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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의 이어가기 글]사랑 그 짓궂은이야기(4) 해방때

본문

사랑 그 짓궂은 이야기 <4> 해방 때
박용수
1934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나 장시 「바람소리」로 <嶺文>誌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으며 자유실천문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주통일운동연합을 거쳐 현재는
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으로 우리말 되살리기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바람소리」와 사진집「민중의 길」,
「우리말 갈래사전」,「겨레말 갈래 큰사전」등이 있다.

<군소리>
 독자 여러분.
 새해맞이 즐거웠습니까?
 지난 해 세안인 12월 11일, 정립회관에서 "함께 걸음 여섯돌잔치"가 치워졌기에 우리식 나이로 따지자면 일곱 살이 된 셈인데 한 달도 안되어 새해를 맞아 또 한 살을 더 먹었으니 이제 여덟 살짜리가 되었군요.
 여덟 살이면 엄마의 치마꼬리를 잡고 졸랑거리는 철부지 버릇을 벗고 학교라는 새로운 사회를 익혀야 하는 교육의 의무를 지게 되는 나이이죠. 말하자면 어엿한 독립체로서의 인격이 확보된다는 뜻인데 사람의 온누리를 걸치어 처음 겪게 되는 커다란 변혁기입니다.
 이 여덟 살짜리 함께걸음과 함께 걸어가야 할 우리들 또한 응석으로 세상만사를 해결하려는 철부지 버릇을 벗어던지고 스스로에 변혁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런데 가만히 보자니 함께걸음의 집안꼴이 영 싹수가 노랗습니다.
 뭐냐하면 무슨 전생의 인연인지 "성재돌림"이 어울린 김성재, 이성재라는 이사장 소장이 철 아닌 늦바람이 들어서 한 친구는 영국으로 또 한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이랍시고 작당해 도주해버린 뒤라 우선 집안에 주인이 없지, 하루아침에 고아신세가 되어버린 젊은 식구들 솜씨를 보자면 "변혁" 따위는 생심도 말자는 수준이니 세상 일이란 나이 먹는다고 자라는 그런 어수룩함이 없는 까닭입니다.
 "함께걸음" 형편이 이 꼴이라 어차피 우리네 이웃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울력을 내어야 기둥이 뿌리채 뽑히는 "집안 망하는 꼴"을 면케 되지 않을까,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각설이가 당신네들 대문칸을 기웃거리며 "새해는 복 많이 받으슈" 따위 인사치레란 여간 염치없는 짓거리가 아닌 게 자명해집니다. 우선 새해에 무슨 복 무슨 복하는 어벙한 꿈을 접어두어야 되겠군요.
 꿈은 좀 뒷날로 미뤄두고 우선은 보다 많은 이웃들이 "함께걸음"에 울력을 낼 두레를 모아 땀 흘려야죠. 이웃에, 이웃의 이웃에, 이웃의 이웃의 그 이웃 사람까지 함께걸음으로 발을 맞추어 가는 "독자몰이사업"(이런 사나운 말버릇을 탓하지 마슈)에 땀흘려야죠. 간단하게 말하자면 독자배가운동이 됩니다마는, 아무래도 책은 읽히기 바라서 만들게 마련이고 그 책에 글을 싣는 사람들도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자기 글을 읽어주기 바랄 게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함께걸음"을 읽어준다면 이게 오붓한 복이 아니고 무어겠습니까. 그러므로 새해의 복은 좀 있다가 받아도 좋을 것이고 나 역시 복덩이 하나는 기대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왜냐면 "사랑, 그 짓궂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많아진다는 이치니까 말이죠. 이런 경우를 두고 "눈 감고 아웅한다"지만 뭐 이쯤의 욕심이야 하느님도 웃고 눈감아 주리라 믿어지기에 사제님을 찾아 고백소에 들어가는 수고까지는 할 필요가 없어뵙니다.
 군소리는 이쯤 해두고,
1
 그러면 내 나이 여덟 살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그 시절은 1940년대 들머리, 일정시대인데 당시의 나라 안팎이 어떤 꼴이냐하면 동서양에 걸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등 연합국과 독일, 이태리, 일본 등 추축국이 얼키고 설켜 이른바 반파시즘전쟁이 일어난 제 2차 세계대전의 초기였다.
