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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더게 짬뽕으로 술을 묵었어”

[이웃집놀러가기] 진뫼마을 도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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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모작 모내기 먼저 끝내고, 보리 베낸 이모작 논에 보릿대를 태우며 모내기를 준비하고 있다. ⓒ 김도수
저녁 먹고 자리에 누우면 아침이던, 그렇게 고단한 농번기철. 진뫼마을 산골짜기 돌아다니며 거의 한달 가까이 모 심고 다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 안 일어날래! 넘덜 집에 모숭구로 갈라먼 일찌건치 일어나서 쑤어놓은 쇠죽이라도 좀 퍼준단 말이제, 꼭 늙은 놈이 퍼주라고 아직까지 자빠져 자고 있네. 젊은 놈 새끼가 뭐 그리 힘들다고 겔겔거린가 모르겄네.”

아버지는 아침 일찍 바지게 가득 소 꼴을 베와 마당에 부리며 내게 한바탕 고함을 치고 있었다. 강 건너 앞산 끝자락에 있는 평밭 작은 집 논에 모내기 품 갚으러 가는 날인데 늦게까지 자고 있으니 화가 난 것이다. 작은 집은 몇 해전 밭을 논으로 개간했는데 돌 자갈이 많고 땅도 거칠어 모심기 사나운 논이었다.

“내 잔 안 받으먼 나는 무조건 머리에 부서붕게"

젊은이들은 모 찌는 것을 싫어했다. 한곳에 다소곳이 앉아 모 찌는 일보다 허리는 좀 아프지만 움직이며 모심는 것이 훨씬 편했다. 어쩌다 모가 잘 쪄지지 않는 모판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오늘 손가락께나 아프게 생겼네’ 아침부터 일하기 싫어 ‘몸살 병’ 앓으며 모를 찌고 있었다.

모 찌기가 시작되면 누군가가 나서서 술 한잔씩 돌렸다. ‘오늘 여기 논바닥에서 함께 나뒹굴게 됐으니 반갑습니다’ 하는 뜻으로 인사 나누며 해장술 한잔씩 돌리는 것이다.

작은집 논에는 유난히 물뱀이 많았다. 모를 찌고 있으면 느닷없이 모판 고랑을 타고 도망가기도 하고 어린 모 사이에 숨어 있어 깜짝 놀라기도 했다. 뱀이 나타나면 모두 질겁을 하며 도망치는데 큰집 문수형은 “요새끼가 겁도 없이 앞에서 얼쩡거리고 자빠졌네. 오늘 너 나한테 디진 날이다”며 재빨리 꼬리 훔쳐 잡고 빙빙 돌린 다음 땅바닥에 ‘철푸덕’ 내리쳤다.

   
▲ 모내기 끝난 논에 모를 떼우고 있다. ⓒ 김도수
   
▲ 모내기 끝난 논에 비료를 뿌리고 있다. ⓒ 김도수
“에이, 비암(뱀) 한 마리 잡았응게 한잔 히야제.” 형은 술 한잔 먼저 하고 막걸리 주전자와 소주병 번갈아 들고 다니며 품앗이꾼들에게 술잔을 돌렸다.

“금방 묵었응게 나는 나중에 묵을라네” 손사래 치면 “내 잔 안 받으먼 나는 무조건 머리에 부서붕게. 힘든 게 한잔씩 허라고 일부러 따라주고 댕긴디 어영부영 안 마실라고 허네” 하며 반강제적으로 한잔씩 마실 것을 권했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작은집 누나가 예쁜 친구와 함께 꿀맛 같은 샛거리를 이고 나타났다. 깊은 산골에 날마다 모내기 하러 다니던 더벅머리 젊은 청년들은 예쁜 낭자가 나타나자 시커먼 얼굴에 하얀 이 들어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따, 오늘 뭔일이데아. 이쁜 아가씨가 샛거리까지 이고 와불고. 오늘은 일헐 맛 나겄고만. 그나저나 이쁜 아가씨! 우리 힘든게 술 한잔씩 따라주먼 안 될께라우!”

젊은 청년들은 따분하고 힘든 마음 어느새 사라지고 모두 활기 넘치는 얼굴로 예쁜 낭자에게 농담 던지고 있었다.

“막걸리는 허리 아픈 데 효과가 좀 덜 헝게 소주 한잔씩 딸아주먼 어떨께라우.”

누나 친구는 총각들 농담에 맞장구 치며 대둣병 소주를 들고 논으로 들어왔다.

