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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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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열자마자 제법 늘씬한 바람이 상기된 얼굴에 와 부딪혔다. 바람은 식어 가는 태양을 몰고, 마치 신(神)이 숨겨놓은 우리의 운명처럼, 목적도 없이 비틀리는 아련한 마지막을 노래하며 그 지친 몸뚱아리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굴려대고 있었다. 젖은 머리에 목덜미가 으스스해졌다. 언제이던가 영화관에 갔을 때 연인들의 뜨거운 키스신에서 느껴 보았던 그 가벼운 떨림이 내 등줄기를 타고 올라 뒷골에 퍼지면서 온 몸을 간질이고 있었다. 5개나 되는 계단을, 언제나 그렇듯이 조심조심 내려와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구나."
 어느 중국집을 지나면서부터 네 개의 발은 어느새 빨라지고 있었다. 거미줄같이 쳐지는 끈끈한 어둠 때문만은 아니었다. 밤낮으로 걸고 다녀서 이제는 내 살점이 되어버린 듯한 목걸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목욕탕에서 옷을 벗고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저만 치서 너댓 명의 꼬마들이 무슨 로봇 얘긴가를 조잘대며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본능처럼 나의 두 눈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 모양을 하고는 땅에 박혀 버렸다. 목발 두 개를 짚고 중풍환자같이 흔들어대는 모습에, 두려움에 가득 찬 눈길을 보내는 꼬마들을 상상하면서 계속 걸었다. 길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계들은 하나 둘씩 불을 켜고 있었고 내리는 어둠만이 나의 흔들리는 어깨를 짖누르고 있었다.

 며칠 전에 깔끔하게 칠해 놓은, 까만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집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고소한 식용유 냄새가 골목 저만치서부터 강하게 풍겨왔고 방안에서는 여인네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굵직한 남자들의 너털웃음이 간간이 보태어져 잔치 집 같은, 기분 좋은 흥분과 조금의 들뜬 분위기가 진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마당에 낯선 사람들 몇 명이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의미 없는 우스개 소리를 주고받는 풍경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지나가 컴컴하게 불도 켜 있지 않은 우리 부엌에 신발을 벗어놓고 방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주문을 외우기 전에는 그 암흑과 감히 깨뜨릴 수 없는 침묵을 머금은 색(?),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신(神)은 빛이라는 요술로 우리에게 어둠을 주었으며 밝음으로 포장된 인식과 또 반 쪼가리 희열을 주었다. 오직 어둠만이 지배하는(그 때는 어둠이란 말이 생길 필요도 없겠지만) 세상이라면, 그 곳엔 빛에 현혹된 우리네 인식과 반쪽의 희열 대신에 완전한 허무와 무감각, 어둠도 밝음도 아닌 공평한 인식만이 스며있고 심지어는 존재의 기억마저 잃어 가는 어둠의 유토피아, 암상, 온갖 것을 다 만들었다고 성경에 씌여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어둠을 만들었다고, 악(惡)을 만들었다고, 죽음을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흥, 위선의 하나님.

 빛의 요술은 한층 더 나를 우울하게 했다. 아무 장식도 없는 방안,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아직 개지도 않은 채 아무렇게나 젖혀져 있는 이불, 뒤집힌 그대로 한 귀퉁이에 버려진 옷가지, 그리고 뿌옇게 먼지가 가득한 어두운 색깔의 가구와 책상, 거래 섞인 침에 시커멓게 반죽되어 버린 담뱃재, 이 모든 것은 불을 켜기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불을 한쪽으로 밀치고 어젯밤에 토한 것이 묻은 옷을 집어든 것은 나의 우울을 쫓아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20년이 넘도록 목욕탕에 갈 때조차도 벗지 않았었던 나의 소중한 목걸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옷에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불 밑에, 농 밑에, 열쇠를 넣어두는 서랍 속까지 좁은 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목걸이는 결국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 때 밖에서 "신랑 온다"라는 명랑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시끌벅적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서야 비로소 오늘이 주인집 아들이 장가가서 신행오는 날이라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한 바탕의 소란이 있은 뒤, 다시 좁은 방안에는 조금 전의 그 우울이 밀려드는 쓸쓸함과 함께 내 마음을 침잠시키고 있었다. 목걸이가 어디 갔을까? 방문이 밖으로 잠겨져 있는 줄도 모르고 몇 일간이나 그림에만 열중하던 어떤 화가가 나중에 자기가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다가 그만 미쳐 죽어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듯이 늘 신경도 안 쓰고 걸고 다니던 목걸이, 이것의 부재(不在)는 내 마음을 한 길이나 철렁 내려앉게 했다. 베개도 없이 방 한 복판에 벌렁 누워 반쯤 열려진 창 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밖엔 차가운 주검 같은 긴 겨울밤이 시작되고 있고 스산한, 아니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창가에 걸려있는 달력을 이리저리 흔들어대고 있었다. 까닭 모를 조급함이 내려앉은 가슴 위로 덤벼드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먼 기억에서 우러나오는 끊임없는 그리움과 향수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있었다.
 내가 병신이 된 것이 어머니의 잘못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왜 어머니는 내가 병신이 된 것에 대한 죄의식과 자학으로 평생을 시달려야 했던가 하는 것은 더욱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랬다. 어머니는 언제나 비틀린 내 두 손과 두 다리를 어루만지며 "다 내 죄다"라고 울먹이곤 하셨던 것이다.

