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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을 물이 온 하늘로 흐릅니다. 그맘때쯤이면 언제나 굴뚝새가 굴뚝 위로 삐쫑삐쫑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더욱 붉어져 손으로 건들기만 하면 주르르 붉은 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습니다. 굴뚝새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창포물을 퍼온 할머니도 하늘을 보며 넋을 놓았고, 뒤안에 핀 붓꽃과 해당화 꽃도 할머니를 닮아갑니다. 굴뚝새만 보면 장난스럽게 짖던 평돌이도 하늘을 보고요, 유경이도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올려다봅니다.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들이 그 순간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셈이지요. 저런 하늘을 보고 마음이 고와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땅 위에 피는 꽃은 모두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하늘이 꼭 진달래전 같구나. 저렇게 붉으니…"
 "참말로… 할무니, 나 진달래전 먹고 싶어요."
 진달래전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경이는 할머니 옆으로 바짝 다가갔어요. 할머니는 가늘게 눈을 쪼프리더니
 "아이고, 내 강아지… 오냐, 담에 해줄게."
 하고 은비녀를 풀어 황토 흙으로 발라진 가마솥 걸린 아궁이 위에다 놓았습니다. 바쁜 농사철에만 불을 때는 가마솥 뒤에는 달개비꽃들이 종알거리다가 입을 다물었지요. 유경이가 양볼을 찡그리며 앙탈을 부렸기 때문이랍니다.
 "싫어요, 지금 먹고 싶어요."
 "아이고, 내 강아지… 지금 여름이라 진달래꽃이 없어서 못하는 것여. 자자, 담에 할무니가 꼭 해줄게."
 할머니의 머리가 길게 풀어집니다. 은비녀에 말아졌을 때와는 너무도 달랐지요. 머리카락이 얼굴까지 가려버리자 무섭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개울가에서 베어온 창포 잎과 뿌리를 삶은 물 속으로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들어갔습니다.   
 "할무니아, 담에 꼭 해줘야 돼요. 꼬옥, 꼬옥."
 유경이는 앉은걸음으로 저도 모르게 무서웠던 것이지요.
 "암, 꼭 해주고 말고…"
 "할무니이, 으응… 그런데 왜 창포물로 머리감아요?"
 몇 번이나 입안에서 맴돌던 말입니다. 그 말에 할머니는 얼른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감아쥐면서 유경이를 힐끗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의 얼굴은 꼭 달님 같았습니다.
 "오냐, 내 강아지… 부처님한테 갈려고 그러지. 창포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단다. 옛날에는 단오날 창포물로 머리감고 놀았거든. 우리 강아지도 감어야제. 그래야 부처님이 우리강아지 소원 들어주시는 것요."
 순간적으로 유경이는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가락지나비 한 마리가 남새밭에서 넘어오더니 유경이를 보고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평돌이는 어쩌구요. 유경이를 따라서 더욱 빠르게 돌았습니다.
 "원 녀석도… 저렇게 좋을까."
 어느새 할머니는 머리를 다 감고서 유경이를 쳐다봅니다.
 유경이도 창폿물로 머리를 감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도 하늘은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붉은 사발꽃잎으로 덮인 듯했습니다. 치자꽃빛 치마차림인 할머니는 무척 빨랐습니다. 할머니 고무신에 눌린 질경이풀이 안쓰러워 유경이는 일부러 피해갑니다. 절은 마을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진달래꽃이 가장 흐드러지게 피는 삿갓 봉을 넘어가면 자그마한 기와집이 나옵니다. 바로 그 집이 절입니다. 몇 번 할머니 따라 와본 적이 있는지라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키가 할머니 만한 스님이 도라지 밭에서 일하다가 마중 나왔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잘 지내셨어요. 스님? 초팔일에도 너무 바빠서 못 오고 이제사 왔습니다."
 "괜찮습니다, 보살님. 어서 오시지요. 모내기는…?"
 "예, 겨우 끝냈지요."
 유경이도 할머니를 따라서 서툴게 합장을 했습니다. 하늘에 덮힌 붉은 댕기를 누군가 거두워가자 성급한 별이 떠오릅니다. 별만 보면 쇠별꽃이 생각납니다. 할머니는 특히 꽃 이야기를 자상하게 해주었거든요. 달맞이꽃, 도라지꽃, 할미꽃, 동백꽃… 이야기 없는 꽃이 없다면서요.