예쁜 낭자가 따라주는 술잔 피할 리 없는 젊은 청년들은 막걸리와 소주잔 번갈아가며 마시고 있었다. 소위 ‘짬뽕술’을 마시게 된 것이다. 나도 그날따라 모처럼 젊은 낭자가 따라주는 술 덥석덥석 받아 마셔 주량이 통제되는 선을 넘어 술이 술을 부르고 있었다.

    ▲ '비닐망테' 속에 모 집어넣고 다니며 상급배미 논에서 모 떼우고 있는 아렛집 점순이네 어머니. ⓒ 김도수 "저렇게 삐뚤빼뚤허게 심었다가는 너 디지게 혼나”

점심 식사 전, 모를 심기 시작했다. 못줄에 표시된 빨간 무늬 줄에 맞춰 정확히 모를 심어야 하는데 내 앞에 심어진 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삐뚤빼뚤했다. 술 취한 표시였다. 억지로 점심 몇 숟가락 뜨고 다시 모를 심는데 옆에서 모름 심던 어머니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너 아무래도 술이 많이 취헌 것 같혀. 저렇게 삐뚤빼뚤허게 심었다가는 작어메(작은 어머니)한테 너 디지게 혼나.”

어머니는 내 손을 잡더니 논 아래 아까시나무 그늘 밑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한숨 푹 자고 나서 술 깨먼 다시 숭거라.”

아까시나무 그늘 아래 허리 펴고 누우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몸은 편한데 논으로 다시 발길 돌리는 어머니 생각하니 맘이 편하지 않았다.

“한나절 품삯 밖에는 못 갚았는디 오늘 맥없이 짬뽕을 히야꼬 큰일 나부렀네. 막걸리만 묵을 것인디 맥없이 소주랑 뒤섞어 불러서 일 끝나고 가먼 인자 오메한테 디지게 깨지게 생겼네.”

내 누워있는 위쪽에서는 “줄이야!” 못 줄 떼는 소리 들려오고, 아래쪽에서는 돌 사이사이 돌아 넘쳐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 요란하게 들려왔다. 숨쉴 때마다 코끝에서 전해져 오는 향긋한 풀 내음 내 몸 가득히 퍼지며 무릉도원 헤매고 다니는 중에도 화난 어머니 모습 눈에 아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 햇보리 말리는 할머니. ⓒ 김도수 "품은 나중에 갚아도 돼지만 몸 상허먼 큰일나 불어”

깜박 잠이 들려고 하는데 “줄이야!” 못줄 떼는 소리 희미하게 들려와 “이게 아닌데” 고개 흔들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속이 울렁거려 곧 토할 것만 같았다. 속이 안 좋아 점심을 먹지 않으려 했는데 어머니 권유 때문에 억지로 몇 숟갈 떴더니 결국 뱃속 마지막 끝에 남은 ‘쓴물’까지 모두 토하고 잠이 들었다.

‘억억’ 토할 때마다 들려오던 못줄 떼는 소리.

“줄이야! 줄줄. 얼릉얼릉 안 숭고(심고) 뭐덜혀. 늦게 숭군 사람 얼굴에 못줄 팅겨불랑게 알아서 덜 혀.”

빨리 모 심고 집에 가자며 재촉하는 못줄 잡는 이, 평밭 산골짜기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비몽사몽 자고 있는데 어머니가 깨우고 있었다. 눈떠보니 벌써 해는 지고 모내기 꾼들 신발 찾는 소리 여기저기 들려오고 있었다.

모내기 하러 와서 자고 있는 아들 모습을 본 어머니는 무척 속이 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술에 취해 끙끙거리며 부대끼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던지 등 토닥거려 주며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어쩐다냐. 얼굴까지 또 다 묻어부렀네. 아까도 와서 한번 닦아주었는디 도대체 이게 뭔짓이냐.”

어머니는 머리에 두른 수건을 벗어 얼굴에 묻은 토한 음식물 깨끗이 닦아주고 있었다. 모내기 하면서도 어머니는 자식이 걱정됐던지 잠시 한번 다녀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때도 얼굴에 음식물이 묻어 엉망진창이었던 모양이다.

“뭐더게 짬뽕으로 술을 묵었어. 품은 나중에 갚아도 돼지만 몸 상허먼 큰일나 불어.”

