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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동정은 싫다 <제3장> 청각장애는 또 하나의 문제다 (2)

본문

[번역연재] 미국 장애우 운동사


동정은 싫다(8)

제3장 청각장애는 또 하나의 문화다

 (The Deaf Celebration of Separate Culture)

 

 

  세계의 장애우 관련법 중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법이 바로 미국의 ADA(장애를 가진 미국인을 위한 법)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ADA가 제정되기까지 미국 내 장애우들이 펼친 장애우 운동을 기록한 운동사이다.

 

 

  저자 : 조셉 피 쉐피로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

    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

   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잃어버린 언어, 잃어버린 문화


  미국 마사 지역의 바인야드에 최초의 청각장애우 조나단 램버트가 정착한 것은 1694년이었다.

  그는 청각장애에 대해서 열성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립된 섬인지라 주민들 사이의 근친결혼에 의해서 청각장애의 특질이 다음 세대로 계속 퍼져 나갔다.

  19세기 중반 칠마크 같은 곳에서는 25명 중에 한 명이 청각장애우였다. 그 비율은 네 가구중 한 가구에 한 명의 청각장애우가 있을 정도였다. 노라엘렌 그로스라는 인류학자의 책「여기의 모든 사람들은 수화로 이야기한다.」에 의하면, 그 결과로 청각장애우와 건청인의 문화의 융화가 일어날 수가 있었다.

  이렇게 많은 청각장애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사회의 모든 성원들은 가족 중에 청각장애우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수화사용법을 배웠다. 그 결과 수화는 단지 청각장애우들만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배타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건청인인 어부들도 멀리 있는 배의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 수화를 사용하였고, 심지어 교회에서 조용히 얘기할 때도 수화가 사용되었다. 만약 건청인들끼리 이야기하다 한 명의 청각장애우가 끼게 되면 그들은 즉시 모두 수화로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 청각장애주민이 1952년에 죽은 지 35년 후 언어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샤크가 이 곳을 방문했는데, 나이가 많은 건청인들은 다른 이웃들과 이야기를 하고 의사소통을 할 때 여전히 수화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고령의 90세가 넘은 한 노인은 생각에 잠길 때도 수화로 생각하고 수화로 혼잣말을 하며, 심지어 수화로 꿈을 꾸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었고, 사회적인 벽도 없었다. 청각장애우들은 정치에서부터 교회일까지 모든 일들에 광범위하게 참여하였고, 청각장애우와 건청인들은 비슷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청각장애우나 건청인이나 별다를 차이 없이 80%정도가 결혼을 했다. (19세기 당시 전체 청각장애우 중 45% 정도만이 결혼을 하고 있었다) 또 청각장애우와 건청인 주민들은 평균적으로 6명의 아이들을 두고 있었으며, 같은 일자리에서 비슷한 임금을 받고 있었고, 카드놀이나 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청각장애우들이 더 많은 교육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메사추세츠주에서는 정부가 10년 간의 교육비를 지급했는데, 대부분의 청각장애우들은 이러한 모든 교육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반면 건청인 형제 자매들은 때때로 일찍 학교에서 나와 물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지었다. "덜 교육받은 건청인들이 신문이나 법률적인 문서들을 그들의 청각장애우 이웃에게 가지고 와서 설명을 청하기도 하였다"고 그로스는 적고 있다. 그러나 1800년대 중반에 근친끼리의 결혼이 적어지면서 차츰 청각장애우들의 출생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 마사의 바인야드는 19세기 청각장애우들의 일종의 유토피아였으며, 오히려 청각장애우가 아닌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사회였다. 이 지역 건청인 주민들은 대부분 일반 언어와 수화 두 가지를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다. 마사의 바인야드의 관대한 분위기가 미국 전역에서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19세기의 청각장애우들이 수화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실이 이해되는 분위기였다.

 

 

갈라데의 발견과 모험적인 제안

 

  청각장애우들 사이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교육자는 토마스 홉킨스 갈라데였다. 1813년 어느 날 갈라데는 이웃의 한 소녀가 다른 아이들과 그의 정원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소녀 엘리스 코스웰은 열병으로 인해 6년 전에 청각장애를 갖게 되었는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엘리스는 새침한 듯 했고 수줍음이 많았다.

  그러던 중 갈라데는 코스웰의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청각장애아동들을 위한 학교가 미국에는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몇몇 부유한 부모들만이 새롭고 흥미로운 교수법이 개발되고 있는 유럽으로 그들의 청각장애자녀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갈라데는 코스웰의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아 청각장애우를 위한 교사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데리고 오는 일에 착수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첫번째로 영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토마스 브레이드우드 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청각장애우들이 건청인처럼 말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구화법을 전문으로 하는 여러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라데와 브레이드우드와의 협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점적인 권리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존 브레이드우드는 이미 미국에서 학교를 설립하려고 착수하였다.

