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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옛 선인들 넘나들던 억새풀 고개

경북 문경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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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옛 선인들 넘나들던 억새풀 고개
경북 문경새재

 

 

 

문경새재 덕무푸리 말채쇠채로 다 나간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북바디집으로 다 나간다
황백나무 북바디 잠은 큰아기 손목 다 녹아난다

 

 

  이 노래는 문경새재 인근마을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로서 아리랑을 후렴으로 한 일종의 메나리계 아리랑요이다. 옛날 이 지역을 지형이 험하여 도적들이 곧잘 끓었으며, 땅이 박하여 농사짓기가 수월치 않았다. 게다가 이 민요에서 보듯이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해서 이 지역의 민요들은 한탄조와 수심조가 많다.
 경상북도 문경은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경은 큰 강이나 험준한 산맥으로 삼는다. 소백산맥은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었다. 두 나라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을 차지하고 끊임없이 영토분쟁을 일으켰다. 이 산맥은 고구려로 보면 남하정책의 최전방이었고, 신라로 보면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가는 일선이었다.
 영남과 기호지방을 가르는 소백산맥에는 예로부터 큰 고개가 셋 있었는데, 영주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죽령, 김천에서 대전으로 넘어가는 추풍령, 그리고 그 가운데 자리한 문경새재가 그것이다 문경새재는 이 세 고개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은 고개이다.
 이번 역사기행은 새재를 넘어 문경 땅을 밟아보기로 한다.
 문경새재가 생기기 훨씬 전에는 계립령이라고 하는 고개가 지금의 새재 동쪽에 있었다.  이 고개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교통을 위해 신라가 처음 길을 텄다. 문경군 관음리에서 충북 중원군 미륵리로 통하는 계립령 주변에는 지금도 고구려와 신라가 쌓은 천마산성 근품산성 등 크고 작은 성들이 있어서 이 지역이 두 나라 간에 요충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고구려 온달장군이 문경과 단양을 있는 소백산맥 요충지를 고수하려다 단양 온달산성에서 신라군에게 패하여 소백 이북을 신라에게 내주었다고 "삼국사기"는 말하고 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 와서 조령, 그러니까 지금의 문경새재가 계립령 서쪽에 새로 난 것이다. 지금은 흔히 "조령"이라 하여 속칭 "새재"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억새풀이 많다 하여 "초령"이라 불렀다고 "고려사"는 말하고 있다. 그만큼 억새풀이 많고 으슥했던 고개, 이 새재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조 태종 때의 일.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재는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를 비롯하여 행차하는 관리들과 보부상 등 만백성의 교통로로서 3대 고개 가운데 교통이 가장 번잡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은 서거정이 문과 급제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며 팔영시를 지었으며, 일본 사신들이 이 길로 한양으로 조공을 다녔다고 문헌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이 고개를 넘어 신립장군이 지키는 탄금대를 밀어붙이고 한양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상주쪽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파죽지세로 새재에 당도했다. 한양에서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 신립장군은 새재에 이르러 방어진을 쳤으나, 상주쪽에서 우리 군사가 대패했다는 전갈을 받고 새재를 내주고는 후퇴하여 달래강을 배수진으로 하여 탄금대에 진을 쳤다. 그러나 역시 쫓긴 걸음이라 몇 차례 싸워보지도 못하고 탄금대에서 왜군에게 전멸하고 말았다. 그 당시 신립장군이 새재의 험한 지역을 이용해서 왜군과 맞붙었더라면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지.. 결국 신립장군은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서 한양 길을 고스란히 내주게 되었고, 선조임금은 궁궐을 빠져나와 부랴부랴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고..
