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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의 이어가기 글]사랑 그 짓궂은 이야기 (6) 산사람

본문

사랑 그 짓궂은 이야기 (6)

산사람
1
 두메사람들에게는 산이 삶의 터전이다. 두메 사람들은 산을 떠나서 살기를 바랄 수 없다.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봄이면 하다못해 송기라도 벗겨야 태산보다 높다는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고, 멀건 보리죽에 풋것이라도 섞으려면 취나물을 뜯어야 했다.
 어른들이 먹고 살기 위해 산에 오른다면 우리 또래는 군것질거리를 찾기 위해 사철 내내 산을 헤맨다.
 군것질거리라면 마을에도 지천으로 흩어져 있지만 모두가 한철뿐인 것들. 살구가 그렇고 자두가 그렇고 서리꾼의 몫인 원두밭이 그렇고 감이 그렇고 밤이 그렇다. 바람이 불어서 살구가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도 간지럽고 두 눈에 불을 켜고 두리번거리는 심통할배가 잠들기 기다려 참외서리를 하기도 초라하다. 더구나 홍시가 익어 떨어지기를 바라며 손가락을 입에 물고 감나무 밑을 서성댄다는 것도 도무지 몰골이 좋지 못하다. 하다못해 떡칡 한 토막이라도 호주머니에 들어 있어야 속이 든든했으니, 우리는 철을 가리지 않고 산을 오르내렸다.
 응달에 채 녹지 않은 눈이 히끗히끗 남아 있는 이른 봄날의 칡캐기를 마수거리로 삼으면 늦가을에 뽈똥(보리수나무 열매의 우리 고장말)을 흝어먹기까지 봄내 여름내 가으내 우리는 산을 찾았고 산은 넉넉한 사랑으로 군것질거리를 나눠주었다.
 그러나 나는 군것질도 군것질이지만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재미로 산을 찾았다. 골짜기나 기슭에는 물칡뿐이고 산꼭대기에 가까운 비럭밭이라야 떡칡을 캘 수 있다는 것은 나만 아는 사실이 아니지만 여름동안 눈여겨 둔 비럭 사이의 칡을 부리나케 캐고는 곧장 꼭대기로 올라가 칡을 씹으면 먼 산을 바라보는 재미를 동무들이야 짐작인들 하랴.
 "용수 wi는 무시기로 알궂다. 축구등산매로 맨날 저런델 앉아만 있구만."
 "부잣집 자슥 아니가. 배가 불러서 그럿체. 내비라둬라."
 아직 쌀쌀한 이른 봄인데도 속것도 입지 않은 막딸이며 분님이들이 알궁둥이를 하늘로 쳐든 채 비럭밭에 머리를 곤두박고 쌕쌕거리며 칡을 캐다 말고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묻어왔지만 대꾸삼아 욕질을 하기보다는 산 너머 멀리 바라보이는 하얀 강줄기에 넋을 주는 것이 좋구나.
 나무 한 포기 없는 민둥민둥한 산들이 막딸이의 한 궁둥이처럼 동실동실 솟은 그 너머로 하얀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모래밭을 가르며 푸른 강물이 구비친다. 두메에서 태어난 뒤로 아직 바깥세상을 구경 못한 나는 강을 모른다. 넓은 물길이래야 기껏 아랫동네 앞의 냇물이 고작이었지.
 산골짜기에서 물길이 생기면 "골개"를 이루고 골개가 모이면 "개울"이 된다. 개울이 모이면 "도랑"이 되고 도랑이 모여 이루는 줄기가 "시내"이다. 시내는 또 몇 갈래의 시내와 개울을 받아들여 내를 이루는데 냇물은 흐름이 느리면서도 깊다. 내가 천천히 흘러서 들어가는 곳이 가람이다. 가람은 많은 내를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넓어져 강이 되는 것이다.
 곧, 골개   개울   도랑   시내   내   가람   강, 그리고 강은 바다로 흘러든다. 이 흐름형태는 곳에 따라 달라져 중간 중간이 없는 경우도 있고 골개나 개울이 곧장 강으로 흘러드는 곳도 있을 것이나 대개의 흐름은 이 과정을 거친다.
