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뜨끈뜨끈, 개두국 묵고 나믄 언 몸땡이가 풀려 ” > 문화


“속이 뜨끈뜨끈, 개두국 묵고 나믄 언 몸땡이가 풀려 ”

장흥 득량만 키조개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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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노란 호스로 다이버는 숨을 쉰다. 한 시간 가량 물 속에서 작업하고 15분 가량 진짜 공기를 느낀다. ⓒ 김창헌 기자
강신난 사람도 있었다. 찬 물 속에서 조개잡이를 끝내고 긴 갯벌을 걸어 나올 때, 차디찬 갯바람은 몸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러다 뻘에 쓰러져 다른 사람 등에 업혀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득량만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강신났다’고 한다.

겨울철 득량만 조개잡이 으뜸은 개두(키조개)와 새고막, 새조개. 뻘 밑으로만 드는 이들 조개는 바닷물이 사정없이 빠지는 씨(사리) 때만 잡을 수 있다. 가장 달큼한 맛이 날 때라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뻘을 드나들었다.

개두는 돈 없는 사람은 사먹을 수 없던, 비싸게 팔리는 고급 조개. 득량만 사람들이 너도나도 살얼음판인 겨울 바다에 뛰어든 이유다.
“물 안 보이도록 멀찍이 나믄 개두를 잡을 수 있는디, 바닷물 첨벙첨벙한 데까지 가믄 개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어. 근디 눈에 보이는 놈은 작은놈에 속하고, 더 큰놈을 잡을라믄 목물찬(물이 목까지 찬) 데까지 들가야 있어.”

물 속으로 들어가 발로 뻘을 헤집는다. 그러다 개두가 발에 걸리면 갖고 온 간짓대를 그 자리에 꽂는다. 간짓대를 따라 잠수해 들어가 낫으로 개두를 찍어 건져 올린다. 하도 많아, 한 대야 채우는 일이 금방이었다. 어른 손바닥보다 두 배는 큰 개두가 수두룩했다.

개두잡이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몸 따뜻하게 하는 것도 개두였다. 쌀가루 갈아, 무를 잔지해(채 썰어) 끓인 개두국. 찬 속은 그제야 온기를 되찾았다.
“속이 뜨끈뜨끈, 개두국 묵고 나믄 언 몸땡이가 풀려. 정신이 돌아와. 지금 사람들은 개두를 생것으로 많이 묵는디 옛날에는 소금으로 간 맞춰 갖고 묵는 개두국이 질이었제.”

    다이버가 물밑으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키조개 한 망태가 올라왔다. 짧은 시간 동안 캐낸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양이 많다. 20년 넘게 키조개 작업을 해온 다이버들이다. ⓒ 김창헌 기자 “첨 들어갈 때는 죽을 것 같어. 바다가 얼음 속이랑게”

새벽 6시 수문포. 사람들은 물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배들은 뻘 속에 묻혀 있었다. “30분은 있어야 배를 띄울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바람막이 없는 선창에서 물이 들기를 기다린다. ‘바다에 나가면 더 춥다’고 한 할아버지가 목에 뭉툭한 수건을 둘러준다. 키조개 작업에 따라나가는 게 사실 쉽지는 않았다. 하루 인건비만 80여 만 원이 들어가는 작업, 헤살꾼 노릇이나 할 기자를 배에 오르게 한 것은 박은수(71) 선장의 측은지심이었다. “이란(이런) 일이 밥벌이일 것인디 하는 수 없제.”

연안복합어선 5.87톤 해동호는 수문포를 빠져나와 득량도 앞바다로 향한다. 작업 보조선원 3명과 다이버(잠수부) 2명을 태웠다. 바다는 캄캄한 어둠천지였다.
이른 새벽 키조개 작업에 나서는 데는 다른 이유가 없다. 수문포에서 잡힌 키조개의 50% 이상은 일본 수출품. 일본사람들 작업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늦어도 오후 3시쯤은 작업을 끝내야 막힘 없이 일이 진행된다. 일본의 공휴일 하루 전에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키조개밭을 알려주는 표지는 일정한 간격으로 바다에 떠 있는 빨간 깃발. 20년 넘게 잠수일을 해온 오승옥(50)·양동일(43)씨가 박은수 선장과 오늘 작업 방향을 얘기한다. 선장과 다이버는 한 마을에 살며 여태껏 함께 작업해온 동료. 중간중간 농담이 오간다.

