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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다양성이 있는 활기찬 영국의 중증장애인들

[문화읽기]영국 BBC가 시한부인생을 사는 중증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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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나 드라마 속 장애인 캐릭터는 비장애인과의 사랑과 이별을 통하여 장애인이 아픔에서 벗어나 비로소 보통의 비장애인들 같이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내용이 많다. 2004년에 한국에서도 개봉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지체장애인 여성은 20여 년 간이나 장애의 아픔에 갇혀서 세상과 소통을 거부하며 살아가지만, 남자와의 사랑과 이별을 겪으면서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고 말했다.

아사히TV에서 1997년~2002년까지 시리즈로 만들어졌던 드라마 <너의 손이 속삭이고 있어>는 청각장애인 여성이 듣지 못하는 장애로 인하여 온갖 어려움 속에 살아가지만, 비장애인 애인이 언제나 그녀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여 준다는 이야기다.

또한 2000년 TBS에서 방영되어 그해 일본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뷰티플라이프>에서는 도서관 사서인 휠체어장애인 여성이 비장애인 남성과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나 마주치는 상황의 대부분은 장애에 관한 것들뿐, 남녀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알콩달콩한 모습은 현미경을 동원해야만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이렇듯 우리가 장애인복지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영화나 드라마 속 장애인 캐릭터는 마치 보는 사람들로 하여 대부분 자신 장애의 아픔에 갇혀 지낸다는 설정이 많은데, 이는 일본의 제작진들이 장애인들은 장애의 아픔에만 갇혀서 지낸다고 보고 있어 비장애인들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장애인영화나 드라마는 마치 장애인 인식계몽용 영상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렇다면 일본보다 훨씬 먼저 장애인복지를 시작한 영국의 경우는 어떨까?

영국은 공영방송인 BBC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상품과 서비스접근’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BBC 내부에서 프로그램 제작 시 장애인의 방송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BBC방송제작핸드북’까지 만들어서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BBC가 만든 장애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거의 접하기 힘들다.

그런데 지난 6월 17일 MBC에서 ‘짧은 생애 특별한 꿈’이라는 제목으로 BBC가 만든 장애인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비록 2년 전에 방영했던 것의 재방송이었지만, 나로서는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국 영상미디어를 처음으로 접하는 순간이었다. 장애인의 방송 참여에 관한 지침서까지 있다는 BBC는 과연 장애인을 어떻게 묘사할까?
   

‘짧은 생애 특별한 꿈’은 런던 근교의 중증장애인 생활시설인 ‘트렐로어 학교’에 살고 있는 중증장애인들의 생활을 조명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이곳은 중증장애인들이 기숙하며 24시간 간병인들의 도움 속에 정규학교 과정도 배우고, 재활치료를 비롯한 자립생활훈련도 하는 곳이란다. 이 다큐멘터리의 원제목은 ‘Miracle: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원제목인 기적을 말하기 위해 주인공인 스튜어트(19세)가 얼마나 큰 고난을 받고 있는가를 상세히 설명한다.

“3살 무렵부터 뒤센형 근이영양증이라는 근육병이 찾아와 점점 온몸의 근육이 약해지고 있어요. 19살인 지금 손발의 기능은 거의 마비상태와 같고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운 상태예요.”, “마치 감옥에 갇힌 거 같아요. 몸이 찢겨져 나가는 거 같은데 움직일 수가 없고 몸 안이 무너져 가고 있는데도 피할 길이 없죠.”- 스튜어트

“뒤센형 근육병은 근육생성에 필요한 단백질인 디스트로핀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 발병하는 것으로, 이 질환에 걸리면 온몸의 기능상실로 마비가 와서 죽음에 이르는 유전질환이다.” - 나레이션


이처럼 이 다큐멘터리는 처음과 중간 중간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수술 장면을 포함하여 스튜어트의 장애 상태를 자세히 소개한다. 그렇지만 BBC의 ‘짧은 생애 특별한 꿈’이 돋보이는 점은 감당하기 힘든 큰 병으로 인해 장애인이 엄청난 시련 속에 열심히 살면서도, 불꽃 같은 투혼으로 기적을 이룬다는 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이 다큐멘터리는 시종일관 주인공인 스튜어트가 근육병으로 인해 생명유지에 가장 중요한 음식 먹는 것도 힘겨우며, 심폐기능도 아주 약해 밤에 잘 때는 산소 호흡기를 착용해야만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중증장애인임에도 계속해서 활기차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들 온몸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스튜어트같은 중증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처럼 활동적이지 못하고, 휠체어나 침대에 누워서 축 처진 생활밖에는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스튜어트가 가만히 정지해 있는 모습은 인터뷰 할 때나 의료적인 치료를 받거나 잘 때, 전공인 그림을 그릴 때뿐 그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스튜어트뿐만이 아니다. 스튜어트와 같이 살고 있는 기숙사 동료들도 거의 다 24시간 도움이 필요한 중증장애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재활치료를 받는다거나 할 때 외에는 휠체어에 의지해 무기력한 모습은 찾기 어렵다.

