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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영화 속 숨은그림찾기

장애 코드로 문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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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지금 우리의 일상은 안전한가? 이 물음을 자꾸 되뇌게 되는 요즘이다. 모래 위에 쌓아올린 성처럼, 온 세상이 무언가 조금만 닿아도 허물어지고 흩어지며 부서지고 사라질 것만 같다. 불안함과 죄책감, 우울감. 10.29 참사 후 내게 또다시 찾아온 감정들이다. 29일 늦은 밤, 이태원에서 호흡곤란 환자가 다수 발생했다는 속보가 떴다. 순간, 친구들과 핼러윈 파티를한다며 나간 조카가 걱정돼 전화했더니 안 받고, 동생은 계속 통화 중이었다. 몇 분 후 조카와 다행히 연락이 닿았고, 이태원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말에 안도했다. 다음 날 새벽 1시쯤 속보는 계속됐으며, 그곳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중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그분들이 살기 위해 온몸으로 버텼을 그 시간, 나는 그 옆 동네에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저 눈물만 흘렀다. 이번에도 희생자 대부분이 조카 또래의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이 더 아팠고 미안해 또 죄인이 되었다.
 
그동안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참사를 비롯해 세월호 참사 등 참사를 겪을 때마다 우리는 저마다의 입장에서 지켜주지 못해, 살아남아, 살아있음에 죄인이 되었다. 일상에서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서 어떻게 이토록 많은 인명피해가 날 수 있는지? 자연재해나 테러의 현장, 전쟁터도 아니고 다리, 백화점, 배, 골목 등 우리가 매일 다니던 길과 골목, 누구나 언제든 갈 수 있고, 탈 수 있는 곳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한 번에 죽는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았다. 매번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은 있지만, 번번이 누군가에 의해, 무언가에 의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요즘은 재난 상황도 실시간 생중계되는 세상이어서,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과 우울감에 빠질 수 있고, 심각한 경우 생활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후유증까지 겪을 수 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때 나는 물속에서 고통을 겪었을 희생자들이 떠올라 한동안 머리 감기가 무서울 정도로 물에 대한 공포가 심했었다. 평소에도 그렇긴 하지만, 요 며칠은 외출이 더 주저된다.
 
더욱이 전염성이 빠른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점점 더 강력해지는 변이 바이러스가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내 몸에 침투해 생명을 위협할지 모르는 환경이다. 이제 재난은 더 이상 남에게만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내가, 가족이, 그리고 나의 주변인이 재난의 피해당사자가 될 수 있고, 영화 속에서 3D나 4D의 기술로 재연되는 참혹한 세상이 판타지가 아니라, 나의 현실, 나의 일상이 될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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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재난은 우리의 일상에서 예고 없이 예외를 두지않고 갑자기 찾아온다. 그러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재난이 발생한 현실에서도, 이를 전하는 방송과 언론에서도, 예외가 되는 사람들인 양 언제나 재난 밖 사람들이 된다. 이런 세상을 옮겨놓은 듯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영상 콘텐츠 속에서도 장애캐릭터는 등장하지 않는다. 설사 등장하더라도 대중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보일락 말락, 숨은그림찾기 하듯 신경을 곤두세워 찾아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나라 재난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 재난 영화에서도 장애가 있는 인물들은 등장 자체가 아직은 희귀할뿐더러, 들키면 안 될 사람들처럼 꼭꼭 숨겨둔다.
 
우리나라 재난 영화에서 숨어있던 장애가 있는 인물 중에는, 쓰나미로 인한 재난을 다룬 2009년 영화 <해운대>의 ‘오동춘(김인권)’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장애는 구둣가게에서 아들의 구두를 사서 나오다 쓰나미가 덮치는 것을 피하려 급하게 몇 발을 내딛는 그녀의 마지막 신, 한 컷, 단 5초에 담긴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인물을 이전 신들에서는 바스트 샷으로만 잡아 주어서, 관객들 대부분은 그녀의 장애를 인식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류독감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재난 영화<감기>에서도 장애가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상황을 막기 위해 진원지 봉쇄라는 극단의 조치를 내린 정부에 분개한 시민들이 철회를 요구하며 청와대로 향하는 장면이었다. 시민들 대열 속에서 휠체어를 탄 한 여성이 카메라 앵글로 들어온다. 진압군인 아들은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지만, 의지를 굽히지 않고 휠체어를 움직이며 대열을 따라 한발 한발 나아가는 그녀다. 뿌연 연기에 휩싸인 혼잡한 거리에서 몇 초 잡히지 않는다. 이 인물도 대부분 관객이 인지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현실에서 만나는 주체적이고 진취적이며 소신 있는 장애 여성들이 오버랩된 인물이라 의미를 더했다.
 
가장 최근 영화로, 좀비 소재의 재난 영화 <부산행>에서도 장애가 있는 노숙인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거의 마지막까지 주인공들과 함께 다니는 비중 있는 역할이어서 관객들이 인지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임신한 여성과 아이의 뒤에 서서 보호하고, 결국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좀비에게 달려드는 인물로, 희생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이전과 비교해 역할도 컸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기존 인식(도움을 받는 사람들)을 환기하려는 메시지가 전해지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이 인물들은 등장 자체에 의미를 두는, ‘재난 현장에 우리들도 있었다’ 정도에 머물 뿐, 각각의 재난 상황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이를 지원하기 위해 어떤 시스템을 갖추어야 하고 편의 시설과 보조 장비들은 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매개나 동력이 되지 못한다.
 