 새재에는 여기 저기 성곽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을 당한 후 조정에서 쌓은 새 겹의 조령산성이 그것이다 세 겹의 산성 가운데 남쪽을 막기 위해 세운 첫 번째 성이 초곡성이며, 그 성의 제 1관문이 주홀관이다. 주홀관은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 양식에 홍예문을 하고 있어 조형미가 뛰어나다. 제 2관문인 조도관은 선조 때 신충원이 세운 것으로 역시 홍예문루를 하고 있다. 제 3관문인 조령관은 새재 정상에 있는 북방문이다.
 제 1관문인 주홀관 우측 숲 속에 새재 성황당이 있는데, 이 성황당은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거두였던 최명길과 새재의 여신 사이에 애틋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내용인즉 젊은 최명길이 어느 날 안동에 있는 외가에 다니러 가다가 새재에서 한 모령의 낭자(여신)를 만나 자신의 옷을 안동 좌수가 훔쳐갔다는 하소연을 듣는다. 이에 최명길은 안동으로 가서 빼앗긴 낭자의 치마를 디 찾아주고 그녀로부터 앞으로 닥치게 될 병자호란에 대한 예언과 방편을 얻게 된다. 낭자의 예언대로 세월이 지나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최명길은 주화파의 거두가 되어 나라를 구하여 나중에 여의정에 까지 오르게 된다.
 주홀관 옆에는 많은 비석들이 서 있는데, 주로 조선시대 관리들의 송덕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석은 그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기록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제도, 영토, 표기방법, 석조예술, 금석문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면 눈여겨 읽어볼 필요가 있다.
 비석군 옆에는 전나무 비가 하나 서 있다. 옛날 이 자리에 커다란 전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고개를 넘나드는 과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해 전나무가 죽자 이를 아쉬워하던 사람들이 그 전나무의 공덕을 생각하여 비를 세워주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작은 전나무 한 그루가 그 옆에 서 있다.
 그 비석군에서 좀더 올라가다가 오른쪽 산비탈길을 오르면 혜국사라는 절이 나온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신라 때 지은 절로서 제법 고색창연하다. 고려말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 절로 들어와 묵었다는 기록도 있다.
 거기서 다시 돌아나와 제 2관문으로 가다보면 조령원터가 나온다. "원"이라는 말은 길손들의 숙식처로서 관아에서 운영하였다 한다. 요즘의 여관 식당과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그 터가 남아있는데, 가까운 곳에는 당시의 주막거리도 군데군데 재현해 놓고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주고 있다.
 문경 땅에는 역사유적지들이 많다. 특히 회양산 봉암사는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신라 고찰로서 2백여명의 수도승들이 수행정진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수도처로 이름이 높다. 이 절은 흔히 우리 시대의 마지막 절이라고 하는 것은 이곳에 있는 스님들이 수도에 방해가 된다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막고 있는 까닭도 까닭이거니와 칼날같이 시퍼런 승가의 청규가 신라 이후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몇 안되는 절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열반한 조계종정 성철선사도 젊은 날 이 절에서 수행을 했으며, 또 얼마 전 조계종 개혁바람에 일생일대의 "자충수"를 둬 조정 자리에서 물러난 서암 대선사도 이 절에서 정진하며 선풍을 드날리던 곳이다.
 주막에서 식혜(이곳 사람들은 단술 또는 감주라고 한다) 한사발로 목을 축이고는 새재를 내려와 회양산으로 간다. 몇 해 전에 그곳에 주석하시던 서암 큰 스님과 맺은 인연도 있고, 몇몇 수좌들과도 눈을 익혀온 터이지만, 워낙 텃새가 센 곳이라 쉽게 문을 열어줄 지는 모르겠다. 일단 나서보기로 한다.