 이 이유 없는(최소한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머니의 죄의식은 나에 대한 무서운 열정과 보통 어머니가 흉내내지도 못할 뜨거운 사랑으로 변해갔다. 동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나 때문이라는 걸 안 것은 철이 들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이처럼 나에게만 무섭게 쏟아지던 어머니의 사랑은 목걸이로 인하여 내가 어머니의 분신이며 어머니의 모든 것이라는 사랑의 최고점으로까지 올라갔다. 마땅히 부를 말이 없어서 목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목걸이가 아니다.
 내가 6살 때였다고 한다. 그 때 나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아서인지 얼굴이 하얀 정도가 아니라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같이 창백했다. 올바로 앉아있지도 못하고 항상 누워서 지내는 처지에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등쳐 없고 이 병원, 저 병원, 유명한 안수쟁이가 왔다는 곳이면 어느 곳이던지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 목걸이를 걸어준 것도 어느 사이비 종교의 교주쯤일 거라고 생각된다. 나는 아직도 그 남자가 끝이 뾰족한 칼로 하얗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팔뚝을 찌르던 장면이 역력하다. 어머니는 뜻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무늬가 새겨진 고동 모양의 목걸이에 당신의 생피를 짜 넣으셨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목걸이만은 벗지 못하게 했다. 만약 갑갑해서 무심히 목걸이를 벗었을시엔 어머니는 평소와는 달리 마구 나를 때렸다. 그리고 꼭 내 손을 잡고 우셨다. 난 그 이유를 한참 동안이나 몰랐지만 어머니의 우는 모습이 싫어서 언제나 목걸이를 매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한시도 떼어낼 수 없는 손과 발이 되고 나의 의지와 용기의 원천이 되었듯이 목걸이도 이언 20여년간 잠깐이라도 떨어지지 않았었던 나의 수호신이었다. 그 목걸이에는 어머니의 피, 살을 찢는 고통이 담긴 당신의 뜨거운 사랑이 퍼득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 목걸이를 걸어준 날부터 새벽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크리스찬도 아니면서 두 손을 조심스레 모으는 기도,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해가 솟아오르고 있는 동녘 하늘을 향해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되풀이하는 모습은, 정말 지금 우리가 발견해 낸 언어로는 도저히 형용하기 어려운 성스러움과 숙연함 그리고 한으로 쌓여 있었다.

 그래서 새벽에 간혹 잠이 깨어도 나는 일부러 자는 척을 했던 것이다. 제삿날이나 명절 때도 어김없이 어머니는 상을 따로내어 조상님께 세 번씩 절을 하게끔 시켰다. 어머니의 이 정성은 초등학교 시절 아버님의 주검을 앞에 놓고서도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강해져만 갔다. 조그마한 한복 집을 운영하면서도 학교에 내내 수업이 끝날 때까지 변소 가는 일을 비롯하여 소풍 때조차도 나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어느 물리치료사에게 배운 물리치료 16가지 동작을, 어떤 아프고 바쁜 일이 있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었고 또 계속 일어서기 위해 넘어졌다. 그 때도 언제나 목걸이는 나의 목에서 나의 땀에 젖어 있었다.

 드디어 감격의 날이, 신(神)의 은총의 날은 왔다. 초등하교 6학년 어느 봄날, 세상에 빛을 보고는 처음으로 내 발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이다. 물론 두 개의 목발이 있어야 했지만…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기적의 날이라고까지 했었던 그 날, 틀림없이 어머니 생애 최고의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이 기적, 이 은총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사춘기, 무서운 사춘기가 나에게 절망과 자학과 그리고 죽음의 냄새를 병든 내 몸뚱아리 속으로 부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총각"하는 주인 아줌마의 쉰 목소리가 들리면서 방문이 열렸다. "총각, 이것 좀 먹어보소. 그리고 힘 좀 내. 참, 집세는 한달 간 말미를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힘없는 어중쭝한 대답을 하고 나서 받아든 쟁반에는 몇 가지 튀김과 떡이 따뜻한 열기와 함께 놓여있었다.