  실망한 갈라데는 프랑스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1755년에 설립된, 수화를 개발하고 있는 청각장애학교에 갔다. 이곳에서 만난 레빼는 청각장애우들은 그들 자신의 의사소통 체계가 있고,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수화의 프랑스 문법을 엮고 있다고 설명했다. 갈라데가 로렝 클랙이라는 젊은 청각장애 교사를 만난 것이 바로 이 학교에서였다. 클렉은 학교를 벗어나서 거의 여행을 해보지 않았지만, 일종의 모험과 같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1816년 미국으로 돌아오는 52일간의 여정에서 클렉은 갈라데에게 수화를, 갈라데는 클렉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들은 함께 돈을 모아 1817년 하트포트에 청각장애우를 위한 보호시설을 미국에 설립하였다.

  엘리스 코스웰은 이것의 첫번째 학생이었다. 교사들은 능숙한 수화사용자였으며, 대부분은 그들 자신이 청각장애우였다. 수화를 교육시키는 일종의 모험을 통하여, 청각장애우들의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뚜렷하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하트포드의 사례를 모델로 삼아 전국에 다른 학교들도 설립되었다.

  1864년 의회는 워싱턴에 청각장애우와 시각장애우를 위한 콜롬비아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청각장애우를 위한 첫번째 고등교육기관이다. 갈라데의 막내아들이자 유명한 교육자였던 에드워드 마이너 갈라데는 청각장애우를 위한 청각장애교사를 양성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하도록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을 설득하였고, 그는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후에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재명명하게 된다). 이 교육기관에서는 모든 과정에 수화가 사용되었다.

 

 

수화교육에 대한 구화 옹호자들의 반격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러한 수화교수방법에 반대하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백만장자인 가디너 그린 휴배드는 1867년에 청각장애우를 위한 클라크 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딸 마벨이 5살 때 성홍열에 걸려서 청각장애우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마벨이 자신의 음성을 유지하도록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고용했다. 구화법에 대한 휴배드의 믿음은 두 명의 훌륭한 교육자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한 명은 첫번째 맹학교인 퍼킨수 교육기관을 설립한 사무엘 그리들리 휴였는데, 그는 시각과 청각 중복장애우인 로라 브리그만을 교육시키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얻고 있었다. 휴와 교육자 호라스만은 구화법을 교육시키는데 중요한 성공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유럽의 학교를 방문한 뒤 미국으로 돌아와서 수화법을 구화법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클라크 학교의 교사 중의 한 명이 전화를 발명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알렉산더 그라함 벨이다.

  그는 에딘버그에서 태어났으며, 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언어와 발성법 교수과정을 거친 바 있다.

  1873년에 26세의 벨은 마벨 휴배드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것은 아주 우연한 만남이었다. 가디너 그린 휴배드는 특허대리인으로서 전보와 전화에 대한 벨의 실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6년에 휴배드는 벨이 전화에 대한 첫번째 특허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벨과 마벨 휴배드는 그 후 결국 결혼하였다. 벨의 일대기를 보면 그가 전화를 발명한 이유가 마벨 휴배드가 집안의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기계로 말미암아 청각장애우들은 의사소통 뿐만 아니라 일자리, 그리고 건청인의 세계의 많은 것들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었다.

  구화법은 그 시대의 체제 순응적인 분위기에 잘 맞아 떨어졌다. 빅토리아 시대는 소수의 문화에 대해서 엄격했다. 영어는 인도에서 식민통치 관리에 사용되는 언어가 되었다. 심지어 영어를 사용할 때 몸짓을 함께 사용하는 것조차도 알맞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수화의 역사를 쓴 아르덴 나이저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적고 있었다. "제스처를 하는 것은 이탈리아 사람, 유태인,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의 저급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들 인격의 미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화는 강력한 인종의 의미를 함축하는 코드 문자이다. 언어는 신이 부여한 것으로, 동물들과 사람들을 구분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에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면, 우리는 악마를 찬양하는 것이다."

 

 

구화법의 역작용

 

  이러한 모든 것들은, 청각장애가 병이고 고쳐질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구화법은 이에 대한 교정에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대일로 교육받아야 하는 노력이 많이 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와 비교해서 수화는 한 번에 많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누군가가 구화법에 성공하였다면 그의 능력은 경외심을 일으키게 할 만한 것이고, 그의 장애는 거의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불행히도 벨의 부인은 많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결코 훌륭한 구화자가 되지는 못했다. 벨 자신의 가족이 그 방법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화법은 19세기 동안에 퍼져 나갔다.

  1880년대 이 구화법은 보편적인 교육방법으로 채택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1970년에 초기까지 미국의 교육자들은 이 방법을 채택하였다. 청각장애우들이 말하고 입술을 읽음으로써, 건청인의 문화에서 언어를 사용하도록 가르쳤다. 청각장애학생들은 들리는 세계의 이미지에 의해서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무능력은 교정한 필요가 있는 단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수화는 조잡한 속어로 인식되게 되었다. 언어학자들은 이것이 사고를 하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데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구화법을 완전히 습득하는 청각장애우들은 거의 없었다. 이미 언어를 습득한 다음에 청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나 혹은 보청기를 통하면 어느 정도 들리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되었다.

