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소리] 탈 감상주의의 도래를 위하여 > 대학생 기자단


[징소리] 탈 감상주의의 도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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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보라 악천후 속 13시간만에‥‥‥ 장애 청소년 4명 설악산 대청봉 정상에 서다"
  어느 일간지에 보도된 한 기사의 제목이다. 이런 유의 기사 제목은 우리가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는 장애인에 관한 단골 기사 내용의 서두이다. 그릴 때마다 "또 같은 소리이겠지"라는 나의 예상은 아직도 빗나가지 않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주제, 것은 "우리도 해냈다"이다. 그런 기사들의 상투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가장 힘든 악조건에서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서다. 감격에 겨워서 서로 껴안고 "우리도 끝내 해냈다"며 절규했다."
  대관절 장애인들이 무엇을, 왜 해낸 것인가?
 "가장 힘든 악조건"이란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도저히 등반 길에 나설 수 없거나,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으로 명백한 "위험한 상황"이다. 장애인 비장애인 가릴 것 없이 험한 눈보라 속에서의 대청봉 등반에 대한 위험을 걱정하는 것은 등반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비슷할 것이다. 더욱이 비전문 등반가로서 심한 신체장애를 가진 장애인의 경우 그런 위험 상황에서의 등반이 만류되어야 하는 것이 무리 없는 판단이다. 비전문 등반가인 비장애인이 이런 악조건에서 등반한다 생각했을 때 생기는 모든 염려가 장애인에게도 적용되어져야함이 마땅하다. 바로 이런 것이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같은 인권, 같은 인격, 동등한 이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악천후 속의 등반에 대한 위험도를 장애인과 비장애인 및 그룹으로 무조건 구별하여 평가하는 것, 즉 장애인 그룹이 더 힘들 것이라고 단정짓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 두 집단 안에서 등반에 더 능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등반에 어려움을 주는 신체·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장애인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와 지원 태도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악천후 속에서의 등반을 연기시키고 좋은 기후를 기다려 등반을 하도록 격려했다면, 그것은 과잉보호나 동정심이 아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충고가 될 것이다. 이러한 충고는 비장애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기사거리는 안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무엇이 장애 청소년들을 험한 눈보라 속에서도 정상에 설 수 있게 하였을까? 무엇이 기사를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악조건"을 강조해서 장애인의 등반 행위가 비상한 관심거리로 느껴지게 하였을까? 비장애인도 해내기 힘든 것을 해냈다고 하면 장애인의 능력에 대한평가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목발을 사용하는 신체장애청소년을 설악산에 오르게 허락한 부모가 영하 20도의 강추위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등산길에서 수백번 곤두박질쳤으며, 자일에 대롱대롱 매달려야 하는 고생을 겪었다는 기사를 읽는다면 그 심정은 어떠할까? 또 독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다양할까? 아마 "불굴의 의지", "아니 꼭 이렇게 해야 하나", "장애인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야. 확실히 뭔가 달라. 비상한 능력이 있어. 한과 설움으로 응어리진 오기와 독함 일수도 있어‥‥‥‥
  이러한 기사가 독자들에게 "장애인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보세요, 여러분," 하는 순박한 바람에 얼마나 충실한 효과를 드러내 주었는가? 이 순진하고 귀엽기까지 한 의도의 계몽적인 효과의 강도를 의심하면서 이런 기사들이 내포하고 있는 생각거리들을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유의 기사는 현 한국사회에서의 장애의 의미 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동시에, 그런 것들을 비의도적 또는 의도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다. 이러한 기사를 통해 발각 당하는 현 사회의 장애인 관의 몇 장면은 이런 것일 수 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나?"  "이왕이면 비장애인이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특별하고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장애인의능력? 그것은 결국 비장애인인 우리가 우리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해주는 것. 장애인이여! 끊임없이 비상한 것을 보여주십시오. 우리에게 도전해 보십시오."
  "때로는 우리 비장애인의 불성실함과 나태함을 깨부숴주십시오. 당신네 장애인들도 그렇게 열심히 했으니 우리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힘겨운 조건 속에서도 척척 해내는 것을 보니까 아! 장애인이여, 당신들은 불굴의 의지를 가졌습니다.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신체장애를 지닌 판사, 청각장애 화가 등등. 장애인의 자격은 이런 것일 수도 있지요. 비록 장애는 있지만 그 장애를 이겨내고(?) 무언가에 성공한 사람들‥‥‥ 그러나 뇌성마비로 인한 운동 기능 장애, 중증 정신지체, 시각장애 등 복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월등하게 잘해 보여줄 것이 없군요. 장애인 누구나 되는 것인가요?"
  "장애인들은 평범한 상식 선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부모, 형제, 선생님, 친구도 없는가보다. 영하 20도 눈보라 속에서도 설악산 정상등반을 허락하고 단행하는 것이‥‥‥‥
  "장애인들이여 ! 당신들이 비장애인에게 무시 받고 차별 받았다고 하는데, 어디 두고 좀 봅시다. 당신들이 얼마나 잘 하나‥‥‥"

  이렇게 현 사회의 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장애인 관의 일면을 분석해 볼 수 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수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애인의 비상한 능력을 칭찬하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에 많은 한계가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주요원인은 "장애인들의 무능력한 면"과의 만남이다. 이 무능력한 면을 인정하고, 이러한 인정이 장애인의 총체적인 인간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이 과제에 지속적으로 교육되어야 하고 연습되어져야 한다.
  악천후 속에서도 13시간만에 설악산 정상을 정복하는 "유능력함"에 대해 감명 받고, "아! 장애청소년도 등반할 수 있구나"라며 인정을 하는 것은, 식사시간에 한 숟갈 밥의 반 정도는 계속 흘리는 뇌성마비 청소년과 기뿐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함께 밥을 먹는 일과는 질적으로 얼마나 다른 수준의 이해와 수용을 요구하는가? 장애인의 유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비장애인에게 특별하게 힘든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애인의 무능력한 면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은 사고의 혁신적인 개혁을 요구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렵고, 시간이 걸리고 교육되어지고 연습되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해 볼 용기가 있는 것인가? 이 어려운 과제에 대한 연습과정에 장애인에 관한 기사내용들도, "아 나도 나쁜 사람은 아닌가 봐. 장애인들이 이런 일을 해냈다는 것을 읽으니까 뭔가 마음이 뭉클하고 도와주고 싶어!"하는 유의 독자의 사춘기적 감상주의를 만족시키는 역할의 탐닉에서부터 새로운 가치와 사상을 내면화하기 위해 자기 변혁을 해나가야 하는 우리 모두를 자극하고 격려하고 인도할 수 있는 달콤하지만은 않은 또 다른 역할에로의 비상이 필요하다. 

작성자박승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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