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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멈춘 꿈을 기억하라

‘미완의 완성지’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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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노력이지,
그 결과는 아니라고 말하듯
여전히 누워 있기만 한 와불 위로 거센 바람이 지나가며
시간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 새벽 푸르스름한 빛 속에 잠겨 있는 와불. 운주사의 새벽은 끝내 이루지 못한 간절한 소망이좌절되는 시간과 함께 한다. 힘들고 고통스런 당대의 역사와 삶의 조건을 한꺼번에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고하면서 시작된다. ⓒ 김태성 기자
운주사의 새벽은 일단 희망적이지 않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 “서울이 이곳으로 옮겨온다”던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소망을 여지없이 배반하며 온다.

첫닭 우는 소리에서든, 공사에 지친 동자승의 거짓말에 의해서든, 끝내 이루지 못한 간절한 소망이 좌절되는 시간과 함께 한다. 힘들고 고통스런 당대의 역사와 삶의 조건을 한꺼번에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고하면서 시작된다.

슬프게도 운주사의 새벽은 도선과 같은 영웅적인 인물 또는 메시아 출현으로 인한 무갈등과 무고통의 불국토 또는 천년왕국의 도래는 불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온갖 갈등과 증오로 가득 찬 악한 세상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 또는 완전한 해방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을 냉혹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세상의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모순과 대립이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없기에 그것들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가피하며 잔인하기까지 한 운명을 되새겨 주고 있다.

그렇다고 그 새벽에 이뤄진 배반의 사태는 딱히 간절한 불국토의 염원과 소망의 무화(無化)를 뜻하지 않는다. 운주사의 창건 신화에 얽힌 좌절의 신화는 실상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닿을 수 있는 한계와 경계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제 아무리 정성을 다하더라도 사람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지 노력하여 최선을 다한 뒤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른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태도를 환기시켜 준다.

    ▲ 새벽달이 떠 있다. ⓒ 김태성 기자 좌절의 신화 없었다면, 운주사는 다만 평범했을 것

그러나 그 무엇 하나 제대로 구비되지 않는 미완의 석탑과 석불에선 불가사의한 매력이 치솟는다. 끝내 일어설 수 없었던 와불로 하여 여타의 수많은 사찰들과는 다른 운주사로 만든다. 돌부처에 법의(法衣) 하나 제대로 새기지 못하는 서투름이나 하루아침에 모든 소망들이 집단적으로 무너져 내려버렸던 좌절의 신화가 없었다면, 운주사는 누구에게나 별 다르지 않는 한갓 운주사였을 뿐이다. 앞으로 더 수차례의 발굴과 조사 작업이 이뤄진다고 해도, 근원적으로 결코 밝혀낼 수 없는 깊은 비밀을 품고 있기에 운주사는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운주사는 처음부터 우리가 창조적으로 오독하고 해석하는 가운데 완성되는 그 어떤 무대일 뿐이다. 그렇듯 과거에도, 미래에도 운주사는 완성되지 않는 세계 유일의 도량이기에 영원할 수 있다.

논밭과 계곡, 그리고 노천이나 바위너설 아래 세워져 있거나 흩어져 있는, 거칠고 못난 운주사의 불상과 석탑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 주고 있다. 옥개석이 날아가거나 혹은 불두가 사라진 채로 우릴 마중하고 있는 불탑들과 석상들은 완성을 거부하는 미완성으로 완성을 지향한다. 미완과 완성 사이의 역설적인 긴장 때문에 역사 속에서 우린 깊은 희망의 좌절을 경험하거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것 때문에 또한 우린 이상세계의 창조라는 꿈을 꿀 수 있다.

그래서 현재 18기의 탑과 80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는 운주사는 제 스스로 완성과 종말을 저지하고 거부하는, 무수한 변화와 창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으로 남아 있다. 왠지 엉성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운주사의 석불과 돌탑들은 미완으로 완성을 대신하는, 곧 우리네 삶이 다름 아닌 미완의 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줌으로써 그 가치를 더한다. 우린 곧잘 지난 시절의 좌절된 혁명이나 역사적 사태에 대해 짙은 아쉬움과 그리움을 표출하곤 하지만, ‘미완이 곧 완성’이 되어버린 바로 그것들 때문에 우린 또 다른 혁명이나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다.

    ▲ 논밭과 계곡, 그리고 노천이나 바위너설 아래 세워져 있거나 흩어져 있는, 왠지 엉성하고 못난 운주사의 불상들은 완성을 거부하는 미완성으로 완성을 지향한다. 미완과 완성 사이의 역설적인 긴장 때문에 역사 속에서 우린 깊은 희망의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것때문에 이상세계의 창조를 꿈꿀 수 있다. ⓒ 김태성 기자 거친 돌부처들은 세속과 초월세계의 동거를 이야기하고

화순 천불산 골짜기의 들판이나 바위너설 아래 때 묻지 않는 청정한 마음의 비로나자불을 주불(主佛)로 하고 있는 운주사는, 따라서 “그날 새벽에 와불을 일으켰다면”과 같은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부처들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상함과 남루함, 깨끗함과 더러움은 서로 의존하고 보완하는 관계에 이룸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세속과 초월세계, 인간과 우주가 서로 대립적인 두 경계로 나눠진 것이 아니라, 각자 독립성을 유지하되 나란히 동거하고 있다고 가만 얘기하고 있다.

