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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를 규정하라

[김형수의 세상보기] 장애와 비장애, 그 경계의 뫼비우스 띠

본문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내려왔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선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얼굴이 멀쩡한 아이는 더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에도 그을음이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노릇 아닌가. 선생은 다시 묻는다. 누가 얼굴을 닦았을까. 그러나 학생들은 이번에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선생은 말한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하고서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서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 조세희, 1976 「뫼비우스의 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장애인의 문제는 상식이었고 또 그렇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이란 사람들이 문제가 없고 차별받지 않는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장애인이란 낱말과 개념이 ‘차별’과 ‘소외’라는 언어들과 동일시될 만큼 그들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현존하며 역사성을 띄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장애인을 향한 차별은 장애인이라 이름 받은 한 개인에게 통사적(統辭的)으로 모든 삶의 시간 동안 여러 모습으로 가해진다.

  장애인이란 규정과 낙인, 그리고 차별은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공시적(公示的)인 면에서 매우 다양한 공간과 영역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편으로 장애인 차별의 양상은 ‘장애’라 하나의 단편적인 이름으로 진행되지 않고 다른 여러 사회적인 존재들과 함께 복합적·연속적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여성, 외국인, 노동자, 어린이, 노인, 노동자와 같은 다른 사회적인 소수와 차별의 요소와 같이 있을 때보다 심각하게 일어나고 발생한다.

  모두가 이해하듯 장애인 문제는 계급과 성(gender), 지역, 국가, 인종, 피부색, 학력, 나이, 성적 취향, 종교에 따라 이 모두를 개별적으로 또는 동시에 아우르면서 문제를 심화시키고 복잡하게 만들면서 발생하고 있다. 이렇게 규정당한 장애인은 태어날 때부터든, 살다가 그렇든 비장애인과는 달리 삶의 조건과 동선을 2가지 이상 꾸리며 산다. 장애인은 기본적으로 이런 삶의 개념이 ‘우리’라는 사회 울타리에서 처음부터 쫓겨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을 여성, 남성 또는 황인종, 백인종과 같이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가진 이와 없는 이, 주체자와 대상자와 같이 대립적 계급과 계층으로 구분함으로써 생겨난 일이다.
   
  이와 더불어 정치인, 운동선수, 경제인, 학자와 같은 사회 주류계층에서의 장애인이란 존재의 차별과 배제 역시 그 ‘장애’와 함께 차별에 대한 연쇄 반응을 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장애인 중에서 주류층 권력 등에 놓여 있다고 해서 차별의 문제에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렇듯 장애인이란 존재에 대한 차별의 문제는 복합적이고 이중적이며 양극화 현상을 나타낸다.

  한국처럼 대부분의 자본주의와 외세를 통해 문명화된 국가에서는 장애인이란 규정 내지는 범주로의 편입은 차별을 발생시키고 합리화하는 도구인 동시에 극단적이고 야만적인 차별에 대한 사회적 보호막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동시적으로 부여한다.

  이것이 장애인 차별에 대한 사회화 과정이며 내면화의 절차이다. 이 절차는 장애인에 대한 낙인(stigma)과 온정(pity)이 동시에 일어나고 반복되는 것에서 더욱 강화된다.   

  장애인이란 분류(分類, classify) 안에 있기 때문에 차별받지만, 또한 그 범주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배제를 당하기도 한다. 과거 논란이 되었던 샴쌍둥이의 싱가포르 국외 원정 수술 논란과 같은 희귀질병, 간염과 같은 만성질환 환자들의 장애인 인정 주장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엉덩이가 붙은 채로 태어나 싱가포르에서 분리 수술에 들어갔던 한국인 샴쌍둥이 사랑·지혜 자매(생후 4개월)의 몸이 성공적으로 분리됐다. 이 자매는 샴쌍둥이가 장애인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아 정부의 장애인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며 각종 사회보호단체도 이러한 희귀사례에 대한 지원을 곤란하게 여겨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장애인으로 규정당하거나, 인정하거나, 주장하거나, 내면화했을 때 일어나는 외부로부터의 차별과 권리보호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며, 역시 이중적이다.

  흔히들 장애인 차별의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식의 개선이나 사회제도의 선진화를 제시한다.

  설사 그것이 장애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위에서 제기한 장애인 문제가 왜 그러한 양상을 가지는가는 속 시원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장애인을 말함에서 인류학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인류 ‘최초의 장애인’이 누구냐는 도발적인 질문에 제시할 수 있는 과학적이며 실체적인 증거를 우리 인류가, 사회가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장애인이란 존재는 인류가 약육강식이라는 동물계의 법칙을 깨고 나왔을 때부터 늘 존재해 왔던 사회구성 요소였다. 사회가 사회구성 요소 중 한 개인에게 어떠한 잣대를 대고 규정하고 분류하는가에 따라 ‘장애인’이라고 규정됐으며 역사적인 사회적인 규범에 따라 처리됐다.

  이러한 사회적인 처리방식은 종교가 정치화한 중세사회에는 격리와 죽임이란 것으로 진화론적 모순 문제로 있다가 근대사회 이후 특히 자본의 등장 이후에는 조금 약화한 ‘차별’이란 형태로 등장한다. 차별이란 형태는 기본적으로 장애인은 바로 비노동적인 존재라는 것이 그 원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사회문제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논의에 대하여 나름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반발의 수준 역시 ‘장애인도 노동할 능력이 있다’거나 ‘장애인도 생산성이 있다’는 부류의 자본에 그 자본적인 존재가치를 검증받기를 원하는 구호성 선언에 머물러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란 과학적으로 또 국가적으로도 존재론적인 실체조차 파악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전 국민이 인식하는 인식론적 합목적성은 획득한 특이한 존재이다.

