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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사랑은 몸으로 하는 게 아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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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몸으로 하는 게 아니래
최영자

지체 1급 장애인인 영은은 컴퓨터와 라디오, 전화기를 벗하며 방안에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여자였다.
 책상 앞엔 AM이나 FM을 합쳐서 열 개가 넘는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 순서 시간표와 각 방송국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벽에 붙어 있고, 책상 서랍 속엔 언제든지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엽서와 우표 편지지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영은은 이렇게 방송 내용에 맞춰 글을 투고 하거나 퀴즈응모에 당첨해서 받은 여러 가지 선물들을 자신이 사귀는 여러 장애우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이런 일은 방송에 참여한다는 자긍심과 사은품을 받는 기쁨, 그리고 또 사귀는 장애우들에게 받은 선물을 다시 나누어 주는 기쁨까지 얻을 수 있어서 그야말로 일석삼조였고, 또 전파를 통해 여러 가지 축하 사연을 띄우기도 하여 방송을 누구보다도 잘 활용하여 문화생활을 즐기는 영은이었다.
 영은이 라디오 방송을 듣지 않는 시간에는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마주한지 5년이 되었지만 전문가들이 활용하는 그래픽이나 프로그래밍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고, 주로 워드프로세서를 활용한 타이핑과 글로 편지 쓰기나 일기 쓰기, 가끔씩 하늘이 재빛으로 물들어 눈물이 나는 날엔 눈물 방울들을 시와 소설로 아름답게 승화시키기도 했다. 이런 영은이가 무엇보다 가장 즐기는 시간은 PC통신인 하이텔의 대화방에서 동병상련의 장애우들과 허심탄회하게 달작지근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그래서 비가 오는 밤이면 새벽가지, 아니 밤을 새우면서까지도 키보드에 매달리는 때도 있었다.
 영은이에겐 사귀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전화도 많이 왔다. 그래서 영은이 방엔 가족들과는 따로 쓰는 시간을 제재를 받지 않는 전용 전화기까지 놓여 있다.
  낭랑하면서도 따뜻한 정이 담기 듯한 영은이의 목소리는 영은이의 인간성 못지않게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사랑의 목소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하이텔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루에도 몇 통씩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
 영은이의 어머니는 전화요금이 아무리 많이 나와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는다.
영은이가 항상 밝게 살고 있는 것이 컴퓨터와 라디오, 전화를 이용해서 자신의 장애를 비관하거나 좌절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사귀며 의욕넘치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가고 잇는 모습을 보며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 못지 않게 거의 매일 우체부 아저씨가 영은이 집을 다녀갈 정도로 편지도 많이 왔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들에게서 오는 편지와 몇군데 정기 구독을 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부쳐오는 책이라든가 또 영은이가 가입하고 있는 여러 협회에서 오는 공문도 많았고 방송국에서 보내오는 등기편지도 섞여 있었다. 그래서 영은이 집에 편지가 올 시간인 낮 12시쯤이면 시계를 자주 보게 되고 문틈으로 앞 마당 감나무 아래 편지가 떨어져 있을 지점을 훑어보곤 하거나 도어 폰 소리만 나도 "도장요!" 하는 배달부 아저씨의 목소리를 기다리게 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에 영은이 혼자서 집을 보고 있었을 때 클레멘타인 멜로디로 도어 폰이 올렸다. 배달 아저씨가 올 시간이어서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영은은 재빨리 도어 폰 버턴을 누른 후 등기 우편물을 수치할 도장을 쥐고 마루로 부지런히 몸을 끌고 나갔다. 그러나 배달부 아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마당 안을 둘러봐도 인기척은 없었다. 덜컥 겁이 났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대문을 향해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영은씨를 찾아왔는데요."
 담을 넘어온 목소리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확실히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영은은 신체적 결점을 내 보이는 것을 가장 싫어했으므로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집을 초대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무슨 일로 찾아왔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슬비를 맞으며 찾아온 사람을 영은이가 없으니 그냥 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누구신데요? 들오오세요."