이어 다큐멘터리는 장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도 떨고 쇼핑도 하며, 마치 비장애인들이 도로에서 친구끼리 오토바이를 타며 행진하듯 각자의 전동휠체어를 타고 힘차게 달리는 장면을 속도감 넘치게 묘사한다. 또한 스튜어트를 포함한 동료 장애인들이 모두 손발의 기능이 온전치 않아 움직임이 극히 제한적이라 이들이 놀더라도 기숙사 안에서나 힘겹게 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천만의 말씀이야.”라며 가볍게 응수한다. 영국에서 18세가 넘은 성인은 누구나 클럽에 가서 놀면서 술도 마실 수 있듯이, 한 장애인 또한 “우린 피 끓는 청춘이에요!”라며 동료 장애인들과 밤에 클럽에 가서 술도 마시고 즐긴다. (한국이나 일본의 제작진이었다면 스튜어트와 같은 시한부 생을 살며 24시간 도움이 필요한 중증장애인들이 거리를 힘차게 달린다거나, 술집 가서 노는 장면을 넣는다는 걸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그리고 주인공인 스튜어트가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며 가능하다면 화가가 되고 싶다.”라며 가녀린 중증장애인의 꿈을 서글프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강한 힘을 표현하고 싶다.”, “미술대학에 입학하려고 열심히 공부 중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스튜어트의 인터뷰와 함께 그림 그리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그저 중증장애인이 할 일 없이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미술대학의 지망생임을 보여주고 있다.

스튜어트가 입학하기 위해 대학을 방문했을 때도, 안내를 맡은 미술과 학생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도 스튜어트의 장애에 관련한 것은 전혀 없고 미술과 관련한 내용뿐이었다.(우리의 제작진이라면 안내를 맡은 비장애인 학생에게 ‘장애인을 처음 대하니 어떤가’하는 장애에 관한 질문만을 던졌을 가능성이 크다.)

‘짧은 생애 특별한 꿈’에서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은 카메라앵글의 위치다. 스튜어트를 비롯한 중증장애인들은 모두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기에 보통의 비장애인들보다 시선이 낮게 위치하고 있고, 카메라 앵글의 높이는 장애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인터뷰할 때는 물론, 거리를 이동하는 중에도 카메라의 높이는 계속해서 장애인들의 눈높이를 유지한다. 전동휠체어가 모두 드러나는 전체화면은 각 장면들의 처음에 장애인들이 이동할 때만 잠시 비출 뿐, 카메라는 주로 장애인들의 가슴 위를 중점적으로 보여 주며, 장애인들이 어떤 공부를 하는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누구와 함께 활동을 하며 생활하는지를 자세히 따라간다. (대조적으로 우리의 방송이나 영화에서는 대부분 비장애인 카메라맨이 그냥 서서 찍기에 휠체어장애인은 작고 왜소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 다큐멘터리가 우리와 가장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점이라면, 이곳 특수학교의 장애인들은 24시간 도움이 필요한 중증장애인들이라 씻고 먹고 입고 휠체어를 타고 하는 등의 일상생활 모든 부분을 간병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의학적인 치료와 재활훈련을 하는 모습 외에는 간병인의 도움 받는 장면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KBS ‘인간극장’, MBC ‘사랑’같은 우리네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장애인이 주인공일 경우, 내용의 대부분이 가족이나 봉사자로부터 도움 받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장애인은 장애의 아픔과 불편 때문에 삶의 다양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생의 대부분을 도움에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만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BBC 다큐멘터리 ‘짧은 생애 특별한 꿈’이 시사하는 바는 여러 가지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우리나라나 일본의 미디어 제작진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무엇이 다른지, 비장애인이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반해, 영국 BBC의 제작진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점을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장애나 비장애, 시한부 생이냐 오래 사는 생이냐를 떠나 우리는 모두가 다양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다. 장애가 아무리 심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다양성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BBC는 비록 시한부 생을 사는 장애인일지라도, 장애보다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갖고 있는 희노애락 등 삶의 다양한 모습에 관해서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 사람의 남은 생이 몇 년이고 엄청난 장애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활기차고 다양한 삶을 즐기는 인간의 모습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작성자심승보 (장애인문화센터 방송모니터단)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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