 역시 겨울이 다 되었구나. 이렇게 따뜻한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는 어릴적부터 여름보다 겨울을 더 좋아했다. 싸늘한 날씨 속에서 여름처럼 강렬하지도 않는,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 좋았고, 찬바람이 윙윙 부는 밤에는 뒤집어 쓴 두꺼운 이불의 그 포근함이나 그 온기 속에서 마음껏 상상, 아니 공상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유난히 땀이 많았었다. 다른 이들은, 어릴 때 보약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지만 사실은 나의 병 때문이다. 이 병마는 마치 심장에 박힌 조그마한 가시와도 같다. 어떤 일,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 가시는 내 심장을 내 온 몸뚱아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몇 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걷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호흡하는데 까지도 몇 배의 노력과 힘이 소모되어 버린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까지도 이런 상세한 사정을 몰라주는 것이 무척이나 원망스럽기도 했다. 여름에는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하곤 하지만 겨울에는 신경 쓸게 없다. 남들 보다 더 빨리 지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가 겨울을 좋아하지만, 나의 절망과 고통이 움추린 내 영혼을 찔러대는 시기도 역시 겨울이었다. 나의 그 무서운 사춘기! 그것의 시작도 낙엽이 다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난 자유롭고 싶었다. 자유, 그것은 불행히도 나에게만은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핏줄 속에 녹아서 온 몸을 마구 휘젖고 다니는 이 병마는 나를 아주 좁은 공간에, 제한된 사고 영역에 재촉해서 등교를 하고 저녁에도 또 가방을 든 어머니의 호위를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내일 등교 때까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있어야만 했다. 집 부근에 서성대봐야 따가운 주위의 눈길만 의식될 뿐 안나가느니보다 못한 것이었다. 정말 자유롭고 싶었다.
 남들처럼 뜀박질하고 공 차고 하는 그런 대단한 자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버스나 집어타고 아무 부담 없이 혼자서 시내 구경 한번 해볼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소망이었다. 하지만 이불을 덮어쓰고 몰래 울기는 하였지만 어머니에게는 절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 억눌리고 터져 버릴 것 같은 가슴은 "오늘은 살고 싶다."라고 시작되는 유치한 시로 승화되기도 하고 또 무서운 환상으로 밤마다 나를 괴롭히곤 했다. 마치 영화 "뿌리"의 한 장면처럼 날카로운 도끼로 내 발목을 내 손으로 찍어버리는…

 엉겁결에 잠이 깼다. 이제는 낡아서 고물이 다 되어버린 벽시계가 9시의 마지막 종을 힘겹게 치고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제 밖은 완전히 캄캄해졌다. 어느 집에선가 개 짖는 소리도 멀리서 들려왔다. 한 숨 잤는데도 왜 이리 피곤할까? 하기야 어제 필름이 간간이 끊어질 정도로 마셔댔으니, 그 친구와 같이 마셨으니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길 위에 아무렇게나 꼬꾸라져 있었을 텐데. 그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침에 심한 갈증 때문에 일어나 보니 "힘내라"라는 내용의 편지와 돈 8만원이 놓여져 있었다. 그 친구로서는 최대한의 우정의 표시였겠지. 순간, 혹시 그 친구가 내 목걸이에 대해 알고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친구가 모르더라도 이제 그 포장마차 집엘 가보면 혹시 알 수 있을지 모른다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또다시 얼마 전의 그 조급함과 급박함이 온통 나를 무겁게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앉아 쟁반의 떡을 하나 입에 집어넣고는 방문을 나섰다. 밖은 생각보다 날씨가 훨씬 추운 것 같았다. 하지만 목발을 짚었으니 손을 호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기에 차가운 손으로 목발 손잡이만 더욱 세게 움켜잡고, 방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주인집을 지나 대문을 나섰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어둡고 스산한 공간에 안개처럼 스며들어 골목길을 제법 밝히고 있었다. 한 쌍의 남녀가 팔장을 끼고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어두 침침한 길가를 눈으로 샅샅이 살펴보며 천천히 걸었다. 포장마차에서 줄곧 혹시나 목걸이가 떨어져 있지 않나 하는 마음에서 집까지 길을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그 친구에게도 목걸이는 없었다. 전에 한번 본 일은 있었지만 어제는 못 봤다고, 어제 없어진 것이 틀림없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한 열흘 전에 목욕탕에 갔을 때 분명히 목에 걸려져 있었다는 것 밖에는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고 간 돈에 대해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책망 비슷한 말과 그 우정에 찬사를 보냈고 그리고는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다라는 친구의 답변을 들은 뒤에 수화기를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포장마차를 향해 흔들흔들 걸어갔다. 소주 반병을 비우면서 주인에게 물어도 보고 또 그가 포장마차 안을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역시 목걸이는 없었다.
 약간 취기가 도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려진 주인집 현관문으로 새 신랑과 색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술상을 앞에 놓고 이제 정식으로 한바탕 놀아보려는 모양이었다. 색시는 별로 미인은 아닌 것 같았지만 키가 꽤 커 보였다.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당황해서 빨리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열린 창문을 닫고는 팔베게를 벤채로 벌렁 누웠다.