 1931년 9월, 아시아 대륙의 광대한 동북지방을 침략하기 시작한 일본은 33년에 만수국을 세우고 청나라의 마지막 왕 "부의"를 꼭두각시로 앉힌 뒤 중국공략을 꾀하던 끝에 "루꼬우치 사건"을 일으켜 북경과 청진을 강점하고 상해까지 먹는다. 그러고도 식성이 차지 않아 광동에서 서산에 이르는 남부 10개 성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하고 1940년 9월에는 인도지나 북부까지 진출하던 그런 시기였다.
 이 때가 내 나이 여덟 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인도지나 반도 점거의 전리품인 천연고무로 놀잇감 공을 만들어서는 우리 같은 두메 초등학교 아동에게까지 하나씩 나우어 주던 일이다. 기껏해야 새끼를 둥글게 감은 것을 공이라고 차고 놀던 시절에 하얗고 말랑말랑하며 맨발로 차도 발가락이 아프지 않은 고무공을 얻었으니, 우리는 마냥 신바람이 나서 "덴노헤이까반사이! 반사이"를 외치며 천황폐하의 은덕에 만만세를 불렀으니 아무리 철떡서니없는 아이들이기로 이런 지경이었을까? 한심하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 아니던가.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얇은 고무공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구멍이 나고 찢겨 더 이상 놀이감 구실을 못할 때쯤해서 우리는 고무공 하나의 값어치가 얼마나 비싼지를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라면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애여린 철부지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억지로라도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른바 "국민개병운동"은 초등학교 1학년짜리에게도 군사교육의 멍에를 씌웠다.
 군사교육이라면 무슨 전쟁놀이쯤으로 짐작할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은 요즘 아이들의 소견머리이겠고, 우리는 철저한 군사교육의 기초과정인 행진 훈련부터 밟아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 1학년짜리들은 덮어놓고 걸었다.
 "하낫 둘, 하낫 둘"
 단조한 구령을 외치며 무르팍이 가슴에 탁탁 부딧치는 솟을걸음으로 운동장을 오고가던가, 때로는 신작로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행진에 행신인데, 워낙에 엄격한 훈련이라 코흘리개들이라고 무슨 응석부리나 꾀보짓을 할 여지는 아예없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입과 이에 대응한 영국, 프랑스의 대독일 선전으로 비롯된 제 2차 세계대전을 독일, 이태리와 동맹관계이던 일본의 남양진공과 1941년 12월 11일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까지 치닫던 때였다.
 여름이면 맨발로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어서 신작로의 험한 길을 행진하다 보면 돌부리에 채여 발가락이 깨지기 일쑤이지, 재수가 없으면 사금파리도 밟게 되어 발바닥이 찢겨지지만 절뚝거릴 망정 행진 대열에서 낙오하는 일은 생심도 못했다.
 시련은 사람을 기른다. 사랑이라고는 바늘끝을 꽂을 여지도 없는 식민지교육의 혹독한 단련밑에서 우리는 부지런하게 어른이 되어갔다.
 1941년 8월 1일부터 일본에 대한 미국의 석유수출금지로 기름이 바닥난 일본은 모자라는 기름을 조달키 위해서 주로 우리네 초등학교 아동들을 산판으로 몰아넣어 관솔을 따게 했다.
 관설이란 송진이 많아 엉킨 소나무 가지나 옹이를 일컫는데, 관솔을 찌면 흘러나오는 시커먼 기름이 석유보다 우수하여 주로 비행기기름으로 쓴다니 이 일도 전쟁의 한 마당임에 틀립이 없다. 전쟁이기에 그 작업은 위험했다.
 소나무 옹이란 여간 딱딱치가 않아 도끼가 아니면 떼어 낼 도리가 없는 터에 초등학교 1학년짜리들이 도끼를 휘둘러 관솔을 따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자칫 헛손질이라도 하게 되면 다쳐도 크게 다치게 마련이지만 어린이라고 해서 사랑을 베풀 그런 일제는 아니었으니.
 그렇더라도 산에 소나무인들 많이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민둥산에 띄엄띄엄 서 있는 것은 다박솔뿐이고. 다박솔을 상대로 종일토록 도끼를 휘둘러보아야 목표량을 채우기는 어림없었다. 해걸음이 되면 별 수 없이 관솔가마니를 지고 학교로 가지만 게으름뱅이들이라고 닦달하는 체벌을 또 어찌 면하랴.
 요즘 젊은이들은 일본 것이라면 덮어놓고 머리꼴이라든가 옷가지가 단숨에 서울로 건너와 젊은이의 몸맵시를 감싼다지만., 우리 세대의 정서속에는 일본의 그 차디찬 사랑에 대한 치떨리는 미움이 옹이처럼 야무지게 붙박힌 채 쉰 해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 풀릴 줄 모르니 이런 사실을 젊은 세대는 짐작이라도 할까.

