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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아홉 계단의 추억

완도 정도리 구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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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헌 기자
어딘가 삐그덕 여닫는 문이 있을 것 같다. ‘구계등’이라는 한 세상으로 드는 통로가.
완도 정도리 구계등을 찾을 때마다 굳이 길을 조금 돌아서 뒤편 숲길로 드는 이유다. 어둑신한 숲을 걸어들어가노라면 보인다. 숲의 나뭇가지들이 만든 둥근 문.
그 문을 나서면, 환하다. 하늘, 바다, 떠 있는 배, 갈매기, 바람, 갯돌, 솨르르… 솨르르… 갯돌 구르는 소리.

물 속으로 ‘아홉 계단’을 이뤘다. 그래서 구계등(九階燈)이다. 바닷속 깊은 데까지 둥근 갯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바윗돌과 파도가 1만여 년 동안 나눈 사랑

갯돌처럼 둥그렇게 앉아 바다를 본다. 다르르르, 데그르르. 몽돌 구르는 소리가 그래, 그래, 그래… 마음을 다 받아준다.
등 맞대고 어깨 맞댄 갯돌들. 얼마나 부대끼며 살고 나면 저렇게 모나지 않게 둥그러질까. 얼마만큼 파도에 휩쓸려야 저런 한 세상을 이룰 수 있을까.

이 갯돌밭이 생긴 것은 1만여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100미터 이상 내려갔던 바닷물이 올라왔다. 이때 함께 밀려 올라온 바위들이 태풍과 해일에 깨지고 파도에 구르고 굴러 지금처럼 둥근 갯돌이 된 것. 구계등 갯돌은 바위돌과 파도가 1만여 년 동안 나눈 사랑인 셈.
활 모양의 해안선, 파도의 세기가 달라 동쪽 바닷가엔 수박 만한 갯돌이, 서쪽 바닷가엔 주먹 만한 갯돌이 만들어졌다.

구계등 갯돌은 한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둥근 갯돌들이 모두 바다 속으로 떠밀리고 모래밭이 되기도 한다. 2004년 태풍 ‘매미’ 때도 그랬다. 모래해안이 넓게 펼쳐졌다. 갯돌 소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파도는 또 순식간에 구계등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10여 일 만에 갯돌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둥근 갯돌들의 세상, 눈보다 귀가 먼저 열린다. 갯돌이 물 속으로 ‘아홉 계단’을 이뤘다 한다. ⓒ 김창헌 기자 갯돌밭은 ‘하늘이 내린 건조장’

낭장망으로 멸치를 잡는 어부 박영준(43)씨는 갯돌이 바닷속으로 ‘저만치’ 있다고 바다를 가리킨다. 갯돌밭에서 5미터 가량. 그 너머로는 뻘층. “어렸을 때 헤엄치고 놀았슨게 알제. 물이 깊어.”
정도리 아이들에겐 통과의례 같은 것이 있었다. “배로 노 저어 가서 선배들이 저만치에서 빠뜨려 불어. 그러믄 갯돌밭까지 이 악물고 헤엄쳐 오는 거지. 그렇게 한번 하고 나믄 바다가 내 마당이 되제.”

정도리 사람들에게 갯돌밭은 ‘하늘이 내린 건조장’. 새래기(소멸)를 4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잡는데, 이만한 건조장이 없다. 바람 좋고 햇볕 좋고 공기 잘 통하는 갯돌밭에선 푹푹 삶은 멸치가 금방 바싹 마른다. 상품 가치가 훨씬 좋다. 먼지 같은 것 날릴 일 없어 깨끗한 멸치를 얻을 수 있다.
멸치뿐만 아니다. 톳 미역 다시마 파래 청각 등 정도리 사람들은 무엇이든 다 이곳으로 가져와 넌다. 고추 마늘 고구마 등 농작물도 이곳에 말린다. 푸릇하거나 빨간 것들이 널려 있고 고기잡이 그물이 길게 늘어져 있는 풍경, 구계등은 온갖 색으로 어우러져 생기 가득한 바닷가다.