 땅에서 솟아난 물은 돌이며 바위 사이를 흐르기도 하고 땅 밑으로 숨기도 하다가 큰 바위를 만나면 작은 폭포를 이루며 쏟아져 내리기도 하는데 골개에 흔히 있는 작은 폭포를 "쏠"이라고 한다. 쏟아지는 물이라는 뜻으로 "쏠물"이다. 골개의 특징은 쏠이 많은 점인데 이는 대개의 산골이 가파르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골을 쏟아져 내린 물이 경사가 약한 골밑에 이르면 개울이 된다. 개울은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물길이 끊기지 않으나 산의 규모에 따라 골개와 마찬가지로 큰 쏠을 이루면서 세차게 흐르는 곳도 있다. 개울이 좁은 골짜기를 벗어나면서 몇 가닥의 다른 개울과 모여 이루는 흐름이 도랑이다.
 사람이 사는 마을은 도랑이 시작되는데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물이 산을 벗어나 사람의 생활 속으로 흘러드는 물머리가 도랑인 셈이다. 골개와 개울이 자연적인 흐름이라면 도랑은 어차피 사람의 손길을 받아 흐름이 다스려지기 마련인, 생활 속의 흐름이다. 사람은 물을 다스리기 위해 둑을 쌓는다. 둑이라는 인공적인 축조물은 물을 이용하려는 의지표시로서 비교적 다루기가 쉬운 도랑에서 시도된 최초의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도랑물을 얼마나 알뜰히 활용해 왔는지는 도랑둑에 나 있는 수멍에서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도랑물을 논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둑을 뚫는 수멍은 도랑둑에만 있는 원시형태의 수리시설일 터이다.
 수멍을 통해 흘러든 도랑물은 무논을 채우기도 하고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개울도 되어 아낙네의 빨래터를 만들어 주기도 하면서 다시 도랑으로 되돌아가서 시내를 이룬다. 시내는 도랑에 비해 비교적 잔잔히 흐르고 굽인돌이에는 모래밭도 만들어 들판으로 빠져서 내를 이룬다. 시내와 내의 차이는 우선 그 흐름의 빠름과 느림에 있다. 시내는 굽인돌이마다 여울목을 갖기가 예사이지만 내는 여울이 없던가 아주 드물다. 따라서 지대도 편편한 들판이고 물길도 깊고 너르다.
 시내와 내의 다름은 가람과 강의 다름과 매우 흡사하다.
 가람은 여울목이 많고 강은 여울이 없다. 따라서 강은 배를 띄워 오르내릴 수 있지만 가람은 여울목 때문에 배를 띄울 수 없다.

2
 내가 산꼭대기에 앉아 넋을 잃고 바라보던 강은 진주 남강의 하류. 아직 강도 못되고 가람인데 우리 마을 앞 도랑이 흘러 십리면 이른다는 남강도 구경하지 못했으니, 내 유년시절의 부지런했던 발길도 기껏 십리에 이르지 못한 셈인가. 먼 나들이라고 삼십리 산길을 걸어 칠평산 은석사를 드나들었지만 산은 클수록 강과 멀어지기 마련이다. 산은 산울음으로, 호랑이 이야기로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었지만 하얀 은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강은 아득히 먼 세계였다.
 이렇듯 십리가 너무 멀었던 강도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나의 것이 되고 말았지 그러나 내가 강을 차지하고 난 뒤부터 산을 잃고 말았다. 내가 산을 잃었다는 것은 산골을 떠나 도시로 공부 간 때문이 아니었다. 고향 산마을에 남아있는 동무들도 산에 오르지 못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해방 뒤 민족진영이 좌우익으로 나뉘었듯이 학생들도 좌익계열의 "학맹"과 우익의 "학련"으로 갈라서서 할퀴고 헐뜯는 아귀다툼으로 세를 키우던 끝에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테러에 테러로 보복하는 유혈극까지 벌리고 있었다. 진주지역 학련이 학맹의 비밀아지트를 덮친, 이른바 "가마못사건"도 이때 일어났다.
 경찰의 치밀한 사찰로 수세에 몰린 학맹들이 세를 정비키 위해 가마못 뒤쪽의 어느 집에 모여 있다는 정보를 얻은 학련이 서북청년단의 힘까지 빌어 야밤에 학맹을 덮쳤던 것이다. 장도리와 목검 따위로 무장하고 작은 초가를 들이쳤을 때 발 빠른 남학생들은 비봉산 쪽으로 도망쳤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여학생들이 큰 봉욕을 당한 사건이다.
