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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어린 날이 당신의 순수함입니다

[이영문의 영화읽기] 플립(Flipped, 2010)

본문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시는지요? 윌리엄 블레이크는 일찍이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라고 했습니다. 짧지만 강렬한 무엇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려면 저는 그 정도 속을 뒤집는 일(flipped)이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고, 세월은 흘러갔지요.

  이제 더 이상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제게 남아 있지 않다고 느끼던 어느 날, 구체적으로는 불혹의 나이 너머 지천명의 고개에 접어드는 요즘,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는 일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일상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더 매달리지만(이를테면, 변하지 않는 어떤 가치 찾아 헤매기, 서푼어치 추억 만들기, 혹은 죽을 때까지 일 안하고 편안히 노는 일 찾아가기, 자본주의 비판에 열 올리다가 그 떡고물에 즐거워하기 등), 가만 더듬어 본다면, 우리에게도 긴 시간동안 함께 해온 순간의 기억들이 남아 있습니다.

  동화 같은 삶을 꿈꾸던 어린 시절. 순수의 시대 속에 세상의 모든 것을 시(詩)로 표현하던 일. 그 사람만이 오직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 될 것이라는 착각과 함께 뒤따라 온 아픈 기억들. 세상과 맞서 늘 당당하던 자신이 갑자기 초라해보이던 어느 저녁. 세상사람 모두가 자기편이 아닐 수 있다는 놀라운 현실에 직면한 잠 못 드는 봄밤. 이 땅의 위대한 시인 김수영이 말하던 ‘강물에 떨어진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 삶이 손안에 잡히는 이것만이 아니라, 무지개처럼 빛나던 어떤 날이 있었음을 문득 알게 될 때, 당신은 가끔 가슴 한 곳이 먹먹해지지 않으신지요? 오늘 소개드릴 영화는 비록 국내에서 개봉하지 못하고, 온라인 영화관으로(그래도 대한항공 국제선 기내서비스에서 볼 수 있었지요) 직행했지만, 현명한 네이버 독자 200명에 의해 별점 9.28을 획득한 영화, 할리우드 사랑의 전도사 롭 라이너 감독의 플립(flipped, 2010, 미국)입니다. 남녀 두 아이의 내러티브에 의해 전개되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성장 이야기를 객관화한 점에 있습니다. 공감되는 포인트. 그곳에 늘 우리 마음의 응어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건너편에 이사 온 브라이스를 보고 첫 눈에 사랑을 직감한 7살 줄리. 소위 말해 눈이 뒤집어졌습니다(flipped). 혹은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 하지요. 혹은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엘빈 샘라드의 사랑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정신병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상대편 브라이스의 반응은 덤덤하다 못해 회의적입니다. 원래 남성들은 용감하게 들이대고 똑똑하기까지 한 여성을 좋아하면서도 무서워합니다. 브라이스 또한 그렇습니다. 엄마 뒤편에 숨거나, 다른 여자애에게 관심을 돌리거나, 줄리가 정성껏 가져오는 계란을 몰래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동네어귀에서 세상을 보여주는 무화과나무가 잘려나가는 것을 막아주지도, 도와주지도 않는 무책임하고 무력한 우리의 브라이스를 연민의 눈길로 지켜보는 줄리. ‘부분’이 모여 더 아름다운 ‘전체’가 되기 위한 풍경화를 아빠로부터 배우고, 브라이스의 할아버지로부터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당당하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줄리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너저분한 변명과 경멸만을 먼저 배우는 브라이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역전됩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브라이스는 독백합니다. ‘이제는 내 눈이 뒤집어졌어.’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이 새롭게 시작함을 넌지시 암시하며 영화는 끝나지만 우리는 다시 현실과 마주칩니다.

   

  영화 속에 그려지는 두 가족은 무척 대조적입니다. 가난하지만 서로의 꿈을 격려해 주는 줄리의 가족과 부유하지만 세상에 대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열등의식으로 가득한 브라이스 가족이 묘하게 교차됩니다. 두 가족의 교차점에 브라이스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의 말은 단연 이 영화의 압권이며, 사람에 대한 정의가 되지요. 줄리에 대해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광택 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한번 무지개 같은 사람을 만난단다.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단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평범한 바로 그 사람이 아름다운 무지개임을 모른 채 살아오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영화지만, 가끔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픈 동화로 이 영화가 비춰지기도 합니다. 혹시나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먹먹해진 분들에게 말씀 전합니다. 잃어버린 어린 날은 없으며, 지금껏 잘 살아오셨습니다. 이 영화가 아픈 것은 당신이 그 만큼 순수하다는 증거입니다. 문득 김수영 시인의 ‘봄밤’을 읽고 싶은 날입니다.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작성자이영문 아주대학교 인문사회의학 교수  humanishop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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