구계등 바다는 가멸다. 수하식 전복, 미역, 다시마, 톳이 자라고 있다. 박씨의 말에 따르면 “수십억 원 어치가 바다에 있다”.

“구계등 물빛은 가을 겨울이 좋다”고 박씨는 말한다. 가을 겨울로 갈수록 물빛이 더 시퍼래진다. “여름물은 못 묵어도 늦가을 겨울물은 아무 물이나 묵어도 된다고 안 그려. 바다도 그려. 봄 여름 바다는 뜬물이고 가을 겨울에는 까랑진(갈아앉은) 물이고. 이것저것 까랑지고 맑은 물만 있는게 시퍼렇제.”

정도리 구계등엔 홀로 선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너른 팔 벌려 구계등의 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정도리 아이들의 착한 심성이 이 나무를 키워냈다. “나 어렸을 때는 참말로 작았어. 저것이 당(당숲)에서 씨가 날아와 자연적으로 난 것인디, 우리 클 때는 내 허리나 닿을까 할 정도였어. 누가 뽑아 불어도 아무 소리 안 했을 것인디, 암도 손을 안대. 지금 생각하믄 그 개구쟁이 시절에 한 놈이라도 지나감시롱 잡아댕겨 불었을 것 같은디…. 저것이 사랑받을 운명을 타고났나 봐.”

    정도리 사람들에게 갯돌밭은 ‘하늘이 내린 건조장’. 고추가 ‘붉게’ 널려 있는 구계등. ⓒ 김창헌 기자 “날 궂어질라믄 바다가 조용해도 짝지가 울어”

돌이 샘처럼 고여 있다 하여 ‘정돌리’라 불렸던 정도리. 정도리 사람들에게 구계등은 요목조목 재미진 맛이 있는 곳.
배현숙(55)씨는 전에 구계등이 지금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때, 정도리가 온통 마을 사람들 차지였던 때를 얘기한다.

“날 캄캄해지믄 낮에는 앉지도 못하게 뜨거웠던 짝돌(갯돌)이 누워 있기 마치맞게 식어, 모구(모기)도 없고 별은 많고. 옥수수 감자 땅콩 까먹음시롱 별똥별 떨어지는 거 시고(세고), 청산도 등대불 깜박깜박 거리는 것도 시고. 한번씩 바람 무데기(무더기)로 불믄 그리 시원해. 애들이 돌장난 하믄 되게 뭐라고 허제. 돌들이 모다 둥글둥글한게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구계등은 김치 담그는 장소이기도 했다. “여름에 바닷물에 열무잎 씻어서 김치 담고, 가을배추 씻어서 담고. 김장할 때 절간해야 하잖애. 우리는 그런 것 안했어. 바닷물에 씻으믄 간한 거랑 똑같은게, 물이 깨끗한게 그렇게 해묵었제.”

정도리 아이들의 학교 소풍 장소는 대개 구계등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구계등, 중학교 와서도 구계등. 애기들이 딴 디 좀 가자고 했제.”

   
구계등에 가면 둥근 갯돌에, 갯돌모양으로 앉아 바다를 본다. 그 시간이 하염없다. ⓒ 김창헌 기자
정도리 사람들은 구계등을 ‘짝지’ ‘짝개’라 부른다. ‘구계짝지’라고도 하고, 사람들이 구경하러 온다고 ‘구경짝지’라고도 한다. 할머니 당숲 앞에 있는 바닷가라서 ‘당앞’이라고도 한다.
정도리에는 두 개의 짝지가 있다. ‘큰짝지’와 ‘작은짝지’. 큰짝지는 구계등이고 작은짝지는 구계등 바로 왼쪽, 동백숲 아래 있다. 바둑알 만한 갯돌이 파도와 노는 아담한 곳. 작은짝지로 내려가는 너른 바위도 좋다. 바다가 시원하게 안긴다.