 나에게도 한 때는 아내가 있었다. 주인집 새 색시처럼 키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꽤나 미인이었다. 나의 결혼은 중매결혼도 연애결혼도 아니었다. 내 주제에 어찌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맞선을 본다 치더라도 나 같은 병신을 선택할 천사 같은, 아니 바보 같은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일들처럼 뚜렷한 대안을 세우시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저 당신이 살으실 동안 내 앞으로 1억원을 남겨주는 것이 소원이셨다. 한복 집을 계속하면서도 나에게는 집 근처 중학교 앞에 조그만한 서점 하나를 얻어 주셨다. 그리고 우리 모자 생계비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저금을 해서 내 앞으로 된 예금통장도 몇 개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결혼이었다. 내 나이 29살 되던, 그러니까 작년 봄이 시작되던 4월의 어느 날 어머니는 집에 한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 때부터 나는 그녀와 부부가 되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성의 냄새, 그것은 나에게는 신비함과 경이로움이었으며 마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병신 자식의 아내가 되어준 것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으로만 일관하셨던 것이다. 며느리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욱이, 사랑하는 내 아들 욱이가 올 봄에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믿음으로 변해 갔다. 또 하나의 자기의 분신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우리 욱이, 매일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마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불씨를 다루듯 하셨다. 그러나 욱이는 죽었다. 울음 한번 제대로 크게 울어보지도 못하고 할머니의 품안에 안겨 파르르 떨며 죽어갔다. 이 세상에 빛을 본지 5개월만에 욱이는 다시 저 암흑의 세계, 죽음의 공간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승과 저승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차이와도 같다는 말이 맞다면 우리 욱이는 나와 반대쪽 공간에서 할머니의 손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고집을 꺾고 조금만 일찍 병원에 갔었어도 살 수 있었을 텐데……. 병원에 대한 내 어릴 적의 불신감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한사코 병원을 거부했다.