 "자, 우리 꼬마 보살님도…"
 스님이 쇠별꽃 닮은 웃음으로 이렇게 하라고 절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이미 할머니는 몇 번이나 공들여서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경이는 엉거주춤 따라서 하다가 부처님의 얼굴을 쳐다보았지요.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오늘만은 어리광부리고 싶었답니다. 유경이는 부처님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안녕하세요? 제 소원 좀 들어주세요. 울 엄마는 언제 오나여? 울엄마가 보고 싶어요. 울 엄마 돌아오게 해주세요…"

2.
 감꽃이 툭툭 소리내면서 떨어집니다. 깨진 장독대 사이로 노오란 새우란이 피어났습니다. 작년 여름에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팔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마을 버스 정류장 뒤에 있는 벼락맞은 당산나무도 도시사람들이 파간다고 했습니다. 도시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농촌사람들도 버리는, 디들방아며, 절굿대, 도리깨, 소 구수통 같은 것까지 서로 아웅다웅하며 사가거든요. 그때마다 할머니는 무척 슬픈 눈빛을 지었습니다. 유경이는 그런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감꽃을 실에다 꿰었습니다. 아침해보다 일찍 일어나서 밭에 나간 할머니가 돌아옵니다. 유경이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손에는 도화지와 크레용이 들려 있었습니다.
 "우리 강아지, 빨리 일어났구나."
 "할무니, 왜 이제 와요. 기다렸는데…"
 "원 녀석도, 할무니가 어디 가아? 다 큰 것이 이래?"
 "할무니가 좋으니까요."
 평돌이가 달려와서 유경이 얼굴을 혀로 핥았습니다. 평돌이는 온몸이 이슬에 촉촉이 적셔 있었습니다.
 "어휴, 더러워. 평돌아, 저리 가."
 그래도 평돌이는 꼬리치며 더욱 극성스럽게 뛰어오릅니다. 그쯤 되자 유경이도 평돌이의 하얀 배를 긁어주면서 장난치다가 후다닥 뒤안으로 도망칩니다.
 "원 녀석도…"
 환하게 웃던 할머니는 남새밭으로 들어가더니, 이슬이 가득 찬 고무신을 무 잎에다 털었습니다. 어느새 할머니 키만큼 웃자란 접시꽃이 살랑살랑 머리를 흔들며 아침인사를 했습니다. 살금살금 남새밭으로 들어온 유경이가 할머니 앞으로 갔습니다.
 "할무니이…"
 "오냐,  내 강아지… 왜?"
 "…"
 "허허, 운동화 사달라고? 아암, 사주지. 이 채소만 팔면…"
 할머니는 유경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웃었지요. 그러나 유경이는 고개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머루알처럼 까만 눈동자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팠지요.
 "할무니이, 에젯밤에 할려다가… 그만 까먹었는데요…"
 "허허, 왜?"
 유경이가 시무룩해지자 할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어서 말 해봐. 또 학교에서 누가 놀려?"
 "아아니, 할무니이… 선생님이… 으응, 선생님이… 할무니 발을 그려 오랬어요. 할무니 발을…"
 "뭐, 할무니 발을? 원 이상한 선생님도 다 있네."
 "할무니이, 어서 발을 씻어요."
 찔끔 눈물이 터진 유경이 손등으로 눈시울을 문질렀습니다.
 "그래야, 할무니가 고생하는 것을 안다면서…"
 "원, 별난 선생님도 다 있구나."
 그제서 할머니는 얼른 우물가로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흙물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발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었고요. 할머니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더니 자꾸만 발을 내려다보았지요. 유경이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뭐라고 중얼거리기만 했습니다.
 "자, 어서 그리거라."
 "할무니이, 이렇게 해요."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할머니가 도화지에다 발을 올렸습니다. 크레용으로 할머니의 발을 그리는 유경이는 자꾸만 눈물이 나왔습니다. 할머니의 발은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거든요. 농약병에 갈리진 발바닥, 가시에 찔리고, 떨어져나간 발톱… 선생님이 미워졌습니다. 왜 이런 숙제를 시켰는지요. 그 날 유경이는 할머니의 발을 그린 도화지를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3.