영화 속 생존법이 장애, 비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매개가 된다
보아서도 안 되고 소리를 내서도 안 되는 세상, 재난 영화 <버드박스>와 <콰이어트 플레이스> 속 세상이다. <버드박스>에서는 빛을 본 사람들은 자살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괴이한 생명체에게 잡아먹힌다. 그래서 이 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들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며, 결국 마지막 생존자이자 구원자가 된다. 두 영화 모두 재난 발생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시작된다. 생존한 사람들은 이미 시각장애와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익혔고, 이들의 언어라고만 인식하던 점자, 수어, 수신호, 필담 등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자연스럽게 이 언어들이 소통의 보편적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이 있었다. 빛을 보면 죽는 <버드박스>에서는 눈을 가리고 소리와 촉감 등 감각만을 이용해 생활하고 이동해야 하므로 아이들도 청각과 촉각을 자극하는 감각 놀이를 주로 하며, 줄을 잡고 이동하는 훈련이 일상화되었다. 한편 소리를 내면 죽는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는 대화할 때 아이들에게 반드시 서로 눈을 보고 표정과 입 모양을 읽도록 교육하고 수어와 수신호, 필담으로 소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맥락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재난 영화 <엑시트>에서도 읽힌다. 유독가스 테러로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주인공 용남이 생존하기 위해 택한 것은 점자보도블록이었다. 점자보도블록이 향해 있는 방향을 따라가서 비상구와 방독면을 찾고 지하철을 빠져나간다.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노란 점자보도블록이 앞이 보이지 않는 위기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길이 됨을 보여줌으로써 시각장애를 위한 편의시설이기도 하지만, 화재나 가스 유출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모두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음을 부각시키며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시킨 장면이다.
 
이 영화들에서는 장애가 있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거나 마지막 몇 컷에서 구원자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맞춰져 있지 않은 현실의 환경과 구조, 시스템의 문제가 읽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불평등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온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소통방식이, 모든 이들이 살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생존법이고, 길이 되는, 역발상적 상상에 있지 않았을까?
 
재난은 평등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코로나 확진자와 밀접 접촉해 자가격리 된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을 돌본 어머니가 일과를 기록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3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 발달장애 자가격리자와 그 가족의 어려움을 상세히 다룬 이런 기사는 거의 보지를 못해 반가웠고, 내용은 답답했다.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한 중증 발달장애인의 자가격리를 가족에만 전담시킨다는 것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상 배제에 가까운 무관심의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사실이 그랬다. 늘 그렇지만 이번 ‘코로나19’에서도 재난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 노숙인, 경제력이 약한 노인, 어린이가 가장 안전하지 못했고 가장 많이 희생된 사람들이지 않는가?
 
재난이 일상이 된 지금, 우리의 대중문화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재난에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피해에 대한 예견과 대비다. 한 예로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숨은그림찾기하듯 꼭꼭 숨겨 등장시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역할이나 분량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인 1, 2, 3의 역할로 짧은 순간의 등장이라도, 재난 시 국가로부터 안전과 건강, 생명을 보호받아야 하는 권리를 가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인식시키는 인물이어야 하고, 그래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재난 시 어려움은 무엇인지, 그리고 재난 시 장애 별 편의시설이나 동선을 고려한 구조나 필요한 지원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녹여내는 동력이나 매개가 되어야 한다. 더불어 영화 속 이런 상황 상황들, 장면 장면들을 보면서, 장애를 부정하는 정서,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사람의 자유와 선택, 공존을 가로막는 장벽은 장애를 가진 몸이 아니라, 비장애 중심에서 설계된 장벽을 만든 사회라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는 사회와 관객들이길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나의 욕심일까? 싶다가도, 이를 정확히 읽어내는 영화리뷰들을 볼 때면 그래도 어느 누군가, 또 사회의 어디에선가는 공존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위해 한발 한발 발걸음을 옮기며 조금씩 진보하고 있음을, 그래서
희망적임을 보게 된다.
 
지난 1년, <함께걸음>과 함께 하며
내겐 2022년은 ‘장애코드로 문화읽기’의 부활과 필진으로 다시 <함께걸음>과 인연을 잇게 된 해로 기억될것 같다. 문화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대중과 함께 숨 쉬고 소통하는 일상의 예술이다. 그래서 나의 문화읽기에는 나의 정체성인 장애, 여성, 그리고 노후와 건강이 걱정되는 중년의 시선이 담기고, 이것이 문화읽기에서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전문성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코드로문화읽기’ 코너를 다시 기획하고 제안해준 박관찬 기자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함께걸음>은 장애인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언론사이다. 앞으로 더 장애당사자의 목소리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담아주는 언론이 되길 바란다.

 
작성자글. 백수정/대중문화 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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