 이 일이 있은 뒤로는 당시 6년제이던 진주 중학교 선배들 가운데 여럿이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서부경남 지역에 있어서의 지리산은 민중의 귀한 피난처였다.
 1862년 임술년의 이른바 "진주민란"으로 통칭되는 "임술민란"의 주동자들도 마지막에는 지리산으로 피신했고 1923년 진주에서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형평운동"을 확산시킨 최초의 민권운동도 일본관헌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그 주동자들이 지리산으로 도망쳐버렸고 일제 말기 징용과 학병을 모면하려던 많은 젊은이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듯이 경찰과 학련에 쫒기던 학생들도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일제시대의 "산사람"들이 학병을 거부한 젊은이들이라면 신참격인 해방 뒤의 입산파가 학맹 출신들이다. 공교롭게도 지리산 빨치산 지도부는 진주중학교를 거친 우리 "선배"들이었다. 남도부(본명·하준수)가 그렇고 이상현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일제의 학병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산사람"들로서 해방 뒤 내려와 남노당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다시 산으로 들어간 고참 빨치산이다. 특히 남도부는 진주중학 (당시 5년제, 4년의 전수과 정도 있었다.) 4학년을 수료하고 일본 동경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당수 고단자로서 갖가지 무용담이 우리 입에까지 오르내렸던 호쾌한 남아였으나 몸은 왜소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이현상과는 진주중학교 선후배로서 6.25 전의 빨치산을 이현상이 지휘했다면 6.25 뒤의 남부군은 남도부 곧 하준수가 지휘한 셈이다.
그러나 이현상은 빨치산답게 산에서 싸우다가 죽었지만 남도부는 대구로 내려와 숨어 있다가 사로잡혔으며(1954. 1.21) 전향성명까지 발표했다는데 (1954. 6) 그 진위를 확인할 길이 현재로서는 없다. 두 분이 모두 나의 중학교 (오늘의 진주고등학교) 선배들로서 일제와 분단으로 이어진 민족 수난시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다 가셨다.
 이분들에 대한 행적은 좀더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최근에 석방되어 자주 만나기도 하는 몇몇의 빨치산 출신 장기수들이 가까이 있고, 또 중학교 선배들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으니 내가 부지런을 떤다면 새로운 숨은 이야기를 충분히 찾아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를 잇기로 하고, 여기서는 내가 직접 만났고 또 겪었던 산사람 이야기를 정리키로 하겠다.

3
 여기서 내가 줄곧 "산사람"이라고 하는 대상은 시대와 사회계층에 따라 그 호칭이 다르다.
 예부터 여러 가지 까닭으로 산에 들어가 사는 이들을 "산사람"으로 불러왔기에 해방 뒤의 좌익 계열 입산자들도 산촌에서는 산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 명칭이 "공비"로 굳어지면서 신문, 방송과 학교 같은 공공기관에서는 공비라 불렀지만 우리는 이 이름이 탐탁치 않아 "야산대"라는 온건한 표현을 썼다. "빨치산"은 좌익계열에서 부르는 이름이었고 "유격대"니 "남부군"이니 하는 이름은 최근에 나타난 호칭이다.
 내가 처음으로 "야산대"를 만났던 것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었다.
 진주 시내에 집을 얻어 자취를 하던 우리 오누이는 방학이 되면 시내에 남아 공부도 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는데 두메가 좋았던 나는 방학만 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었다. 내가 고향집으로 돌아오면 누구보다 반가워하는 이는 어머니였다. 특히 여름방학 때가 그랬다. 일손이 없어 혼자 도맡다시 피해서 관리하는 큰 과수원의 잔일을 부지런한 셋째놈에게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방학동안 과수원에서 하는 일은 주로 까마귀보기.