 남새밭 울타리 너머로 접시꽃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접시꽃을 칭칭 감고 올라온 나팔꽃도 매일 인사를 했지만 할머니는 시무룩했습니다. 아침마다 이슬을 털어 키운 채소는 모두 꽃을 피웠지요. 꽃 중에도 제일 슬픈 꽃이 장다리꽃입니다. 피워서는 안될 꽃이기 때문이지요. 할머니는 채소를 하나도 팔지 못했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그 장다리꽃 아래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계절은 빠르게 변해갑니다. 여름 꽃이 지고 가을꽃이 만발해갑니다. 할머니는 가을꽃이 최고로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봄과 여름을 이겨내고 차거운 서리를 맞으며 피기 때문이라고요.
 모시나비가 구절초를 찾아 날아다니는 길로 유경이는 종종 걸어갑니다. 파란하늘에는 잠자리 떼가 놀고 있었지요.

방울방울 방울새야
어디에서 울고 있니

 절로절로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등에 멘 가방이 철렁거립니다. 스머프가 그려진 가방입니다.
 "훠어히! 훠어히!"
 어디선가 새 쫓는 소리가 귀에서 울려 퍼집니다. 꼭 할머니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물론 할머니는 아니었지요. 할머니는 너무도 바빠서 새를 쫓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유경이는 새를 쫓기 위해서 일찍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유경아, 깨금 따먹으로 가자."
 "안돼. 나는 논에 가서 새를 봐야 해."
 그렇게 돌아서는 유경이 마음을 동무들은 알 수 없었어요.
 "나는 일하기 싫은데, 재는 이상해."
 "그러게 말야."
 동무들이 손가락질하며 돌아섰지요.
 그때마다 유경이는 입술을 굳게 다물 뿐입니다.
 "나도 놀고 싶어. 하지만 고생하시는 할머니가 불쌍해서 그래."
 유경이는 할머니의 발을 떠올리며 걸어옵니다.
 읍내로 가는 넓은 도로가 끝없이 보였습니다. 바로 엄마가 가서 오지 않는 길입니다. 트레일러들이 도로로 무섭게 달려갑니다. 가만히 있으며 날아가 버릴 것만 같습니다.
 "유경아. 이리 오너라."
 누군가 유경이를 불렀습니다. 네잎 클로바를 따들고 있던 유경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지요. 컴바인이 멈춰선 논에서 이웃집 꺽다리 삼촌이 손짓했어요. 그러나 유경이는 못 들은 척 걸어갑니다. 어른들 앞에 간다는 것이 자꾸만 챙피해집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엄마 있을 때보다도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알았지야, 내 강아지… 그래야, 호로자식이란 말을 안 듣지." 
 그때마다 유경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고개를 끄덕거렸지요. 그러면 할머니는 측은한지 그만 혀를 끌끌 차대고야 말았습니다. 중얼거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이젠 알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눈치만 보다보니 어른들 속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할지 원. 차라리 과원에 보내는 편이 낫지. 거기서는 고등학교까지 가르쳐 준다던데요. 할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어요?"
 "그러게요. 유경이 아빠가 농촌에서 살려고 일부러 도시에서 결혼하여 유경이를 낳아서 왔다던데… 아무도 안 살고 죄 없는 자식만 남았군요."
 어른들은 일을 하면서 은밀하게 주고받았지요. 유경이 눈치를 보면서요. 그런데도 유경이는 어른들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어른들은 아빠보다 엄마를 욕했습니다. 유경이는 아빠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너무도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엄마를 욕하는 어른들이 미워집니다.
 "우리 엄마를 욕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는 꼭 돌아올 거예요."
 유경이는 어른들의 동정 어린 눈빛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 앞에 가기 싫어했던 것입니다.
 다시 논두렁에서 어른들이 불렀습니다. 새참을 먹고 있었거든요. 그럴수록 유경이는 얼굴이 확 달아오릅니다. 유경이는 얼른 벼논 속으로 숨었습니다.