“아예 물 속에서 나오들 말어. 개두만 부지런히 퍼 올려”하는 박 선장의 말에 오승옥씨가 “성님! 차라리 물 속에서 개두 파는 포크레인을 개발하쇼. 우리도 맑은 공기 마시고 살고 싶어라” 하고 받아친다.

인생, 물 속에서 반은 보냈다는 오승옥씨. “아직 갈칠 놈들이 남았는게 하제…, 물고기도 아닌디 죽기살기로 바닷속에 들어가고 싶가니….” 양동일씨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디, 바다에 들어가 보쇼, 물 속 알기가 편한가 사람 속 알기가 편한가” 한다. 이골이 난 물밑 작업, 억척스러움만이 버텨낼 수 있는 무기다.

잠수옷을 갖추어 입고 납벨트를 허리에 차고 두 다이버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속을 데우는 것이다. 차디찬 수온, 커피 한 잔의 역할은 제법 크다.
“첨 들어 갈 때는 죽을 것 같어. 바다가 얼음 속이랑게. 이것이라도 (몸 속에) 붓어놔야 안심이 돼. 각심하고 들어가는 거여.”

    망태 하나 목에 걸고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한 시간 가량 물밑에서 작업한다. 사리 때다. 뻘이 올라 와 손에 잡히는 감각으로 키조개를 캐야 한다. ⓒ 김창헌 기자 “물살이 장난 아니어라. 납 16개 찼는디 밀려분단게”

다이버는 큰 망태 하나를 목에 걸고 바다에 뛰어든다. 두 개의 줄이 다이버를 따라 물 속으로 늘어졌다. 하나는 망태를 끌어올릴 줄과 다른 하나는 컴프레셔에 연결돼 다이버에게 공기를 공급해주는 노란 호스. 노란 호스가 다이버의 생명줄인 셈.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물방울, 다이버는 그 아래서 작업하고 있다. 물방울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다.

박 선장은 “세 망태를 하고 나와. 한참 걸려” 하고 일러준다.
어떤 신호였을까. 다이버가 물밑으로 내려간 지 15분쯤 지나자 데리키(크레인)를 이용해 망태를 끌어올린다. 키조개가 가득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캐낸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이다. 갑판에 키조개가 쏟아지고 보조선원들은 물을 뿌려 씻은 다음 30개씩 포대에 담기 시작한다.
물 속에서 작업하는 다이버와 주고받는 신호는 노란 호스였다. 다이버가 호스를 잡아당기면 망태를 올리고 새 망태를 내려준다.

갑작스레 양동일씨가 물 위로 떠올랐다. 배 위로 올랐다. “물살이 장난 아니어라. 막 떠내려간단게. 납 16개 찼는디 (몸이) 밀려분단게.” 사리 때다. 물이 세다. 수면은 큰 파도 없이 잔잔해도 물밑은 물이 요동치며 흐르고 있다. 양동일씨가 올라온 것은 그 물 세기를 이기지 못해 납을 더 꿰차기 위해서다. “(납을) 34킬로나 차믄 허리 나가분디”.

지금 수심은 7미터 가량. 깊이는 작업하기에 나쁘지 않지만 사리 때여서 시야 확보가 전혀 안 된다. “암것도 안 뵈여. 뻘이 일어나 갖고 완전히 밤중이요.” 손에 잡히는 감각으로만 키조개를 캐고 있는 것.

양동일씨는 납덩이를 더 달고 바로 물 속으로 뛰어든다. 갑판 위 선원들이 바빠졌다. 망태가 바로 바로 올라온다. 두 다이버가 캐낸 여섯 망태를 추리고 나니 쌓아놓은 포대가 100개를 넘는다.
두 다이버 모두 배 위로 올라왔다. 다이버가 물 위로 뜨면 선원들이 호스를 당겨 끄집어 올려준다.

15분 가량의 휴식시간. 대략 한 시간 동안 물 속에 있었다. 다이버들은 신선한 공기를 느낀다.
다이버들이 배로 올라와서 급하게 찾는 것이 물과 커피다. 물로 입을 헹구고 뜨거운 커피를 들이킨다. “아따, 못해먹겠다야.”