새재 입구 진남교 다리가 있는 동네를 지금은 "대탄"이라고 부르지만, 옛날에는 견탄(개여울)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유인즉-옛날 이곳에는 원이 있어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묵어가곤 했다는 것, 어느 해 한 젊은 선비가 이 마을에서 하루를 묵으며 이곳에 사는 한 낭자를 건드려 백년가약까지 맺게 되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선비는 과거 생각이 나서 전날 밤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여울을 건너 줄행랑을 쳐버렸던 것, 배신당한 낭자는 서방님을 부르며 따라가다가 지쳐서 여울가에 앉아 낭군을 원망하며 "개새끼, 개새끼" 했다는 이야기다.
 개여울을 지나 회양산 봉암사는 문경에서 가은 가는 길로 한 10분 달려간 곳에 있다. 산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냉기가 돈다. 죽비를 맞은 듯 등줄기가 서늘하다. 그만큼 산이 높고 골이 깊다.
 행정상 문경군 가은읍 원북리에 있는 이 절은 신라 헌강왕 때 지중대사가 창건한 선문구산 가운데 하나이다. 한창 흥하던 신라불교가 신라말 혜공왕 이후로 국가의 혼란과 함께 침체되다가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들어오면서 다시 활발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동안 화엄종 등 5교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교단에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종지로 하는 "교외별전"의 선지가 풍미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된다. 그 후 고려초까지 선 중심의 불교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데, 그 중 심지가 바로 중국에서 새로운 선사상을 배워서 들어온 선승들이 세운 선문구산이다. 이곳 회양산 봉암사도 그 중 하나.
 산문에 들어서니 일주문께에서 낯익은 처사가 먼저 알고 나온다. 원주방으로 전화를 하더니 들어오란다. 걸맞지 않은 배낭은 사무실에다 감춰두고 들어갔더니 낯익은 수좌 한 분이 큰 스님한테로 안내한다. 여든에 가까운 큰스님의 눈빛은 여전히 푸르다. 오체투지로 삼베를 하고 끓어 앉는다.
 이 절을 개창한 스님은 지증 대사. 17세 때 화엄종찰인 부석사로 출가. 뒤에 중국으로 건너가 선을 배워 이곳 회양산에다 선문구산의 하나인 회양산파를 열었다. 그러나 사적기에 의하면 지증 이전에 먼저 지선대사가 이곳에다 봉암사를 짓고 수도를 했다고 한다.
 경내에는 삼층석탑(보물 제 169호). 적조타(보물 제 137호), 적조탑비(보물 제 138호), 원오탑(보물 제 171호), 원오탑비(보물 제 172호), 마애불상 외에도 고색창연한 석물과 목조건축물이 남아있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때의 것으로 높이는 6미터 남짓, 상륜부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지증대사 때 건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탑의 탑신은 층마다 우주를 모각하고 있다 탑 앞에 배례석이 놓여있다.
 대웅전 서북쪽 탑비와 함께 한갓지게 서 있는 적조탑은 지증대사의 부도탑이다. 높이가 약 3.4미터인 이 부도탑은 전형적인 신라 팔각원당이다. 하대석 측면의 안사에 새긴 사자상이 멋있고, 중대석에 조각된 악기연주상이나 합장공양상은 흔치 않은 조각이다. 탑신석의 문비와 사천왕상도 눈여겨 볼만하다. 적조탑비는 지증대사의 행장을 적은 비석으로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하나로 유명하다. 남한에 남아있는 금석문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분황사스님 혜강이 쓰고 새겼다고 한다.
 정진대사는 지증대사에 이어 이곳 봉암사의 중홍조다. 그의 부도인 원오탑은 일주문 쪽에서 보아 개울건너 오른편 언덕 위에 있고, 그의 비는 그 언덕의 아랫자락에 있다. 원오탑은 높이가 무려 5미터로서 혼자 않은 대형 사리자탑이다.. 10세기 중엽에 세워진 이 부도탑은 상하단 굄대의 각 모서리에 난간을 돌려 멋을 부렸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증대사 적조탑을 많이 본따고 있다. 원오탑비는 비신이 청석으로 되어 있고. 세부조각이 아주 섬세하다. 비신에 비해 이수가 육중해 보인다.
 봉암사 마애불상은 경내에서 계곡을 건너 오른쪽으로 10여분 들어간 계곡 바위에 있다. 백운대라고 불리는 큰 바위에 양각된 이 부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높이는 약 6미터, 불상의 각 부분이 고려말 마애불상치고는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이제 해가 저문다. 서울길이 바쁘다. 꽃보다 아름다운 노을이 새재 마루턱에 걸려있다.


글/ 김재일 / 소설가, 경실련 중앙위원이며 시민모임 "두레" 회장이다.

문화역사기행모임 "두레" 는 수시로 문화유적 답사를 실시하고 있다.

참가할 사람은 서울 712-5812번으로 문의하기 바란다.

작성자김재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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