 초조하고 불안스런 마음이었지만 일단 들어오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저 부산에서 온 김경진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경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에 놀라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영은이가 사귀는 남자 중에서 유일하게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자란 경진이기도 해서 기다리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반가운 만남이었다. 영은은 경진과 처음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에 보조개가 쏘옥 들어가도록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웃깃에 묻은 빗방울을 털고 난 경진이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출근해서 무심코 달력을 보았더니 오늘이 친구 집에 놀러가서 『솟대문학』(장애인 문인들의 작품이 실리는 계간 문예지)에 실린 영은이의 시를 읽게 된 지 꼭 2주년이 되는 날이더군. 이토록 뜻깊은 날을 그냥 지나가기엔 왠지 섭섭하더라. 그동안 영은이와 주고받은 편지와 전화 그리고 PC통신에 실렸던 사연들이 어느새 내 마음 속에서 사랑으로 피어났나봐. 좋은 선물도 많이 보내주곤 했던 영은이가 갑자기 보고싶어서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달려왔어. 영은이 집은 동사무소에 가 물어서 찾아왔고."
 "이렇게 갑작스레 만나고 보니......"
 영은은 재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쩌면 수줍어서가 아니라 경진의 당당하고 잘 생긴 외모 앞에 영은의 가냘픈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졌는지도 모른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 우린 마음을 터 놓은 사이 아니니?"
 "하지만......"
 영은은 편지에서는 스스럼없이 온갖 위트와 유모어를 나열하며 재치있게 말장난도 잘 쳤고, 전화에다 대고 수다스럽도록 아양도 떨곤하는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막상 경진과 처음으로 마주앉고 보니 낯을 가리는 아이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은 제대로 입을 열지를 못하고 굳어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영은이의 손에 경진이가 들고 온 꽃다발을 쥐어주었다.
 "우리 만남이 2주년이라 장미 두 송이를 살까 했는데 너무나 조촐한 것 같아서 영은이 나이 만큼인 스물다섯 송이를 샀어."
 예쁜 포장지로 싸서 보라색 리본으로 손잡이를 묶은 진분홍 장미 스물다섯 송이는 햐얀 안개꽃에 섞여서 경진의 얼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평생에 처음으로 장미꽃 선물을 받게 된 영은이 황홀하도록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영은이, 사랑해!"
 경진이 눈빛을 빤짝이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안돼요!"
 영은이 고개를 저으며 뻗고 있는 야윈 다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이유가 뭐지?"
 영은의 손을 잡으며 경진이 다시 물었다.
 "동정을 사랑이라 말하지 말아요. 전 사랑같은 건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거든요.
독신으로 살면서 나보다 더 외롭고 슬픈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저의 소망이에요."
 "영은이가 뭐라고 부정하려 들어도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거야. 우린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영은이를 안아줄 수도 있고 업어줄 수도 있어.
내년에 우리 만남의 3주년이 되는 날엔 내가 영은이를 업고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갈 거야. 그리고 세상을 향해 소리칠거야. 지영은이는 내 사랑이라고......"
 "그건 나에게 고통을 주는 거지 진정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에요."
 "영은아!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게 아니래! 난 성실하게 삶을 개척해 가는 아름답고 숭고한 영은이의 마음을 사랑하는 것 뿐이야."
 경진이의 말 끝에 영은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맺혔던 이슬이 한 방울 한 방울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을 때 영은의 가녀린 손에 실반지 하나가 끼워졌다.
 영은은 어느 새 행복한 여자로 변했다.
 소설에서나 읽을 수 있었고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영은이 생애에는 결코 찾아올 것 같지 않았던 행복을 경진이가 갖다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하듯 소리 없이 내리던 이슬비가 멎었을 때, 장미꽃처럼 진하고 향기로운 사랑을 전한 경진이 영은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진은 부산으로 가는 예약한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하쉬움 깃든 얼굴로 영은이 곁을 떠나갔다.
 영은에게 사랑을 안겨 준 가을날에 경징의 포근한 마음 같은 장미꽃들에 얼굴을 파묻고 낮 꿈을 꾸듯 눈을 감은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던 영은이가 어둠이 깃들 무렵에야 설레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신나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저는 오늘 난생 처음으로 한 아름의 장미꽃을 선물 받았어요. 그리고 그이는 이렇게 속삭였어요.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게 아니래"라고…… 저의 가슴 속을 눈물로 젖게 한 이 기쁨을 두리하나 모든 회원들과 나누고 싶어요."
 잠시 후 영은이의 전화기가 급하게 울렸고, 영은이가 들다가 떨어뜨린 수화기에서는 자고 가느다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호프인 영은이가 남자의 말 한마디에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언젠가 영은이가 말했었지? 우리끼리 서로를 감싸안고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자고……"


 

작성자최영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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