“짝지가 울어. 구르륵 구르륵, 데르륵 데르륵, 드글드글 마을 떠나가게 울어. 그라믄 비가 와”
큰비가 오거나 큰바람이 불려고 하면 갯돌 구르는 소리가 달라진다. 마을 사람들 다 들리도록 운다. 사람들은 ‘짝지가 운다’ ‘당앞에가 운다’고 말한다. 일기예보가 없었던 시절 짝지 울음소리가 기상통보관이었다.

배경열 할아버지는 “날 궂어질라믄 바다가 조용허고 바람이 없어도 짝지가 울어. 방에 앙거서 그 소리 듣고 바다에 안 나가제. 짝지가 울면 틀림없이 큰 놀이 일어나고 그려.”

구계등에선 일 년에 몇 번쯤 제주도가 보인다. “좋은 구경이제. 한라산 봉우리가 아가씨 머리마냥 봬. 거가 맑다는 거여. 여기 날씨가 별라 안 좋아도 거기가 맑으믄 보이거든. 날씨 좋은게 고기도 잡고 밀감도 따겄구나, 그런 생각하믄 좋제.”

그 쪽에 무지개가 뜰 때도 있다. “바다 위로 무지개 뜨믄 신기하니 예뻐. 근디 거기는 비 내리고 있다는 거여. 고기잡이도 못하고 애타겄구나, 그런 생각 든게 그때는 마음이 쪼까 안 좋제.”

    ⓒ 김창헌 기자 “어떤 돌은 자갈자갈, 어떤 돌은 사갈사갈”

정도리 구계등처럼 많은 사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바닷가가 얼마나 있을까.
구계등에는 다도해국립공원 사람들이 꾸민 ‘시인의 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시집도 읽고 아름다운 풍경사진도 보고 구계등 생태 공부도 할 수 있는 곳.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글을 모은 책자도 있고 추억을 남기는 종이도 마련돼 있다. 아홉 계단을 이룬 갯돌처럼 종이 한 장 한 장 위에 추억이 쌓여 있다. 사연마다 살갑다.

2007년 진희씨와 철민씨가 남긴 사연. “우리 서로를 알게 된 지 벌써 12년, 서로를 사랑하게 된 지 벌써 3년. 처음 이곳에서 사랑을 싹 틔웠는데 다시 오니 새롭네. 이곳은 자기 고향이라서 그런지 올 때마다 푸근해. 이곳에서 처음 사랑을 느꼈을 때처럼 항상 변치 말고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자.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랑해… ♡”.

2008년 봄에 이곳을 다녀간 한 사람은 “너 생각나 여기에 왔어. 여기에 오니까 네가 더 생각나…”라고 글을 남겼다. 한 남자는 정양 시인의 시 〈토막말〉의 한 구절을 인용해 종이 가득 큼지막하게 썼다. 시 속의 ‘정순’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바꿨다. “재연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구계등 갯돌 구르는 소리를 말로 어떻게 표현할까. 광주 운암초등학교 곽태익군은 “조그만 갯돌은 또르르르 귀엽게. 조금 큰 갯돌은 데구르르르 뭉툭하게. 더 큰 갯돌은 툭툭툭 이상하게. 큰 갯돌은 툭 쿵쿵툭쿵쿵 무섭게”. 고은혜 어린이는 ‘자갈자갈’ ‘사갈사갈’이라고 들었다. “돌마을에서는 돌들이 바다와 만나 기쁘다고 소리친다. 어떤 돌은 자갈자갈, 어떤 돌은 사갈사갈.”

강선우 학생은 구계등에 와서 예쁜 이야기 하나를 만들었다. “울퉁불퉁 못생긴 돌이 둥글둥글 예쁜 돌에게 ‘너는 예뻐서 좋겠다’ 그러자, 예쁜 돌이 못생긴 돌에게 ‘괜찮아 너도 예뻐질거야’. 많은 시간이 흘러 못생긴 돌이 예쁜 돌이 되었네. 못생긴 돌 다시는 예쁜 돌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네.”
작성자김창헌 기자  webmaster@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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