10시, 물량선이 왔다. 작업해 놓은 키조개 포대를 옮겨 싣는다. 박은수 선장은 “공장으로 가져가서 아짐씨들이 하나씩 까. 일본으로 보내” 한다.
한 다이버가 하루 캐내는 키조개는 대략 오천 개. 오승옥씨는 “바다가 지랄 같아도 내 할당량은 채워야제” 하며 다시 바다로 몸을 던진다.

    “인생, 물 속에서 반은 보냈다”는 다이버 오승옥씨가 키조개 세 망태를 캐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 ⓒ 김창헌 기자     “물살이 장난 아니다. 납 16개를 차도 몸이 밀려버린다.” 다이버 양동일씨. ⓒ 김창헌 기자 “바다가 지랄 같아도 내 할당량은 채워야제”

키조개는 곡식 따위를 까부르는 ‘키’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남도에서는 ‘개두’ ‘게이지’라 부르며 부산에서는 ‘채이조개’라 부른다, 마산·진해 부근에서는 ‘챙이조개’라 하며, 군산·부안에서는 ‘게지’라 부른다. 보령·서천·홍성에서는 ‘치조개’라고도 한다.

득량만 수문포 키조개는 ‘전설’에 가깝다. 장흥하면 키조개를 떠올리고 도시 상가에서도 ‘수문산(産)’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수문포 젊은 어민들의 무모한 도전이 있었다. ‘키조개는 이식이 안 된다’는 일설을 깨고 일을 벌인 것. 고향 바다에 자연산 키조개를 옮겨 심었다. 성장이 월등했다. 그때가 1989년 3월.

하지만 그때부터가 어민들에겐 ‘고생 시작’이기도 했다. 다이버들이 잠수해 들어가 심고 캐는 작업이 이어졌다. 잠수기 어업 허가가 없어서였다. 키조개를 심고 캐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지도선이 뜨면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다급할 때는 다이버를 호스에 매단 채 도망치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의 나날이었다.

어민들의 키조개 양식 제도화 요구는 10년이 넘는 투쟁 끝에 얻어졌다. 2002년 득량만 400헥타르(ha) 해역에 허가가 났다.
불합리한 제도개선과 키조개 판로개척으로 몸고생 마음고생 다 한 흥일수산 장영복(55) 대표는 “그때는 이런 날 이 영영 안 올 줄 알았다”고 말한다.

   
물량선이 작업장으로 가져온 키조개. 50% 이상이 일본의 큰 도시로 나간다. 맛과 크기 면에서 우리나라는 물론 어떤 일본산도 득량만 키조개를 따라올 수 없다. ⓒ 김창헌 기자
재밌는 사실은 득량만을 뺀 한국의 어떤 바다에서도 키조개 이식이 안 된다는 것. 다른 곳에서도 시도를 해봤지만 성공한 사례가 아직 없다. “수온, 뻘, 수심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득량만은 뻘에 윤기가 있는 상답이다, 옥답이다.”

다이버들이 손으로 하나하나 심은 키조개 종패는 4∼5년을 키운다. 심은 종패 가운데 60%가 성패로 자란다.
가난한 어촌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든 득량만 키조개. 맛과 크기로 이름이 났다. 장 대표는 “오사카 동경 등 일본 큰 도시에 수출되고 있다.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 사람들이 언제든지 주라고 한다. 우리나라 다른 지역은 물론, 어떤 일본산도 득량만 키조개의 사금사금 연한 맛을 따라올 수 없다. 크기에서도 차이가 난다. 키조개 10미가 1킬로까지 나갈 정도다”고 말한다.

11월부터 4월까지 키조개는 맛이 가장 좋다. 산란을 하려고 몸을 키운다. 껍데기 가득 부드러운 살이 올라 달보드레하고 웅숭깊은 맛을 낸다.
“우리는 키조개 없이는 쏘주 안 묵어. 삼겹살 안 묵어. 묵은지도 안 묵어. 국물?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제. 개두국이라야 겨울이 따숩제.”
작성자김창헌 기자  gudu@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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