2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며……" 예수의 말씀이야 지당하지. 그러나 일제의 정떨어지는 교육환경은 결코 사랑일 수는 없었던 것. 그 비정의 세월 속에서 우리는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며……해방의 날을 기다렸다.
 3학년 대의 일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청소당번으로 쳐졌던 몇몇 동무들과 현관 밖에 놓인 신발장에 올라가 왁자하게 떠들고 놀다가 교장에게 들키고 말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무렵에도 목소리가 컸던 내가 한 말을 일인 교장이 들었던 듯,
 "무어무어라 한 학생 이리 와!"
 교장은 나를 손가락질하며 눈을 바라렸다. 누구 앞이라고 꽁무니를 빼랴. 쥐꼴이 되어 호랑이 앞에 나섰더니,
 "학생이 조선말을 쓰면 되느냐? 너도 학생이냐?"고 물어 엉겁결에,
 "네"했더니 밥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후려친다는 말은 때린다는, 스승이 제자를 체벌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그야말로 패는 짓이어서 뺨 한 대는 나뒹굴고 말았다. 얼굴 한 쪽이 하늘로 날아가 버린 듯 얼얼해서 미쳐 "잘못했습니다"를 못하고 일어나 멍청히 서 있으니 이번에는 딴추를 걸어 넘어뜨리며 "곤칙쇼, 조센징"이 아닌가.
 교장 말대로 내 비록 "조센징"이긴 해도 그대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내선일체며 황국신민으로 한 뿌리를 강조하는 터에 제자를 상대로 이런 험한 욕설을 내뱉을 수 있는가.
 나는 너무 억울했다. 교장에게 밉보인 일이 억울했다. 평생 처음 호되게 맞아 보는 손찌검이 억울했다. 학교가 보이지 않은 구빗길을 돌아서서야 동무들이 나를 위로 한답시고 "집에 가걸랑 일러라"고 했지만 그러자면 교장 가족과도 척이 진 공산이 크므로 더욱 억울했다.
 나는 흔히 "과수원집 아들"이라고 불리워졌다. 우리집에 과수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동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과수원이 학교와 비교적 가깝기도 하고 해서 여름이면 교장 여편네가 자주 놀러왔다. 이런날이면 내가 집안 사람과 교장 여편네 사이에서 일본어 통역을 맡게 된다.
 교장을 혼내주지 않을까 하는 동무들의 기대였지만 나는 집에 가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 까닭은 교장 여편네가 늘 데리고 다니는 딸 때문이었다.
 "무슨꼬, 무슨꼬" 이래서 이름 끝자가 "꼬"임은 기억되나 무슨 꼬인지 까맣게ㅔ 잊어버린 그 계집애는 자기 에미를 닮아 살결이 곱고 특히 눈이 컸다. 교장 여편네의 눈이 유난히 커서 우리끼리는 "왕방울"이라 몰래 별명을 지어 불렀는데 그 큰 눈으로 잔뜩 흘겨보면 교장이 쩔쩔 매는 꼴을 여러 번 본 일이 있어서 "통역관"을 매질한 교장쯤은 충분히 혼내 줄 수 있겠지만 내가 교장에게 매 맞은 사실을 "무슨꼬"가 알아서는 도무지 체통이 깨지는 일이라 끝내 그 사건은 덮어두고 말았다.
 소꼽동무, 뒷집의 막딸이 따위와는 견주어 볼 도리가 없는 살결과 그 동그란 눈동자가 교장에 맞은 억울함까지 따둑거려 주었으니 어쩌랴. 그러나 내가 "무슨꼬"에 대한 순정을 곱게 다듬어 나간 데는 딱 한 가지 기특한 까닭이 있어서였다.
 두메의 가수나이들은 워낙 입성이 험해서 치마 밑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나다니기 일쑤이다. 그러니 보지 않을래야 아니 볼 수 없어 계집애의 온갖 것을 다 보며 자랐지만 "무슨꼬"는 허벅지에 고무줄이 든 속옷을 입고 있어 "일본애의 그것이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호기심을 더욱 가슴떨게 돋구기만 할 뿐 도무지 나의 응큼한 속내를 풀어 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수원 외진 구석으로 꼬실려서 "사리마다"를 벗겨 볼 도리는 없는일. "무슨꼬"는 언제나 왕방울의 치마꼬리만 잡고 맴돌았으니까.
