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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세상을 바꾸는 미륵의 땅

김제 모악산의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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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세상을 바꾸는 미륵의 땅
김제 모악산의 문화유산

 


      

▲김제 모악산 탑

이번 답사 길은 민중들의 염원으로 솟아오른 모악산 금산사와 그 주변의 문화유산을 돌아보기로 한다. 모악산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금산사 인터체인지로 들어가면 금방이고, 전주로 해서 들어가도 된다.
  모악산은 노령산맥이 서쪽으로 달리다 완주와 김제의 경계에 이르러 우뚝 멈춘 산이다. 모악산은 어머니 품처럼 넉넉하고 자비롭다. 김제만경 너른 뜰이 다 그 품안이요, 민경동지 물줄기가 또 거기서 발원한다.
  그러나, 그 산을 정녕 모악이게 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일찍부터 모악은 세상 잘못 만나 고통 받은 민중들이 삶을 체념한 채 울며 찾아든 산이었다. 그래서 모악은 비원의 산이요, 미륵의 산이다. 미륵신앙의 본찰인 금산사가 이 품안에 있고, 증산을 비롯하여 개벽과 후천을 기다리는 신흥종교도 이 품안에 들어있다. 그래서 옛 이름도 엄뫼(어미산)가 아니던가.
  금산사가 모악에 처음 앉은 것은 백제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이 절의 진면목이 갖추어진 것은 신라통일 후 경덕왕 때 미륵신앙의 본찰로 진표율사가 중창을 하면서부터다.
  진표율사는 모악산에서 가까운 완주 사람, 어린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주욱 꿰어서 물에 담가두고는 그걸 잊어버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음 해에 그곳으로 다시 사냥을 갔을 때 그 개구리들이 그때까지 살아서 발버둥을 치며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한 아픈 체험이 어린 그로 하여금 출가를 결심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중국 문헌인 (승고승전)에 "남녀 백성들이 그가 지나가는 길에 머리를 풀어 옷가지를 벗어 덮어 그가 진창길을 건너가게.."할 정도로 그는 당대의 대스승이었다.
  이 절의 문화제들은 몇 점의 석물을 제외하고는 대개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깡그리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현재 금산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보물 10점이 있다. 금산사 문화유산 순례를 나선다.
  금산사 매표소를 지나면 조그만 석문 하나가 있다. 후백제 견훤이 쌓았다는 성문이다. 이곳 금산사는 백제의 영주 견휜과 인연이 깊다. 견휜은 당시 서라벌로부터 점점 이완되어가고 있는 옛 백제 땅의 민심을 한데 집약하기 위해 이곳 금산사를 원찰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권을 물려주려 했다가 오히려 두 아들 신검과 양검에 의해 이곳에 유폐되는 참담을 맛본다. 그 후 그가 금산사를 도망쳐 왕건의 수하로 들어가 후백제가 망하는 꼴을 보다가 끝내 논산 황산사라는 절에서 울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국보 제 62호인 미륵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으로 일명 용화전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의 편액은 각 층마다 각각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층에 걸린 대자보전이란 현판 미륵을 "자씨보살"이라고 별칭 하는 데서 연유한다. 2층은 "용화지회" 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데, 이는 미륵보살이 다스릴 미래세계를 "용화세계"라고 하는데서 연유한다.


  이 전각 안에는 대형 미륵장륙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볼 모드 진흙으로 빚은 소조불로서, 가운데 본존불이 높이가 12미터에 가깝고, 좌우 협시불은 9미터에 가깝다. 현재 좌우 협시불들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27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나, 본존불은 1934년에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본존불의 청동대좌는 신라 때의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 27호인 다층석탑은 사람 키보다 약간 높은 크기이다. 대적광전 앞쪽에 있는 이 탑은 그리 흔치 않은 6각탑으로, 기단부 6면에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는 11층이나, 맨 위의 옥개석으로 보아 처음에는 13층 이상의 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짙은 회색의 점판암으로 된 이 탑의 분위기는 단아함 그대로다.
  이제 금산사를 나와 국신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국신사는 금산사를 빠져나와 712번 지방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불과 5분 거리다.
  모악산 서북쪽 기슭에 있는 이 절은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국신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의 전화로 불타버린 것을 고종 10년에 중창되면서 귀신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은 또 느낌이 좋지 않다 해서 국신사로 다시 바꾸어 쓰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국신사는 초라하고 한적한 한 작은 암자에 불과하다. 단청이 되지 않은 작은 규모의 대적 광전과 명부전, 삼층석탑 1기가 겨우 남아있다. 보물 제 826호인 대적광전은 창건연대가 분명치 안은 조선조다포계 맞배집이다. 건물 규모에 비해 내부에 안치된 불상은 어울리지 않게 커 보인다. 그러나 측면 벽체에 살창을 낸 것이 눈길을 끈다.
  대적광전 뒤쪽 언덕에 있는 삼층서 갑은 화강암재 석탑으로서,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선이 정밀하고 옥개석의 곡선이 거의 평행을 이루는 백제 양식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신라의 미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가람배치상 탑이 서야 할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가람배치와 상관없이 풍수비보를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내가 보기에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석탑 앞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좌대가 일체인 돌사자 한 마리가 놓여있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사자의 등 위에는 지름이 30센티 가량인 구멍이 나있고, 거기에 대나무 마디와 같은 양식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 남근석으로 구전되고 있는 돌기둥이 하나 얹혀져 있다. 이 석물의 용도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고 있다.
  이제 산을 내려간다. 돌계단을 내려서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춘다. 그다지 높은 산도 아니건만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맛이 시원하다. 절집은 아무리 허수룩해도 저마다 비경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절집은 그래서 좋다. 트이면 시원해서 좋고, 막히면 또 아늑해서 좋다.