  장애인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장애인을 그렇게 규정한다면 장애인의 반대 또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이는 비장애인 역시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고 쉬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구체적인 실체를 인식하거나 개념화하는 말 부림이 아니라 순환 논리적 언어 규정이다.

  여기까지 오면 대부분의 배운 사람들은 장애나 장애인에 대하여 의학적이거나 법적인 기준을 내세우며 ‘장애’란 ‘비정상적인 것’이며 장애인은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 때문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라고 논한다. 그런데 남녀의 문제와는 달리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문제는 생물학적 차이에서도 사회적인 차이에서도 분류해 내기란 쉽지 않다.

  한편에선 그러므로 장애인의 객관적인 잣대와 평가를 의학이란 도구로 시행한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의학적인 진단과 사회적인 규정 사이의 합의 계약이기에 어려운 문제다.

  순수 의학적으로도 장애인을 추출하고 정의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이란 존재는 시간상으로는 생물학적 진행과정 노화(老化)를 통해 인간이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장애인이 되거나 되어간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러한 확인 과정은 더욱 명확하고 세밀하다.

  생리학적으로도 신체적인 균형과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는 정상상태가 있을 뿐, 항시 정상적인 정상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의학적으로 병적이며 비정상적이다. (조르쥬 깡길렘, 1996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154쪽) 비정상과 정상의 개념이 상호 반대 대립(anti)의 개념인지 상대적인 배타성의 개념인지도 역시 분명치 않다.

  엄밀히 말해서 신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장애나 불편함을- 경험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신체적·정신적인 정상상태(Normal condition or set)에 순간순간 시간상으로 놓여 있을 뿐이고 그 반대의 개념의 사람들이 장애상태에 일시적으로 또는 영속적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홍윤기 씨는 「장애 이데올로기」에서 사람들은 장애인이냐 아니냐를 분류할 때 언제나 장애 상태가 없는 정상 상태를 표준으로 삼는다고 비정상적인 ‘사람’을 규정해 낼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사람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지만 누가 ‘정상적인 상태’의 사람인지는 식별되지 않으며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뜻을 가진 ‘비(非)정상’이라는 말을 쓰려면 논리적으로는 정상이 무엇이다는 규정이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논리적으로 뒤에 오는 비정상이 실존적으로는 선행한다고 하는 말이 결코 역설이 아니다.

  특히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비정상 상태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정상이라는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는 이 언어 상황은 정상과 비정상 장애의 대립 설정은 궁극적으로 장애 상태가 없는 정상적인 상태라는 기준이나 표본에 맞추어 장애인이라든가 비정상인을 치유하던가, 복귀시키던가 아니면 제거해야 한다는 규범적 의도 즉 차별의 합목적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장애와 비장애가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임은 자명하다. 수전 선택(Susan Sontag)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이해하는 질병이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주관성의 산물이라고 대중적으로 밝힌 것도 이미 장애인을 이루는 대부분을 이루는 낙진(落塵)이 질병임을 볼 때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것은 실제 당사자의 입장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결코 시대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은 인간의 삶이 그때그때 요구하는 보편적인 관계를 얼마만큼 적절하게, 그리고 탄력성 있게 반영하느냐에 달려 있고 구체적인 개인들을 둘러싼 사회적인, 문화적인, 정치적인 사회 환경에 달려 있다.

  개인의 장애 상태가 개인의 의지로 쉬이 바뀌지 않는다는 불가역성을 본다면 홍윤기 씨의 주장처럼 분명히 장애인의 사회적인 차별은 “장애인은 사회와 국가의 유지에 불필요하거나 아니면 부당한 부담을 안겨 주는 비정상인이다”라는 말을 계속 일반화시키고 유포시켜서 결국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수용 능력, 문제 해결 능력이나 의지가 없음을 은폐, 전가, 회피하려는 지극히 사회적인 시스템이다. 바로 허구고 이데올로기이다. 곧 장애인은 사회적 개념에 따른 존재이다. 
 
  지금에 와서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장애 때문에 장애인이 되고 차별받는다는 도식보다 오히려 사회적인 부조리나 병리 현상, 신자유적인 지구화 등으로 말미암아 장애 상태로 내몰린 사람들이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으로 받는 차별의 양과 질로써 장애인을 규정하려 한다.

  그로 말미암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자본축적 이윤추구의 극대화는 가까운 미래에 거의 모든 인류를 ‘자본’ 자체의 생산 능력보다 훨씬 무능력하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장애인으로 전락시키면서 일부 사이보그 인간이나 슈퍼컴퓨터에 비장애인, 정상인의 개념을 내어줄지 모를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은 결국 모든 인간을 생산성의 노예, 장애인의 서열화 상태에 놓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이 정의되려면 장애인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인식되어야 하고 그것은 노동의 능력으로 서열화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장애’가 다양성으로 존재하면 한편으로는 장애인의 정체성이 강화되기도 하지만 비장애인의 존재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시약이 되기도 한다.

 

작성자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facebook.com/eduable, guernik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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