 농촌의 여름은 노는 일손이 없다. 아무리 까마귀 따위를 쫒는 단순한 일이지만 과수원이 넓고 무엇보다 혼자서는 심심해서 학교 동무들을 한 둘 데려와 같이 지내는데 중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먹을거리가 많은 과수원에서 보낸다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터이라 방학이 가까워오면 자청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수만과 정운실이라는 두 동무가 있어 때로는 함께 때로는 교대로 나의 일을 도와가며 과일을 먹어치우는 소임을 다하는 터이었지만 이렇게 동무들이 먹는 과일이래야 까마귀가 쪼아서 버리는 양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아까울 게 없었고 더욱이 나는 심심치 않아서 좋았다.
 낮에는 "목청틔우기"(우리는 까마귀 쫒기를 이런 곁말로 불렀다. 까마귀를 쫒으려면 있는 목청을 다해서 고함을 질러야 하기 때문이다.)로 해를 보내고 밤이면 "깡통순찰"(밤이면 여우, 너구리 따위가 많이 기어들므로 양철통을 두드리며 한바퀴 도는 일을 이렇게 불렀다.)을 돌며 산마을을 시끄럽게 했다.
 그날은 그믐밤이었다. 한차례 깡통순찰을 돈 뒤라 밤도 이슥했을 때인데 외삼촌이 원두막으로 왔다.
 "용수야. 일어나라. 손님 왔다."
 설핏 잠이 들었던가. 몸을 흔드는 서슬에 눈을 뜨니 외삼촌의 시커먼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다. 선잠이 깨어 짜증이 나던 나는
 "손님이 왔으면 집에서 재울 일이지 좁은 원두막으로 왜 데리러 왔어."
 속말로 투덜거리며 누운 채 외삼촌의 크고 검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
 "일어나라니깐."
 하며 다그치는 말 속에 긴장감이 꽉 차 있다. 벌떡 일어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커먼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은가. 내가 놀란 것은 어둠의 한 부분 같은 그림자가 아니라 동전처럼 동그란 구멍 뚫린 쇠붙이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드러난 그 구멍은 어깨에 멘 소총의 총구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야산대"임을 알았다.
 "올라오시오."
 외삼촌이 사다리를 내려가며 권하자 시커먼 그림자가 솟듯이 쑥 올라온다.
 이렇게 되어 그 여름방학은 원두막에서 "야산대"와 어우러져 지냈다. 하루만 쉬고 간다던 사람들이 늦장마를 핑계 삼아 하루일을 넘어 머무는 동안 나는 하루 세끼 수발을 맡지 않으면 안 되었고 같은 학교의 선배는 아니었지만 학맹 출신이라던 이들과는 허물없이 사귈 수 있었다. 99식 장총으로 무장한 이들 3인이 근동의 친일파를 사살한 장본인들이라는 사실을 직접 이야기 들었을 때 섬뜩한 기분이 들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몇 해의 산 생활에서도 해맑은 젊음을 잃지 않고 있었던 얼굴을 통해 내가 받아들던 것은 동료의식이었음을 솔직히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갖는 살인의 감정은 친일파에 대한 마음보다 가난한 농부로 향한 사랑의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4
 덕유산이나 지리산과는 까마득히 먼 도시부근의 야산을 떠돌며 친일파를 응징하고 통일이 가까워 옴을 역설하는 잚은 "야산대"들이 행인이 번다히 지나다니는 신작로가의 과수원 원두막에서 일주일씩이나 머물만치 당시의 치안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의 산자락은 이들 야산대의 자유로운 활동무대였고, 과거의 도청 소재지이며 서부경남의 행정 중심지인 진주 시가지까지 내려와 군청을 불사르고 경찰서와 형무소를 습격한 이른바 "진주 공비습격사건"은 과수원의 일이 있었던 그해 겨울 일이다(이 사건은 이현상의 지휘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시 진주시에는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고 경찰도 무장하고 있었지만 변변히 대응도 못했기에 이현상이 직접 인솔한 부대는 의령쪽으로 다른 일대는 합천쪽으로 유유히 퇴각했던 것이다.
민심은 날로 흉흉해져갔다. 모든 국도변의 산은 야산대의 습격을 막기 위해 일정구역을 벌채했으며 산골의 경찰지서는 아라비아의 요새처럼 돌담으로 튼튼히 싸고 망루를 세워 총안마다 기관총을 걸쳐놓고 경비했다. 그러다 이정도로는 경찰 자신들의 안위도 지키기 어려웠다. 함양, 산청, 거창, 합천 따위 산간도시는 밤이면 야산대에 점거되기 일쑤였다.