 욱이가 죽은 후 몇 일간 아내와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아내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어머니는 좀 이상했다. 눈빛은 희미해졌고 계속 "다 내 죄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노인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러려니 하였지만 문제는 심각했다. 한 달이 지나도 차도는커녕 눈만 껌벅일 뿐 말을 못하셨다. 아내마저 우리 모자에게 빛더미만 안겨준 채 나가버리자 어머니는 더욱 슬픈 눈으로 허공만 응시하다 결국 돌아가셨다.  
 나쁜 년! 그렇지만 나는 아내를 욕하고 싶진 않다. 비록 내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탐내어 내 아내가 되어주었더라도, 그리고 어떤 놈과 눈이 맞아서 온 재산을 다 거머지고 도망가 버렸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연인이었고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나의 베아트리체, 나의 이브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비록 나를 진정으로 살랑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때문에 욱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넘어갈 정도로 통곡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녀는 나의 영원한 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한 그녀를 용서할 수는 없다. 반평생을 자식에 대한 죄의식으로 초인적인 사랑을 뿜어대던 그 뜨거운 가슴이 헐떡일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고 나에게서, 어머니에게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초췌한 셋방으로 이사오던 날도 여기 이 자리에서 어머니의 두 눈은 망연한 허공만 바라보고 계셨다. 그 후로 몇 일 뒤에 나에게 안타까운 한이 서린, 걱정 어린 눈빛만 한 번 반짝이고는 마지막 숨을 몰아 쉬셨다. 아, 어머니!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온 방안이 깜깜해졌다. 정전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누워있었다. 어둠이란 참 좋은 피난처다. 밝은 날에 빛의 요술에 걸린 육체와 영혼이 다시금 원래의 모습대로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않고 가만히 놔두어도 상관없으니까. 또 어둠은 죽음과도 같다. 어둠과 죽음, 그것들은 목숨이라고 붙어있는 생물에게는 원인 모를 두려움과 공포를 주지만 언젠가는 한 번은 가야 할 영혼의 안식처, 생의 피난처인 것이다. 지금의 이 어둠이 내일 새벽의 여명으로 잊혀지듯이 이 좁은 방안에 몰려있는 추위와 한기도 언젠가는 오고야 말 봄날의 다스한 햇살 아래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순간,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책상이 뿌옇게 보였다. 전기는 아직도 울 생각을 않고 있었다. 늘 보는 책상이 내 눈에 새삼스레 보인 것은 아까 목걸이를 찾아서 온 방을 헤멜 때 정작 눈에 잘 띄는 책상을 뒤질 생각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쫓긴 듯이 일어나 다락 계단에 있던 초를 하나 들고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불을 켰다. 촛불은 벽에 커다란 괴물 같은 그림자를 만들면서 밝게 타올랐다. 책상 맨 위의 서랍부터 열면서 구석구석 목걸이를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데에도 없었다. 까닭 모를 슬픔이 내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그런데 책상 제일 밑의 서랍에서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원고지 묶음 하나를 발견했다.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까만색 거플에 흰 글씨로 "동그라미"라는 넉자가 적혀 있었다. 참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10년 전 고등학교 시절에 내 시와 산문들을 모아놓은 문집이었다. 촛불을 더욱 가까이 해 놓고 첫 장을 넘겼다. 몇 개의 관념어만 나열되어 있는 시도 몇 편 있었고, 고독과 적막과 그리움을 내용으로 한 편지 형식의 산문도 보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히도 내 마음을 끄는, 잊혀졌던 먼 기억들이 다시 환생하는 듯한 짧은 글이 하나 맨 뒤에 붙어 있었다. 

겨울이야기 中
-詩人의 노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먼 옛날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조그만 마을에서 한 가난한 시인을 알게 되었답니다. 등에는 작은 하-프를 메고, 온갖 아름다운 들꽃들로 가득한 주머니를 허리에 찬-황량한 들을 노래하고 춤추며 떠도는 그런 집시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이 찾아들고 시인은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그 밝고 따스한 온기의 둥우리 안에서 그는 하-프를 켜며 노래를 불렀더랬죠.

 오, 생기 있는 삶이여!
 그대의 빛은 마귀 같은 검은 구름에 가리었구나.
 신선한 생명의 물을 찾는 목마른 손은 가벼이 떨리고
 찬란하던 두 눈도 비정(非情)의 문(門)을 닫았으니 내 生도 끝이로다.
 노래 소리는 엷게 퍼져 가는 동그라미를 그리며 차가운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둠을 바삭바삭 기어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어쩌면 자신의 생명일지도 모르는 들꽃들을 하나씩 하나씩 화염 속으로 던져 넣었답니다. 모닥불은 더욱 많은 열기와 밝음을 시인의 주위에 깔아놓은 것이죠.
 가거라, 가거라 내 인생이여!
 들판의 온갖 먼지를 마셔버린 나의 여윈 심장을 안고
 돌아오라, 돌아오라 내 영혼이여!
 먼 훗날 눈부신 태양의 빛 아래
 새로 태어날 시인의 분신을 갖고.
그는 하-프를 부등켜 안고 눈물 흘리며 잠이 들었답니다. 
 드디어 아침이 오고, 시인은 본성이 집시였기에 더 먼 들을 찾아 떠나갔습니다. 작은 하-프만 남겨둔 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모닥불에 자신의 몸을 던져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새 생명을 얻은 것이죠.
 지금 그 사람의 모습은 잊었지만 그 생명의 들꽃, 새 생명의 모닥불,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던 하-프 소리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아-, 신라의 밤-이여"
 흥겨운 노랫소리가 주인집에서 제법 크게 들려왔다. 나는 책상 위에 그만 엎드려 버렸다. 이제 내 가슴에는 목걸이의 상실감도, 그것을 찾아야겠다는 조급함도, 그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안의 벽에는 여전히 커다란 괴물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촛불은 하얀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어둠은 사르고 있었다. 또 흥겨운 노랫소리에 그 장단을 맞추는 젓가락 소리가 유난히 내 영혼을 꿰뚫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글/장수호

 

작성자장수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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