 "허허, 이 녀석이… 금방 어디로 갔구먼. 쯧쯧, 저 불쌍한 것을 어째… 하늘도 무심하지. 노인네 혼자 여름내 농사지은 고추마저 똥끔이니… 하늘도 무심하지."

"뭘요, 농민은 문둥이보다 못한 세상인데요."
 어른들은 담배만 피우면서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하늘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만은 유경이 눈에도 하늘은 거짓말쟁이로 보였습니다.

4.
 유경이는 어른들 눈에 띄지 않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거의 엉금엉금 기어서 왔습니다. 벼 이삭이 팔이 긁혀 피가 났지만 뒤안에 있는 피막이풀 잎을 따서 붙였어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평돌이가 무척 반겼습니다. 유경이는 두 손으로 평돌이의 발을 들어주었지요.
 "평돌아, 늦게 와서 미안해. 동네 어른들을 피해 오느라고… 나는 어른들이 싫어. 나만 보면 맨날 혀를 끌끌끌 차거든."
 토방 아래 있는 평돌이 밥그릇 속에는 파리들이 우글우글 거립니다. 유경이는 방으로 들어갑니다. 부엌문 앞에 밥상이 신문지로 덮여 있었지요.
 유경이는 그 밥을 평돌이에게 주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할머니에게 들키면 혼이 납니다. 그래서 모르게 주어야 합니다.
 "아이고, 내 강아지야… 아무리 농민이 천대 당해도 쌀을 함부로 버리면 못 쓴다. 쌀이 없으면 다 죽지. 지금은 빵을 먹으니까 살 것 같지만 두고 봐라. 언젠가는 쌀 때문에 난리가 날 테니까."
 평돌이에게 밥을 주면 할머니는 언제나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 말도 가끔씩 의심이 갔지요. 왜냐하면 동무들도 밥보다 빵을 좋아했고, 텔레비전에서도 빵 선전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평돌이한테 쌀밥을 주면 안돼요? 다 우리 식구인데요."
 유경이가 그렇게 말을 해도 소용없었어요.
 "내 강아지, 할무니도 안다만… 있을 때일수록 아껴야지. 개는 사람하고 다르단다. 그러니까 쉰밥이나 먹으면 됐지."
 할머니가 그때만큼은 야박하게 느껴졌습니다.
 곧 유경이는 대나무를 들고 논으로 나갑니다. 물론 그 논도 다른 사람 네 것이지요. 유경이네는 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경이네가 전혀 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잘 살지는 못했어도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의 논은 있었지요. 유경이 아버지는 그 논을 팔아서 소를 샀습니다. 그러나 쫄딱 망했고, 다시 돈을 벌기 위해 탄광으로 갔답니다. 그러나 유경이가 네 살 되던 해에 사고로 돌아가셨지요. 그 다음해 유채 꽃이 온 들녘을 덮던 계절, 엄마도 돈벌겠다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싫어, 엄마 가지 마."
 "어허, 엄마가 돈 많이 벌어서 온데도."
 "싫어, 유경이만 떼 놓고 갈려고?"
 "어허, 엄마가 돈 많이 벌어서 온데도."
 그러나 아무리 가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언제 엄마가 와요?"
 "응, 백밤만 자면."
 "지난번에도 백밤만 자면 온다고 해놓고는요…"
 "그랬던가. 내 강아지, 오냐오냐 곧 오시지."
 할머니는 눈을 감으며 나직하게 말했지요. 유경이는 이제 할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리고 할머니 앞에서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도 끄집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할머니의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에요.
 참새 떼가 유경이 눈치를 보면서 내려앉았습니다.
 유경이는 팔짝팔짝 뛰면서 뛰어다닙니다.

5.
 다시 밀물처럼 노을이 밀려옵니다. 기적소리도 들렸습니다.
 유경이는 멍하니 서서 기적소리가 울리는 쪽을 바라다봅니다. 금방이라도 엄마가
 "유경아!"하고 부르며 달려올 것만 같습니다. 이때가 유경이는 제일 엄마생각이 났습니다. 유경이는 탱자나무 아래 쪼그려 앉았습니다 탱자나무 아래는 유경이가 소꿉놀이하던 사발 깨진 것들이 있었지요. 유경이는 혼자서 소꿉놀이를 합니다 노오란 탱자가 김치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보던 평돌이도 유경이가 말할 때마다 꼬리를 쳤습니다. 토방 아래 있는 평돌 위해서 잠을 잔다고 하여 할머니는 평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요. 유경이도 평돌이란 이름이 좋았고요.
