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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장아장, 한 걸음 또 한 걸음”

아베 씨의 한 살배기 딸 아키호의 걸음마처럼

본문

 
 
 
몇십 년 만의 한파라고 하던데, 오사카도 이번 겨울은 예년보다 춥네요. 게다가 몸을 으스스 떨게 만드는 심상치 않은 기록들이 하루하루 갱신되는 뉴스를 듣자니 마음이 더 움츠러 드는데, 어째야 기운이 날래나?
“오랜만에 우리 집 옆 마당에서 고기라도 구워 먹을까 해요, 차로 데리러 갈 테니 이동하는 건 걱정 말고요!” 항상 신세지고 있는 장애인지원단체 책임자의 부인이신 미에 씨, 그리 티내지 않으면서도 가끔씩 안부 인사도 물어주고, 몇 년 전이지만 집에 있던 안 입는 기모노로 위에 걸치는 가운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한국 여행 때 기념으로 산 한글이 쓰여진 손수건으로 마스크를 만들었다고 주시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허한 몸과 마음을 고기라도 먹으며 채워보자며 불러 주셨어요. 식사 초대만도 고마운데 차까지 준비해서 불러주시니 역시 마음 씀씀이가….
10년 전쯤에도 가본 적이 있는 미에 씨 댁은 그리 크지 않지만, 부엌 뒷문 바로 옆에 작은 공터가 있어서 날씨만 좋으면 불 피워 바베큐 하기에 안성맞춤이더라고요. 미에 씨 큰딸 미호 씨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어 왕래가 있는데, 들어보니 근처에 사는 여동생 미도리 씨도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면서 그 날 소개해 주신다네요. 그렇게 날 좋은 일요일 점심, 마당에서의 숯불구이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오사카의 코로나 양성자 수가 적을 때였어요).
화창한 날씨, 고기 구워 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죠. “도어 투 도어” 마중나와 준차에 편안히 타고 바로 마당 앞에 내리고. 고기 굽는 준비를 하는 곁에서 저도 마늘도 까고 김치나 반찬을 접시에 담으며 거들었죠. 일단 먼저 모인 사람들끼리 “건배!”,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워가며 한 점 두 점 고기를 나눠 먹으니 그 맛이 참 끝내 주더라고요. 한국사람은 저뿐이지만 한국 드라마, 한국 노래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를 공부하신 분들도 계시니 간단한 말은 한국어도 섞어 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어요.
그런데 전화를 받은 미에 씨가 잠시 누군가 마중을 갔다 오신다고 하네요. 처음 오는 분들인데 근처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대요. 잠시 후 도착한 일행은 아이가 탄 유모차를 밀고 오는 여성 한 분과 전동 휠체어를 탄 남성 한 분. 다 모였으니 다시 한번 건배! “자, 이제 오실 분들은 다 오신 것 같으니 처음 만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를 할게요! 방금 오신 세 분은 아베 씨 가족으로 2년 전에 결혼했고, 한 살배기 따님은 아키호, 그 옆에 계신 분은 오가와 씨,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계신 또 한 분은 경자 씨(재일동포 3세 여성)예요.”
미에 씨 가족과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열 명 중 휠체어가 세 대. 밖에다 상을 차리니 휠체어를 타고도 젓가락만 들면 바로 상 앞에 다가가 먹을 수 있으니 좋네요. 갓 구워진 고기를 맛나게 먹으며 이야기를 듣자니, 아베 씨는 2011년 동북대지진이 있었던 이시노마키시 출신이라네요. 아주 큰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해일에 싹쓸려 마을은 초토화되었지만, 평소부터의 피난훈련 덕분에 인명 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고요. 아베 씨는 지진 전부터 교통사고로 하반신장애가 있는데, 지진이 나던 날은 마침 피해가 덜한 지역에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해요. 아무리 피난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그 엄청난 해일이 들이닥칠 때 휠체어 장애인이 피난하는 데는 많은 여러움이 있었을 거라면서요.
지진 직후 오사카의 장애인단체들이 연대하여 피해지역으로 지원활동을 갔는데 그 때 지원 봉사 일행 중에 부인이 있었고, 그 활동이 계기가 되어 아베 씨 부부가 만나게 되었대요. 아베 씨가 적극적으로 다가가 부인이 살고 있는 오사카까지 옮겨와 만남이 이어졌고 끝내 프로포즈에 성공해서 결혼, 지금은 오사카에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차리고 딸 아이까지 태어나 세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어요. 그간 정규직 일자리를 찾고 있던 아베 씨가 마침 장애인단체의 당사자 스태프로 취직하게 되어 더 축하하는 자리가 되었고요.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네요.
별 말씀 없이 재료 나르는 거며, 뇌성마비장애인 경자 씨 옆에서 식사도 거들어 주고 계시던 오가와 씨라는 여성, 미에 씨와는 나이도 같지만 또 한 가지, 중증지적장애인의 자녀를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그런데 3년 전 그 아들이 마흔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말기 암이 발견돼 순식간에 세상을 떠났대요. 졸지에 떠나보낸 아들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적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미에 씨가 이런 저런 핑계를 들어 자주 부르시는 것 같았어요.
중증지적장애인 부모의 가장 큰 바람이 자식을 먼저 보내는 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식을 앞서 보낸 엄마의 마음의 빈자리는 언제까지나 썰렁하고 시린 것 같아요. 저마다 이런 저런 사연과 장애와 가슴앓이가 있지만, 같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으면서 조금은 막혀 있던 속내도 풀고 맺혀 있던 사연도 풀어보는 시간을 나누는 것 같았어요. 그 가운데 이 날 가장 주목을 받은 건 역시 한 살배기 아키호, 유모차에서 내려 주니 엄마 손을 잡고 한 걸음 두 걸음 ‘아장아장’ 발을 내딛네요. 더디고 서투른 그 걸음마가 얼마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그 여린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어른들을 이끌어 주는 것 같고요.
2021년을 맞이했지만 “출발!” 목청껏 외칠 분위기는 아닌 듯. 하지만 더디고 지난한 길을 아직도 꽤 많이 헤치고 가야 하기에, ’성큼성큼’ 단 걸음에 나갈 수는 없어도 ‘뒤뚱뒤뚱’ 실패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배려하고 위로하며 인내심을 다독이면서 ‘아장아장’내딛고 가야겠지요, 함께 부축하면서 말이에요.
 
 
 
그간 십여 년도 넘게 <함께걸음>을 통해 여러분들께 인사드렸던 것 같아요. 제 얘기만 하니 보시는 분들의 마음을 엿볼 수는 없었지만, 자칫 “일본 오사카가 이만큼 앞서 있어요”라는 시각이 아니라 비슷한 듯 하지만 문화도 가치관도 다르게 살고 있는 이웃 나라 사람살이에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던 시점이나, 아직 갖추지 못한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금씩 소개하면서 같이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렸던 것 같아요. 이제는 오히려 숨돌릴 새 없이 변해가고 새로워지고 있는 한국의 모습을 일본에 소개해야 할 것 같지만요. 지면을 통해서는 마지막이 되니 아쉽기 그지 없지만 그동안 제 글을 실어 주시기 위해 수고하시고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훈훈한 미소가 함께 하시기를!
 
작성자글과 사진. 변미양/지체장애인. 오사카 거주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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