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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룬집

[이서진의 살며 생각하며]

본문

‘풀잎이 품은 햇살은 풀잎으로 살아 있습니다.’

주황색지의 글씨를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발레리나의 발뒤꿈치가 불현듯 연상되었다. 흡사 춤꾼의 동작처럼 이어질듯 끊어질듯 한 붓펜의 유연함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글자들은 나붓거리는 춤사위와 닮아 있었다. 살짝 뒤꿈치를 치켜 든. 여백에 실처럼 가느다란 풀잎을 붙여놓는 정성도 아끼지 않았다. 그 여린 풀잎에도 햇살은 살아 숨 쉬었으리라. 오직 풀잎으로만. 색지에 붙은 풀잎이 갸륵해졌다. 그 몸 어디에 따사로운 햇살을 품었던고?   

‘날마다 그릇이 되는 일,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행복했다. 날마다 ‘그릇’이 되지 못하면서.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 될 때 행복하다는 붓펜의 주인을 애써 그려보았다. 그녀는 매일 무엇을 담고 살까? 궁금해졌다. 풀잎과 햇살과 흙과 공기와 바람이며 구름… 그녀에게 동행은 여럿이었다. ‘그래,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겠구나!’ 행복한 고백을 전달받은 나 또한 덩달아 행복했다. 날마다 그릇이 된다는 그녀가 보내준 상자 속에는 참다래와 수수와 옥수수수염이며 청국장 등속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친정엄마의 손길이라고. 피붙이에게서 느끼는 애린함이 내 가슴을 싸하게 파고들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게 땅 끝 해남에서 여기 복작거리는 도심까지.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아무리 택배차량이 왕왕대는 세상이라지만 농장주인의 정성이 여간 황송하지 않았다. 선인(善人)들의 그 선행이 대지를 비추는 햇살이듯 세상을 고루 밝게 하리라. 그녀의 그릇 역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선의로 그득할 것이었다.

‘다이룬집’이라니?

범상치 않은 택호(宅號)가 자꾸만 입속에서 공굴리기를 했다. 무르익지 못해 시금털털한 내게는 멀고 막막한 택호였다. 그 집 주인은 아마도 성인군자이리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어찌 이런 이름을 쓸 수 있을까, 의구심이 증폭되어서 나는 카페를 출입했다. 다 이루었다고? 정말이지 말 그대로 원도 한도 없이 다 이루었다는 뜻인가? 뜬금없게도 나는 붉게 물든 노을을 관조하는 그 집 주인장을 떠올렸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웬일인지 그럴 것만 같았다. 세상과 삶에 대한 넉넉한 품성… 들판에서 속절없이 떨어지는 해를 그저 속절없이 바라보면서도 그 어쩔 수 없음에 안달하지 않을 듯 싶었다.

주인장의 삶의 철학이 그 택호에서 고스란히 녹아난 다이룬집과의 인연은 아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가을 대안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한밤중에 외출을 했다가 자정이 되어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규칙을 어겼으므로 아이는 스스로 과실을 인정했고, 학교에서는 아이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바로 그 자숙의 시간을 아이는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아펜리베 어미인 나는 전전긍긍 애가 탔고, 모자라고 어리버리한 어미를 배려한 때문인지 다이룬집 안주인은 매번 카페에 아이의 일상을 올려주었다. 아이는 농장에서 내처 잠을 자기도, 자그마한 방안에서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혹은 고구마며 콩을 가르기도 하면서 주인장과 시간을 함께하는 모양이었다. 자식을 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해서 애먼 분들만 고생시키는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사춘기의 방황과 열병을 앓는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나는 조 비비듯 하며 밤잠을 설쳤다. 노동을 통한 주인장과의 진지한 대화가 카페에 올라오기도 했는데 아이는 스스로를 제법 들여다볼 줄 아는 듯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때껏 집과 학교밖에 모르던 녀석이 생면부지 농장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일상을 접하게 되었으니… . 게다가 주인부부의 생의 이면과 철학을 어설프게라도 엿보았을 터다.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과 거기에서 오는 울림은 아이에게 도전과 성찰로 다가갔을 테니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지나치는 삶을 바라보고 이미 이루었으니 지금의 상태를 느끼자는 의미’라고. 짐작했던 대로였다. 다이룬집의 본의를 알게 된 나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미 이루었으니… 그랬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일정궤도에 안착시켰고 적잖은 소유를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하고 더 많은 것들을 가지려고 두 눈을 희번덕거린다. 도무지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고 얼마만큼을 더 가져야 하는지 그 목적도 한계도 분명치 않은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무한경쟁의 그 무시무시한 속내는 어쩌면 인간의 탐욕이 자초한 재앙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왜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걸까? 모든 걸 미래에 꿰맞추는 악습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천연덕스럽게 살아온 날들은 과연 어떻게 되찾아야 하는지. 그 잃어버린 소중한 날들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 너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 인간의 교만과 탐욕을 경계할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비단 성경뿐이랴. ‘다이룬집’이라는 택호만으로도 그 일침은 충분하지 않은가! 이미 우리가 이룬 것들, 혹은 가진 것들만으로도 자족할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하리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하여 자칫 흘려버릴 것들을 지금 여기서 붙들고 느끼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바로 삶의 지혜가 아닐까. 

저 땅 끝 해남의 들판에서 그녀는 오늘도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농부의 손에 버무려진 그곳의 흙과 물과 바람이며 별빛까지. 햇살 한 줄기, 밭의 한줌 흙조차 소홀히 하지 않을 그 고운 심성을 나는 조용히 가늠해본다. 담벼락에 피어난 풀 한포기에 예사롭지 않게 시선을 건넬, 마당가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한 마리 새와도 조곤조곤 얘기를 풀어낼 것 같은 그녀를 떠올린다. 조화로운 삶은 그것 자체로도 우주가 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시샘해본다.

사월, 다이룬집 마당에는 봄볕이 찬란하리라. 원도 한도 없이 다 이루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룬 것들만으로도. 웬일인지 그 집 대문은 활짝 열려 있을 것만 같다. 언제든지 오고 가는 나그네를 허물없이 맞아줄 주인을 대면하여 그처럼 다 이룬 내력을 세세하게 경청할 것이었다. 아아, 나는 지금 책상머리를 벗어나 저 해남의 봄빛과 지천으로 피어 있을 들꽃이며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을 만나고픈 것이리라.   

 

작성자소설가 이서진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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