  물론 구화법을 배운 사람들은 쉽게 건청인과 청각장애우의 세계 사이를 넘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입술을 읽는 것은 너무나 습득하기가 힘든 기술이었다. "이것은 기름으로 걸작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청각장애교육자인 레오야곱은 쓰고 있다. "말하고 읽는 재능은 지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심지어 최상의 조건에서도 단지 30% 정도만을 입술의 움직임을 통하여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구화사용자들은 분명하게 그들의 입술을 움직일 때만이 말하고 읽을 수 있으며, 심지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나 혹은 좋은 불빛 아래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 "나는 첫번째 만난 사람인 경우에는 50%도 못알아듣는다. 그러나 친숙할 경우에는 75-80%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시카고선 타임즈의 편집자이면서 구화에 능숙한 헨리 키서는 말한다. "아마도 10% 정도의 사람들의 경우는 내가 아무리 해도 입술을 읽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키서는 그의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1850년대까지 수화를 배웠던 청각 장애학생들은 다른 건청인들처럼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교사들이 구화법을 가르치는 것을 주장한 이후로 청각장애학생들의 학문적인 성취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많은 청각장애우들은 읽고 쓸 수가 없게 되었으며, 이것은 다음 세기까지 이어졌다. 1972년에 갈라데대학의 연구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8살의 청각장애고등학교 졸업생들의 평균 능력은 초등학교 4학년 수준밖에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부터 이렇게 낮은 학문적 성취도에 대한 경고는 교육자들이 새로운 교수방법을 찾도록 했다.

  1966년도에 개발된 수화와 수화를 조합한 "큐드 스피치"(Cued Speech)는 입 근처에 14가지의 손 모양을 덧붙임으로써 발음된 때 입 모양이 비슷한 것들을 구별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두 사람이 이것을 모두 알 때만 유용한 것이었다.

  1970년대에 대부분의 교사들은 말과 수화를 혼합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은 구화법이 언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작은 돌파구였다. 많은 종합적인 의사소통의 형태들이 있어왔는데 이것들은 모두다 구화법처럼, 주로 말의 사용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심콘이라는 한 가지 방법은 교사들이 말과 수화를 비슷하게 하는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언어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즉 이것은 말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수화를 영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 문법체계가 있다. 수화는 말을 배우기 전이나 혹은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자였던 사람들만이 소유하는, 본질적으로 분리된 언어이다. 모둔 나라에 있는 청각장애우들은 그들 자신의 수화를 가지고 있다. 미국 수화는 프랑스 수화와 다르고 심지어 영국 수화와도 다르다. 남부지방의 흑인 청각장애우들은 백인들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수화를 발전시켜왔다.

 

 

속어가 되어버린 농식 수화

 

  1970년대가 되어서야 농아식 수화는 언어학자에 의해서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이것이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언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청각장애아이들의 뇌는 수화를 받아들이게 구조화되어 있으며, 이것을 먼저 우는 것이 나중에 영어 배우는 것을 더 쉽게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수화지지자들은 이와 함께 영어를 배워서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청각장애부모들에게서 태어나 자연적으로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수화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배우게 된다. 청각장애아들이 수화를 처음으로 배우고 발전시키게 되는 시기가 10개월쯤 되었을 때라고 언어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이것은 건청인인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배우게 되는 때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5살의 수화사용자는 약 5천 개의 단어의 어휘를 알게 되는데, 이것은 5살의 건청인 아이와 거의 같은 것이다.

  그러나 90% 이상의 청각장애아동이 건청인 부모를 가지고 있는데, 때때로 50개 이하의 어휘력만을 가지고 학교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한 조사결과에 따라 몇몇의 연구자들은 모든 학령기의 아이들에게 농식 수화를 가르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농식 수화는 청각장애학생들에게 거의 교육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일반 영어문법에 체계를 둔 건청인식 수화를 가르치고 있다.

  첫번째 이유는 청각장애학생들이 건청인의 문화에서 주고 쓰이는 언어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단순히 실용적인 이유에서이다. 대부분의 청각장애학교의 교사들은 건청인이며, 영어가 그들의 본래의 언어이다. 따라서 농식 수화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은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교사들에게 아주 커다란 부담이 된다. 그러나 또한 농식 수화를 그들의 모국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학생들에게 이것은 역시 부담이 된다.

  1880년 밀란회의 이래로 90여 년 동안 수화의 사용이 미국 학교에서 금지되었다. 이것을 어기는 학생들은 그들이 손을 묶기도 하였다. 1869년에는 전체 교사 중 41%를 차지하게 되었던 청각장애우 교사들은 학교에서 쫓겨나기 시작하였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25%로 줄어들었다. 1960년대에는 12%만 남아있게 되었다. 갈라데만 유일하게 남아있었으나, 이곳의 교사들도 농식 수화를 사용하기를 멈추고 건식 수화를 사용하게 되었다. 농식 수화는 이제 속어가 되었다.(계속)

 

글/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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