 많은 기록이 이 시기 야산대에 의해 양민이 학살 된 것으로 적고 있지만 이따금 학살되는 자는 친일파이거나 경찰가족들일 뿐 실제 고통을 받는 쪽은 경찰에 의한 무고한 양민들이었다. 많은 청장년들이 "공비내통자"로 몰려 곤욕을 치뤘고 한번 경찰에 끌려가면 폐인이 되어 업혀 나왔다. 이들은 원통한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치다가 한둘씩 죽어나갔다. 이렇게 하여 죽는 청년을 빨갱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똘똘하고 아까운 젊은이 하나를 잃은 안타까움 이상의 감정은 갖지 않는다.
 낮에는 경찰, 밤에는 야산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도 죄가 된다. 이런 때였으니 내가 야산대를 상대로 일주일이나 수발을 들었던 일이 소문났다면 그 뒷탈이 어떠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그러나 나는 솔직히 야산대의 활동을 돕는다기보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밥 한 끼와 잠자리를 제공한 정도일 뿐이었다. 하루 쉬고 가겠다던 사람이 다음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일주일씩이나 계속된 때문에 길어졌던 것이다.… 이런 핑계는 오늘이기에 뱃장 좋게 하는 것이지만 당시는 물론 오래도록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시치미를 떼고 지냈으니 분단민족의 갈등이 가끔 이런 얘깃거리도 남길 수 있겠거니… 생각해 주기 바란다.

5
 그리하여 또 한해가 가고 1950년.
 나는 중학교 4학년이 된다. 나이 열일곱 살. 사람의 한 누리를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이른 셈이지. 그리고 봄이 다가온다.
 학교에서 바라보면 나직나직한 시가지 저쪽에 촉석공원이 긴 언덕을 이루고 있다. 언덕 위에는 벚나무 숲이 이제라도 꽃을 피울 듯 묵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날손 쳐 부른다. 우리 패는 매일같이 이마를 맞대고 앉아 그날그날의 시간표를 짚고 또 짚으며 뺑소니칠 궁리를 골몰했다.
 "영어시간은 아무래도 위험타. 수학시간도 어림없지. 점신시간 뒤에 국어시간이 끼었으니 오늘은 뺑소니치기 글렀구나."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는 봄내음 뭉클한 공원을 돌아다니는 일도 즐겁지만 공원 밑 남강에서 보트 타는 재미에야 견줄 수 없지. 수업시간에 흑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검은 판 위로 남강의 푸른 물결이 굽실거리며 흐른다.
 "나와라! 나와라!"
 그러나 1950년은 잔인했다.
 사람이라는 미련한 동물은 미래에 대한 예감을 못한다. 가치 따위 새 짐승들도 큰 바람이 부는 해를 미리 알아내어 둥지를 튼다고 하지 않는가. 까치가 둥지를 높게 틀면 그해는 큰 바람이 없고 낮게 틀면 반드시 사나운 태풍이 거쳐 간단다.
 심지어 풀벌레까지도 비바람이 오는 것을 미리 알아채어 울음을 그치고 풀떨기 속에 엎드린다고 하지 않은가. 딱하게도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다. 따지고 보면 사람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동물도 없겠지.
 들판에서 나비를 쫒는 아이들이 한발 앞에 질펀히 누운 수렁도 모르고 나비를 향해 뛰어가듯 우리는 눈앞에 다가오는 참담한 비극도 내다보지 못한 채 온갖 궁리를 짜내어 놀기에만 열중했으니 진실로 한심한 놈들이었지.
 1950년이라면 오늘의 여러분은 6.25 가 터진, 민족사의 참담한 비극의 서막이 열린 해라는 정도로 아시겠지만 나, 박용수의 개인사에서도 6.25에 견줄만한 비극이 시작된 해였으니, 이 사랑이야기가 짓궂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을 지금부터 주워섬겨 보이겠다.
 사랑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이 한 가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듯이 우리 사랑 또한 아름다운 열매로 마무리되지 않기 일쑤이니, 어차피 그런 사랑이야기는 짓궂지 않을 수 없다, 이거다.

작성자박용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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