어머니는 윗도리를 벗어 옷에 묻은 음식물 닦아내고 있었다. 모내기 품 갚으러 왔다가 한잔 해버린 자식이 미웠을 텐데 어머니는 혀끝 ‘끌끌’ 차며 안쓰러운 표정 짓고 있었다.

아낙네들 못밥을 내왔던 밥 소쿠리 이고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발걸음 내디딜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빈 그릇 소리 요란하게 들려오는데 그 소리에 장단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퇴근길. 모내기꾼들 연둣빛 어린 모 들어앉은 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흘러간 뽕짝노래 구성지게 부르며 강변 오솔길에 일렬로 서서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나는 옷에 토한 음식물 자국 선연히 남아 창피해 행열 맨 뒤에 서서 쥐 죽은 듯이 따라가고 있었다.

    ▲ 강건너 양어장 들어선 곳이 작은 집 개간 논이다. 양어장 왼쪽에 평평한 밭이 있다 해서 '평밭'이라 불흔다. ⓒ 김도수 "얌쇠양반네 보리 비로 가야 헌디 놉이 있어야 대신 보내제"

취기가 달아오른 젊은 친구들. 큰집 문수형네집 골방으로 모여 한잔 더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쓰린 속 움켜잡고 골방에 곯아 떨어졌는데 아침에 어머니가 깨우고 있었다.

“아야 도수야! 어찌겄냐. 오늘 얌쇠양반네 보리 비로 가야 헌디 놉이 있어야 대신 보내제. 새복부터 놉 얻으로 댕기도 암(아무)도 없더라. 헐 수가 없다. 힘들지만 오늘 하루만 딱 가고 내일은 푹 쉬거라. 나도 술 묵어 봐서 안디 겁나게 힘들어. 힘든지 뻔히 암선(알면서)도 오늘은 어쩔 수가 없다. 너 허고 나 허고 찢어서 놉 갚으러 가야 빵꾸가 안나. 놉 갚으로 안가먼 다음에 우리 집 모내기 허로 암(아무)도 안와 불어. 내 얼릉 라면 하나 끓이올텅게 고 놈 묵고 새물 앞에 있는 얌쇠양반네 논으로 보리 비로 가거라 잉.”

아버지는 아침에 내가 나타나지 않자 “어저께 얼매나 처묵었가디 젊은 놈 새끼가 아직까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냐” 고함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라면 하나 얼른 끓여 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 나와 큰집 골방으로 가지고 왔다.

“어서 요놈 국물 좀 훌훌 마셔라. 힘들겄지만 오늘 하루만 애써라. 내일은 품 갚으러 갈 집 없응게 푹 쉬고 잉.” 축 처진 어깨 두드리며 맥풀린 내 손에 숟가락 쥐어주고 있었다.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울렁거려 걸어갈 힘도 없는데 보리를 베로 가야 한다니 난감하기만 했다. 등 토닥거려주며 애원하는 어머니. 검게 그을린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살 보니 눈물이 핑 돌아 나는 새몰마을 신작로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얌쇠양반네 논에 도착해 식구들과 함께 보리 베는데 논바닥도, 하늘도 모두 노랗게 변해 어디를 거머쥐고 보리를 베야 할지 몰라 머리가 빙빙 돌고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서산에 해지는 노을만 애타게 기다렸다.

무사히 보리를 베고 오자 어머니는 오진 모양이었다. “오늘 안 가 불었으먼 나 욕께나 얻어 묵었을턴디 니가 오늘 애써준 덕분에 내가 마을에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았다.” 검붉은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살 오랜만에 활짝 펴지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줄이야!"

못 줄 떼는 소리 들려오던 평밭 골짜기. 지금 뻐꾸기 울어대며 떠나간 마을 사람들 찾아 부르고 있다. 이모작 모내기 끝나가던 밤꽃 피던 6월. 얼굴 닦아주던 어머니 수건 아카시아 나무에 걸쳐진 듯 평밭 골짜기 모두 희디희다.

지금 진뫼마을 앞 강물은 늙으신 부모님들이 윗마을에서 모내기 하느라 논바닥 나뒹굴며 일으킨 흙탕물 봇물 이루며 흐르고 있다. 땀방울 뒤범벅되어 흐르는 저 붉은 강. 모 먼저 심고 일어서며 ‘줄이야’ 큰소리치며 옆 사람 얼굴에 못줄을 튕기며 장난을 치던 모내기꾼들 강물에 어리어 평밭 산골짜기 돌아나가고 있다.

작성자김도수  ehtn1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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