세상과 고립된 산중이나 높은 산이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골짜기에 부끄러운 듯 숨어있는 운주사는 그런 점에서 결코 초월적인 세계일 수 없다. 세속인의 접근을 쉬 허락하지 않는 높고 험한 수직적인 산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차이와 불평등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속의 갈등과 대립을 아우르고 다독이듯 온갖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평면적인 바다를 닮아 있다.

높은 수행과 고행을 요구하는 수도자를 위한 터전이라기보다, 조그마한 이해관계에도 웃고 울기를 반복하는 중생들과 끝까지 함께 하기를 고집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천년의 모진 풍상(風霜)을 견뎌 나오는 동안 마모되거나 더러 목이 잘린 채로 기대섰거나 땅에 처박혀 있는 운주사 석불들 또한 그렇다. 그들은 참과 거짓, 깨끗함과 더러움과 같은 일견 상반된 것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 존재하거나 소멸하며 공존하고 융화하는 시공간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희미하나마 끝내 미소를 잃지 않는 돌부처들은 독불장군식의 가치로만 환원되지 않기에 세속과 진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분명 종교적이면서 결코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종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는 운주사는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우쳐 주고 있다.

    ▲ ⓒ 김태성 기자     ▲ ⓒ 김태성 기자 사라지지 않는 최후의 석공들은 바로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주사에 오면 하룻밤 사이를 못 넘긴 채 와불을 일으키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져간 석공들에 대한 궁금증이 슬몃 고개를 든다. 천불천탑 조성을 위한 마무리 작업을 무엇이 일시에 중단하게 만들었던가에 대한 호기심이 따라 다닌다. 필시 어떤 감당하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운주사는 지금보다 더 완성된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영원히 미완의 꿈과 희망으로 남아 있는 운주사에 대한 한 가닥 아쉬움 탓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석공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최후의 석공들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화순 운주사 한 구석의 바위너설 아래로 흘러내리는 석간수 따라 돋아난 푸른 이끼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이 나란히 가족 기념사진 찍듯이 도열해 있는 돌부처들의 허름한 대좌를 감추고 있는 이끼들은 그날 새벽의 격변과 참상이 남긴 상처와 아픔을 감싸 안고 있다.

겨우 흉내 내다만 눈과 입, 그리고 급하게 쪼아내린 코와 기다란 두 귀가 전부인 석불들의 처진 어깨와 깨어져 나간 보관(寶冠)의 민머리 위로 밤새 내린 빗물 자국은 그런 시간의 자국이다. 그날에도, 그 이후에도 여전히 미완성일 뿐일 천불천탑의 조성은 애당초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는 듯 영영 일어날 줄 모르는 와불 위로 철새들이 더러 흰 새똥을 떨어트리며 날아가면서 갑자기 자취를 감춘 석공들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무너지고 또 쌓기를 반복하는 동안 사라지거나 짝이 뒤틀린 석탑들 사이 흰 구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가며 흘러간 역사의 모든 과오와 미숙을 쓰다듬고 있다.

   
▲ ⓒ 김태성 기자
   
▲ ⓒ 김태성 기자
어디 그뿐이랴, 오직 시간만이 끝내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오래 연장하며 완성할 뿐이라는 듯 얼굴 형체마저 희미한 탑신마다 바위솔이 검버섯처럼 피어 있다. 지상에 남은 최후의 석공은 단지 세월뿐이라는 듯 마애불 위로 담쟁이덩굴이 찰싹 엉겨 붙어 있다.

간절하고 절실한 소망조차 없다면 최소한의 가능한 것조차 얻지 못하리라 말하듯 누군가 새로이 쌓기 시작한 돌탑 주변에 연보랏빛 꽃창포가 한껏 피어 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노력이지, 그 결과는 아니라고 말하듯 여전히 누워 있기만 한 와불 위로 거센 바람이 지나가며 시간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는 소망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기에, 우리가 찾아내려고 했던 것과는 늘 다른 것이 역사이자 미래이기에, 운주사는 미완일 수밖에 없었다고 나직이 속삭이고 있다. 그 성취가 아니라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것만으로 우린 행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꿈과 희망은 어쩌면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모든 역사의 고통과 절망이 종결될 자유와 평등의 새벽을 또다시 약속한다는 것을 영원히 입 열지 않는 돌부처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작성자임동확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webmaster@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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