 섬사람들이 왔제”

선술집에 들어가 마량장 얘기를 듣는다. 한영은(86)·이귀원(86)·서일석(79) 할아버지가 “딱 하나(한 병)만 더 하까” 하며 술을 마시고 있다.
한영은 할아버지.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였어. 1989년에 면으로 승격이 됐제. 마량이 면은 아녔는디, 애지간한 면보다 훨씬 컸어. 대구면에 속해 있는디 그 쪽보다 인구도 많고 학생수도 많고 돈도 많고 뭐시든 더 많어. 왜정 때는 강진읍이 제일 컸고 그 다음 목리, 그리고 마량이었제. 해방되고는 마량이 더 커져 갖고 강진읍처럼 도시 모양으로 된 데는 마량밖에 없었는게.”

마량은 강진에 이어 두 번째로 경제적 유통력을 가진 1종어항. 예부터 인근의 섬 경제가 마량으로 몰렸다. 섬에 필요한 물자가 마량을 통해 유통됐다. 완도·장흥의 섬들 상당수가 마량에 생활권을 두었다.

서일석 할아버지는 “섬에서 해태 미역 괴기를 이짝으로 올렸제. 고금 약산 생일 금일 신지 이런 섬사람들 마량에서 식량 사가고 옷 사 입고 했는게 장이 있어야제. 섬사람들 아니믄 장이 안 되는 장이여.”
무엇보다 김양식이 성행할 때 마량은 전성기였다. 김발 막는 시기에는 마량장에 대단위 대나무 거래가 생겨났다. 죽발을 이용해 고정식 김양식을 했기 때문이다. 담양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대나무가 오고 섬사람들은 배에 실어나르기에 바빴다.

마량장이 생긴 것은 해방 직후다. “지금 마량노인정 뒤에 간이학교가 있었어. 대구초등학교 부설 마량간이학교였는디 해방되면서 간이학교가 없어지고 그 학교 운동장을 장터로 만들었제. 사람 있고 돈이 돌고 그런게, 장 서자마자 큰장이었어. 마량장 생기고 저짝 회진장도 생기믄서 장흥 대덕장이 손해를 봤제.”
지금의 장터는 바다였다. 매립공사가 진행되고 터를 넓혀 이곳으로 옮겨온 것.

한영은 할아버지는 마량장에서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고 한다. 난장 틀 때마다 소 한 마리를 가져갔던 고금도 사람 김민수씨다. “보통 사람이 소금 한 섬을 짊어진디 고금도 가교리 김민수씨는 소금 일곱 섬을 짊어진 사람이여. 천하장사 중에 천하장사였제.”
2007년 마량과 고금도를 잇는 고금대교가 생겨났다. 마량장에도 타격이 크다. 고금도 약산도 생일도 금일도 등으로 가던 철부선이 약산도로 옮겨갔다.

철부선에서 내려 마량장으로 오던 사람들이 다리가 놓이면서 마량장보다 큰 강진장으로 가버린다. “배 타고 오믄 바로 눈 앞에 장이 있는 거하고 같겄어. 다 노령화 됐는디, 할머니들이 배 타고 다시 버스 타고 올라고 하가니. 장사할라는 사람들은 돈 벌어야 한게 마량장 버리고 강진장으로 가버리고. 장이 쫄아들 수밖에 없제.”

하지만 평생 옷 사고 반찬 산 장, 금일도 생일도 사람들도 아예 발을 끊어버린 것은 아니다. 다리 놓이며 장보기에는 오히려 불편해진 교통이지만 마량장을 찾는 수고를 한다. 약산도에서 온 이귀원 할아버지도 그렇다. “아주 옛날에는 약산도에서 마량 가는 연락선이 없었어. 장흥 회진하고 연결됐제. 근게 회진장으로 많이 갔는디 개인배를 타고 이짝으로도 많이 왔제. 철부선 있을 때는 약산장이 없어져분게 참말로 많이 댕겼고. 근게 여가 친구들이 많애. 친구 보러 장에 오제.”
작성자김창헌 기자  webmaster@jeonlado.com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