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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리베

[이서진의 살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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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내려가던 날은 추웠다. 저 멀리 새가 우짖는 소리이듯 우우,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주 베란다에 눈길을 주었다. 잎 떨어진 나뭇가지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겨우내 푸름을 잃지 않던 소나무 또한 머리칼이 엉기듯 도리 없이 제멋대로 휘둘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설은 아마도 오일장이 이 땅에서 죄다 사라지더라도 존속할 터였다. 전날까지 순한 양 같던 일기가 돌연 산짐승처럼 사납게 굴지 않는가.

오늘따라 더 추울 게 뭐람? 매사 누구 탓, 무엇 때문이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치들을 보면 때로 가자미눈을 치떴을망정 나는 못내 아이의 귀교 일을 원망했다.

입춘 지난 적이 그 진작이고 봄비 내려 싹이 돋아난다는 우수마저 홀연 물러났건만 여전히 바람은 드세었다. 그 바람의 세기는 딱 아이가 흔들린 만큼이었을까.

질풍노도(疾風怒濤)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꼭짓점을 찍고 아이는 지금 완만하게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제 방문을 소리 나게 닫거나 왁왁, 목에 핏줄을 세우고 막무가내로 제 의견을 관철시키더니 지난겨울 즈음부터는 한 발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상생(?)의 기로에 들어선 것 같아 여간만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고 서글프다.

‘그래, 세상에 발을 딛는구나.’ 천둥벌거숭이 시절을 벗어나는 것은 그만큼 순전한 꿈과 이상에서 멀어지는 징표일 테니까. 부모가 아닌 선험자로서 보일 듯 말 듯한 아이의 내면을 훔쳐보기를 나는 원했다.

열 달을 품었다가 아수라 같은 세상 속에 자식을 떨어뜨리는 일은 그 얼마나 황황겁겁한가? 귀신은 몸체라도 없지. 무간지옥이 따로 아닌 이 험한 세상에서 양의 탈을 쓴 이리의 인간군상을 대면할 자식의 앞날이 어느 부모인들 아뜩하지 않으랴!

차라리 내가 얼굴 셋, 팔 여섯 달린 귀신이 되어 아이를 위해 싸우리라고, 그 어떤 아비어미가 맹세하지 않겠는가?

유독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감성 또한 섬세해서 도무지 공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곤혹스러웠다.

결국 싸울 용기가 없어 귀신도 되지 못한 나는 아이를 대안학교에 ‘대피’시킨 꼴이었다. 말하자면, 아펜리베(AffenLiebe, 원숭이 사랑)를 일찌감치 포기한 비정한 어미였다.

항상 새끼를 등에 둘러메고 다니면서 이 잡아주고 털 핥아주는 원숭이와 같은 자식사랑. 물론 이 말은 자식을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도록 품안에만 넣어 두는 부모의 잘못된 사랑을 일갈한다. 그러나 아펜리베를 부정적으로만 꼬집고 힐난할 수 있을까?

따뜻한 부모의 품과 같은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오죽하면 신이 인간을 다 사랑할 수 없어 세상에 ‘어머니’를 보냈다고 하랴.

다만, 언제까지 둘러메고 다닐 것이며 어느 만큼이나 이를 잡고 털을 핥아줄 건지 그 시기와 정도가 관건일 것이었다. 수위조절… 자식사랑의 변치 않을 철칙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난 불행해요.”

참담한 아이의 낯빛을 잊을 수가 없다.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나 역시 눈가가 젖어들었다. 불행하다고, 아이는 세상 모든 불행을 제 등에 짊어진 듯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순간 뒤통수를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핑, 돌았다. 어질어질했고 맞은편 책장에서 책들이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열두 살 사내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은 백번 생각해도 아니었다.

학교생활이 지옥 같다고,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고. 깊이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두 눈 부릅뜨고 도피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꽃피는 사월과 녹음 짙은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아이의 낯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산으로 바다로 줄래줄래 여름휴가를 따라나서는 제 친구들의 뒤꽁무니를 무연하게 바라볼 뿐 아이에게 한여름 밤의 꿈이나 감흥 따위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가을이 되자 그에 시름이 깊어져서 내내 우거지상을 하고 학교를 오갔다. 십대 외계인이라고… 사춘기만 무기 삼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성적과 숫자와 그 획일성이며 폭력과 왕따가 난무하는 공교육에 희망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길을 잃어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을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거나 마냥 지구인으로 바뀌기만을 손 놓고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요. 가겠어요.”

대안학교를 소개하자 아이는 단박에 얼굴이 밝아졌다. 중학1학년을 다시 되돌리거나 집과는 아주 먼 남도의 궁벽한 곳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부모와 집을 떠나는 게 아이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때까지도 아펜리베 어미였던 나는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아이 방만 들여다봐도 코끝이 시큰했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밥을 먹다가, 커피를 마시다, 혹은 베란다 아래 나무를 내려다보다, 서가의 책들을 찾을 때조차 종종 목울대가 아파왔다.

울컥, 모든 게 아이와 연결되었다. 김치전과 탄산음료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하고 유난히 책읽기를 좋아했던 아이의 행동반경을, 눈앞에서 아이가 돌아다니는 양 그려보곤 했다.

그렇게 아이는 어미의 품을 떠나갔다. 이태 전, 아이는 제 몸보다 큰 여행용 가방을 질질 끌고 갔는데 이번 귀교 때는 그 큰 캐리어를 날쌔게 밀고 현관을 나서는 게 제법 청년 티가 역력했다.

걱정 말라고, 엄마나 아프지 말라고, 항용 골칫거리인 어미의 약한 몸을 외려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밥 많이 먹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잠 잘 자고….”

책을 주문해달라는 아이의 통화목적은 안중에도 없고 나는 여전히 원숭이 사랑을 되풀이 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 피곤한 사랑을 계속할 것인가? 뚝, 멈추고 싶은 잔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줄창 달려가서 아이가 있는 남도의 외진 마을에 당도할 것이었다.

세상에나! 아이를 떠나보내며 떼어버렸다고 자부했던 아펜리베는 여전히 끈덕지게 붙어 있는 중이었다. 어찌하랴? 이 못 말리는 짝사랑을.

아무려나, 이를 잡아주고 털을 핥아주는 원숭이 사랑이라고 비난받아도 고치지 못할 이 고약한 체화를.

“수업 시작예요. 끊어요.”

툭,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한동안 책상 위의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휴우, 나는 어쩌자고 신의 사랑을 대신할 ‘어미’가 되었던가.

 

작성자소설가 이서진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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