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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문익환 목사 추모 특집2]추모의 글 그게 사랑 아니겠니?

본문

                           

 

                             그게 사랑 아니겠니?
 지난 1월 18일 심장마비로 타계한 늦봄 문익환 목사는 한 평생 통일조국의 그날을 위해 가시밭길을 걸었던 "통일의 선구자"이며 "겨레의 큰 어른"이었습니다. 통일의 그날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문익환 목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스스로 "장애우"라고 고백했던 문익환 목사의 짧은 만남에 대한 기록으로 사백만 장애우의 애틋한 마음을 전합니다.
전흥윤 (함께걸음 기자)

 "얘, 이것도 다 하느님 뜻인가 보다."
 90년 봄 방북사건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 어머니 장례식 문제로 가석방 된 문익환 목사님은 강연을 마치고 약속장소인 세종문화회관 그릴에서 두툼한 함께걸음 합본호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 동안 두 어 차례 "큰 어른"의 글을 받기 위해 편지를 띄운 일은 있었지만 직접 만나기는 이날이 처음이어서 잔뜩 긴장을 했던 나는 이말 한마디에 마치 오랜만에 집안의 큰 어른을 뵙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짙은 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구두를 신은 문목사님은 거뭇거뭇한 검버섯과 흰머리 그리고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살을 감안하더라도 칠십이 넘은 나이와 오랜 감옥생활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힘차고 밝은 표정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고민하는 나에게 문목사님은 출감 이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국의 대학을 돌아다니며 통일문제 강연을 하고 다닌다고 스스로 말씀하시면서 "이 나이에 내가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힘이 뭔지 아니?" 하고 물었다.
 "글쎄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어물어물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목사님은 다소 쉰 듯한 목소리로 "그게 사랑 아니겠니?"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함께걸음에 꼭 한번 목사님의 글을 실어보리라"고 단단히 벼르고 첫 만남에 나섰던 나는 이렇게 해서 서서히 긴장이 허물어지면서 목사님이 펼치는 "통일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목사님은 자신이 장애우와의 만남을 "하느님의 뜻"이라고까지 추켜세운 이유에 대해 "내가 사실은 한쪽 귀가 안 들리는 장애자잖아"라고 마치 커다란 비밀을 털어놓듯 스스로 "장애우"임을 고백했다.
 목사님은 또 당시 우리 사무실이 있던 사당동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딸이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한번 "하느님의 뜻"을 되뇌이셨다.
 방북혐의로 수감돼 전국 교도소를 떠도느라 몸이 퉁퉁 부을 정도로 고생했지만 전주교도소의 생수 덕분에 오히려 건강을 되찾았다며 내게도 현미밥과 생수를 먹으라고 몇 번씩이나 당부하기도 했다.
 이날 목사님은 통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뜬금없는 "현미" "생수"에 관한 얘기를 해 나를 당황케 했는데 끝내는 "기"에 관한 얘기까지 나와 한동안 무협지(?)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목사님은 성경 얘기를 들면서 예수의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나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기"가 충만했던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요즘은 손끝까지 기운이 꽉 차 있는 느낌"이라고 자신만만함을 드러냈다.
 목사님은 또 조그맣게 잘라 손등과 손목 언저리에 붙이신 파스조각을 가리키며 사람 몸의 각종 "혈"에다 파스를 조그맣게 잘라 붙이면 아주 효험이 좋다고 말씀하시더니 급기야 아직은 쓸만한(?) 내 오른쪽 다리를 "한번 보자"고 하시며 이리저리 만져보고 나서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는 폭탄선언(?)까지 하셨다.
 당돌한 글 부탁에 "응, 내 꼭 써 줄게." 흔쾌히 승낙하신 목사님은 하필이면 그날따라 점심값 조차 없어 쩔쩔매는 내게 "점심 먹었니?"하고 물어보고는 장국밥까지 사는 바람에 가뜩이나 어려운 자리에 비지땀을 흘리던 내 얼굴을 더욱 화끈하게 만들었다.
 한 시간 남짓 짧고도 긴 만남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목사님을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해 드렸는데 무거운 합본호를 세권씩이나 드신 채 젊은이들보다 더 빠르고 힘찬 걸음으로 휘적휘적 앞서 나가셨다.
 그 후 문목사님은 가석방 기간 중 너무 정열적(?)으로 활동하신 탓에 다시 수감돼 함께걸음과의 글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하셨다.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통일운동 대중조직인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의 회원 명부를 몇 장 받아 주위사람들에게 돌리는 정도로 무심히 지내던 지난해 말 췌장암과 싸우고 있는 김남주 시인을 기념하는 "문학의 밤"에서였다.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열린 이날 문학의 밤 행사에서 목사님은 특유의 크고 힘찬 필체로 "일어서라 남주야, 통일맞이 함께 가자"라고 써 붙인 격문 아래서 어둡고 답답한 표정으로 두 손 모아 기도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1994년 1월 18일 밤 8시 20분 한평생 지고 왔던 통일의 십자가를 조용히 내리고 반쪼가리 조국땅에 흙 한줌으로 돌아가셨다.
 

당신을 묻으며 나는
당신의 대타로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오
높아만 가는 저 담장 너머로
당신의 눈 같은 마음
홈런으로 날리려고…
-시 "장준하" 중 일부-

작성자전흥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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