 교장에게 얻어맞은 다음다음 해에 "무슨꼬"는 우리 학교 1학년이 되었다. 나는 어엿한 5학년. 5학년으로 진급되고 부터의 군사훈련은 그 강도가 더욱 높아져서 목총 교육을 받는다.
 개머리판을 비롯해서 소총을 본떠 다듬고 총신부분을 유난히 길게 뽑은 나무 끝에 주먹같은 고무씌우개를 박은 목총으로 두 사람이 한 짝이 되어 "얏, 얏" 기압을 넣으며 상대자의 가슴을 노려 찌르는, 일종의 총검술 훈련인데 자칫명치라도 찔리면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어서 되도록 센 놈과 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단 하나의 요행으로 매일 같이 "얏, 얏" 훈련을 받았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은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지던 시절이다. 한낮에도 B-29가 하얀 구름꼬리를 끌면서 까마득한 하늘로 지나가고 그때마다 사이렌이 울고, 우리는 질겁을 해서 방공호 속으로 곤두박질치곤했지만 다만 지나다닐 뿐 소이탄 하나 떨어뜨리지 않았다.

3
 여름방학, 방학이라지만 학교수업 대신 노역으로 피체되는 고달픈 여름살이의 시작인 1945년 여름방학, 할 일은 많았다. 퇴비용 풀베기, 각자가 한 뙈기씩 개간한 밭의 작물 돌보기, 여름이면 사흘거리로 놀러 오는 교장 여편네의 통역관 노릇하며 "무슨꼬"의 치마밑 궁금증에 대한 끝모를 호기심 가꾸기, 이래저래 나에게는 여름방학이 한해 가운데 가장 바쁜 철이었다.
 "무슨꼬"는 1학년이 된 뒤로는 왕방울의 치마꼬리도 놓았고, 이따금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해서 이번 여름방학 동안 어떻든지 호기심을 풀고 말리라고 벌렸으나 방학이 한 중간이 되어도 교장 여편네는 놀러 오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정자나무 밑에 모이는 마을 노인들의 이야깃거리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B-29가 태연히 날아다니는 것만 해도 그랬다. B-29를 떨어뜨렸다는 소식 대신에 "사이빤"이 떨어졌느니 "후이릿삔"(필리핀의 일본식 발음)에서 밀려났느니 하는 소리만 나지나직 들려 올 뿐, 교장이 아침마다 "가미가제 독고다이"가 미국의 항공모함을 격침시켜 하늘에 떠오른 비행기들이 바다 속으로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느니 하는 자랑이 확인될 수 없는 뜬소문으로 맴돌기만 하던 어느 날, "해방"이란다.
 해방이란다.
 해방이라니 해방이 도대체 뭐냐?
 비록 철이 들었다고는 하더라도 우리 또래들이 모여 앉아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봐야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아 안달을 하던 해방은 교장 사택에서 비로소 확인케 되었으니, 그때는 8·15가 지난지도 몇일 뒷날인 8월 하순께였다.
 일인 교장이 도망을 쳤다는, 도무지 ale을 수 없는 소문을 확인케 위해 학교로 달려갔을 때 교장도 왕방울도 "무슨꼬"도 없는 빈 집에 해방이 와 있었다.
 전교생이 당번제로 털고 쓸고 닦아서 언제 보아도 깨끗하던 집안이 도깨비가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간 듯이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잡풀한 자랄 틈을 주지 않고 알뜰히 가꾸던 화단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고운 꽃떨기를 짓누른 채 너부러져 있지 않나. 문짝이 떨어져 휑뎅그렁하게 들여다 보이는 안방은 다다미를 들어낸 시커먼 마루청에 옷가지며 온갖 잡살뱅이가 나뒹굴고, 그 위를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뭔가 부지런히 주머니에 챙겨넣곤 했다.
 "마쓰야마(나의 창씨성이다)! 너도 좀 챙겨라!"
 뭣을 챙기라는 말인가. 왕방울의 옷가지인가 "무슨꼬"의 장난감인가.
 "해방이다. 마쓰야마. 왜 그리 멍청히 섰냐?"
 그렇다. 해방이다. 해방은 분명 여기에 와 있는데, 그렇더라도 기껏 교장 사택을 집뒤짐으로 확인해야 하는 해방일까.
 나는 해방에 귀뺨을 후려맞은 듯 정신이 얼얼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작성자박용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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