  이제 증산 김일순을 찾아간다. 모악산 왔다가 증산을 못만나고 가면 모악산 갔다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증산이 말하기를 계룡은 수탉이요 모악은 암탉이라 하였다. 증산과 모악의 인연은 속세에서부터 이어진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외우내환에 시달리던 한말, 한때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농민전쟁에도 참여하였으나, 실패할 것을 미리 알고 도중하차를 했다. 그리고는 그 쪽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천하주유"를 거쳐 나이 서른에 도통을 하게 된다. 그리고 39세의 창창한 나이에 화천(사망)할 때까지 천지공사를 벌인다.
  증산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을 위한 구원의 종교체제를 세우고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 비운의 교조이자, 해원상생으로 민주평등 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던 개혁사상가로 기록된다. 최근 들어 젊은 지식층 사이에 증산이 회자되는 것도 그의 개혁사상 때문일 것이다.

  마침 길가에서 칠순의 할머니를 만났다. 스스로 증산교도라고 밝힌 이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 당시 증산상제께서 이 마을에서는 대청에 앉아서 낚시를 하리라고 예언했는데, 반 백년 만에 이곳에 저수지가 생기고 지금은 유원지로 지정되어 머지않아 저수지에 낚시장이 생기고 보트가 뜰 것" 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저수지 곳곳에서 준설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증산법종교 본부는 저수지가 바라보이는 오리알터라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산중의 여느 절간처럼 조용하고 한산하다. 몇몇 노인네들이 방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한가로이 한담을 나누고 있다. 경내에는 증산 내외의 유해를 안치한 영대 증산이 화한 미륵불을 모신 삼청전, 증산의 맥을 이은 딸 강순임과 사위 김 김병철의 사당인 화은당을 비롯하여 태평전, 숭도묘 등의 기와를 얹은 한옥 전각들이 있다.
  그곳을 나와 다리를 건너 구릿골로 간다. 그곳에 있는 약방은 증산이 깨달음을 얻은 후 약방을 지어 만백성을 상대로 천지공사를 벌였다는 성지이다.

  증산은 동학이 실패하자 유불·선 등의 기성종교의 교리를 비롯하여 음양, 복소, 의술 등과 신명을 부리는 도술을 공부하고, 이 과정에서 김경혼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한 주문이된 태을주를 얻고, 김일부로부터는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 그는 1901년 7월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고 구릿골 약방을 본부로 하여 증산교 교리의 핵심인 천지공사(�캽v)를 행한다. 증산교의 성지인 구릿골 약방(광제국)에는 현재 그의 초상과 신발, 약장 등을 비롯하여 그가 남긴 태을부적이 남아있다. 현재 그 집은 증산의 제자 후손네가 살고 있으며, 전국각지에서 이따금 교도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쯤하면 모악산 구경은 북한 김이성 주석의 조상이라는 전주 김씨 태사묘와 대원사를 빼고 거의 다한 셈이다. 이제 서울로 돌아간다. 서울가는 길은 원평으로 나가서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3시간 거리다.

 

 

글/ 김재일 / 소설가, 경실련 중앙위원이며 시민모임 "두레" 회장이다.

문화역사기행모임 "두레"는 수시로 문화유적이 답사를 실시하고 있다.

참가할 사람은 서울 712-5812번으로 문의하기 바란다.

작성자김재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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