 "이것은 할무니밥… 이것은 할무니밥, 이것은 평돌이 밥."
 유경이 눈에는 할머니랑 엄마가 둘러앉아 밥 먹는 착각 속에 빠져듭니다.
 어디선가 수들이 몇 번이나 울었지요. 날이 어두워졌다는 뜻입니다. 가을이라선지 해는 점점 짧아졌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옵니다. 제법 차가운 바람입니다.
 "평돌아, 왜 할무니가 돌아오시지 않을까?"
 그리고는 평돌이 목을 끌어안았지요.
 이웃집 꺽다리 삼촌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유경아, 너 왜 삼촌이 불러도 그냥 갔니? 이 녀석아, 삼촌이 부르면 와야지. 할무니는…?"
 걱정 어린 눈빛을 지었습니다.
 유경이는 힘없이 머리를 떨구었습니다.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그래에, 어딜 가셨길래 아직도 안 돌아오셨지. 밭에 마중 나가 봐라."
 꺽다리 삼촌이 크게 헛기침을 하면서 갔습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평돌아, 할무니한테 가 보자."
 평돌이가 있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틀림없이 삿갓봉 비탈길에 있을 것입니다. 할머니와 절에 갈때마다 가는 길이지만 자꾸만 눈동자가 커집니다. 수풀도 많이 우거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덤들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입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삿갓봉 비탈에 있는 밭은 이제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오직 할머니만이 고집스럽게 농사짓고 있을 뿐입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저마다 행복하게 종알종알 거립니다.
 평돌이는 신바람난 듯 돌아다닙니다.
 유경이는 평돌이가 조금만 보이지 않아도 크게 불렀습니다. 그때마다 평돌이는 긴 혀를 낼름거리며 어느새 다가옵니다. 어린아이를 보면 홀려서 잡아먹는다는 여우가 나타난다고 해도 평돌이는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국화꽃이 만발해 있습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꽃을 보니 가던 길도 멈추어집니다. 국화꽃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유경이는 그만 깜짝 놀라서 뒤로 나자빠집니다. 국화꽃 옆 땅솔나무 속에서 후다닥 산토끼가 뛰쳐나갔던 것입니다. 평돌이는 마구 짖어대면서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이내 포기하고 뒤돌아옵니다.
 "평돌아, 그러면 못 써. 산토끼도 놀랐을 거야."
 고추밭까지 갔지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무니이! 할무니이!"
 유경이는 손나발을 하면서 할머니를 불렀습니다. 이제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습니다.
 "할무니이! 할무니이!"
 유경이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평돌이가 월월월 짖어대면서 달려갔습니다. 밭머리 끝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왔습니다.
 "내 강아지, 오내오냐아…"
 평소보다 작은 할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할무니이!"
 유경이는 할머니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오냐오냐, 내 강아지… 집에 있지 왜 왔능고?"
 할머니의 손이 유경이 얼굴을 만졌습니다. 눈물이 주르르 타 내렸습니다. 할머니는 이상하게도 허리를 웅크리고 가만가만 걸었습니다.
 "할무니, 왜 그래요?"
 "아녀, 허리가 좀 아파서."
 "할무니, 아프면 안돼요. 할무니이…"
 그러나 할머니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어요.
 "할무니이!"
 "괜찮어, 조금만 쉬면…"
 할머니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꺽다리 삼촌이 오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지요.
 "엎으세요. 할머니, 그러게 삿갓봉에 있는 밭은 벌지 말라니까요."
 "이 사람아, 땅이 있는데 곡식을 심지 않으면 쓰는가?"
 "원 할머니도, 누가 농사꾼을 알아줍니까?"
 "그래도, 그래도… 누가 알아줘서 농사짓나."
 꺽다리 삼촌의 등에 엎힌 할머니는 오래오래 삿갓봉을 뒤돌아보았답니다. <계속>

글/이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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