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직업의 자유를 외칠 대자보를 허하라 > 지난 칼럼


우리에게 직업의 자유를 외칠 대자보를 허하라

[김형수의 세상보기]-장애인 청소년, 청소녀들이여 빵과 장미를 위해 행진 하자-

본문

「“우리가 환한 아름다운 대낮에 행진, 행진을 하자,/헤아릴 수 없이 많은 컴컴한 부엌과 쟂빛 공장 다락이/갑작스런 태양이 드러낸 광채를 받았네./사람들이 우리가 노래하는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을 들었기 때문에.“」-빵과 장미(Bread and Roses, James Oppenheim), “모든 이에게 빵을, 그리고 장미도”- 서부 여성들의 슬로건(제임스 오펜하임)


당사자의 꿈이 만든 진로인가? 부모와 교사 불안이 만든 진로인가?

진로와 직업을 고민할 때 누구나 한결같이 본인 적성과 욕구에 따라 취업과 진로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진입 장벽이 높고 실업률이 높아도 직업 자체를 고민할 때에는 개인의 욕망과 적성으로 직업을 생각한다.

직업에 대하여 필요와 한계를 정하는 것은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의 스스로 실패하거나 좌절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장애인의 경우 그들이 고등교육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인지능력이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상관없이 부모와 전문가들의 판단과 기대수준 및 걱정으로 진로와 직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결정에 과정, 진로탐색이나 직업의 발견과정에서도 장애인의 발언권이나 참여가 거의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지적·자폐성 장애인이나 정신장애인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직업의 선택이 제한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어떤 일과 직업을 가지고 싶은 지를 꿈꾸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까지 막거나 반대하거나 조소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많은 현장에서 나는 장애인 당사자와 교육하며 그들의 꿈과 희망으로 직업을 이야기할 때 많은 부모들이,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능이나 한 일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 표정은 주로 당사자들이 장애 판정을 받고 생겨난다. 많은 친지들이 나의 장애를 알았을 때, 다섯 살 때부터 목발 사용자인 필자의 직업은 이미 시계방이나 약국에서 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5년 전만 하더라도 지적 자폐성 장애인학생들이 대학을 가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었는가?


불안과 차별이 만든 결정이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유효한 것인가?

이와 같이 시각장애인들은 아예 헌법적으로 안마사 직업 독점을 보장한 것이 오히려 시각장애인학교를 다니는 학생에게 안마교육은 좋은 싫든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고 시각장애인이 판사 임용이 되는 시대에도 다른 진로 탐색은 여전히 요원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지적·자폐성 장애인 역시 개개인에게 각자의 진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인기가 높고 직업 재활에 성공하여 히트 친 하나의 직업이 단 하나의 진로가 되어 버린다. 본인이 커피를 또는 커피 만드는 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빵을 또는 빵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정작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결정론적으로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충분한가에만 집중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정책으로 장애인의 소득 보장을 위한 직업 독점권은 장기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낙인과 편견, 갈등으로 돌아올 부메랑의 위험이 너무 크다. 시대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상상력과 도전이 제한된 부모와 전문가의 판단은 당장 안정적이고 진입 장벽을 낮출지는 몰라도 바로 이것 때문에 장애인의 직업 정책은 늘 시대에 어긋나고 뒤쳐지는 악순환을 불러올 수도 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월급을 받으며 부모도 아니요, 전문가도 아닌 장애인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취직하여 취업의 문턱을 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승진하고 승급하고 자기 발전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하다못해 단순 조립만 10년을 했더라면 과장의 직무는 주어지지 않더라도 연공서열의 원칙에 따라 과장 대우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마저도 이제 노동 시장에 성과급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어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요컨대, 이제 장애인 스스로 진로와 취업에 고민할 수 있도록 기회와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 판정을 받는 그 순간부터.

그 실패는 좌절과 실패의 경험도 포함해야 한다. 비장애인 청년들 역시 100여 통의 이력서를 쓰고 50회 이상의 면접을 봐야 경우 비정규직, 시간제 일자리도 얻는 시대이다. 비장애인도 그만큼 힘든데 장애인은 어떡하느냐가 아니라 그만큼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직면하게 해보자는 것이다. 우리 장애인 당사자들과 함께. 

그래야 취업을 하려는 동기부여가 약하고 성취도도 낮은 악순환을 막을 수 있으며 직업 시장에서의 장벽과 차별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부모의 욕구와 불안은 결국 과거 당신들의 경험과 편견에 근거한 경우가 많고 전문가들 역시 자신의 실적과 결과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안타까운 현장이다. 그리고 그 한계에 따른 선택은 미래의 장애인 자녀가 사회변화에 따라갈 수 없게 하는 스스로의 차별, 내면화된 차별, 차별과의 동일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눈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는 사람이 토목공학과를 가서 설계사를 하며, 시각장애인이 운전과 요리를 하며,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이 국제법을 번역하고 인권강사로, 인형극단의 배우로 가족들의 카드값을 대신 결제해주는 이 시대에 살고 있으며, 변화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그리고 능력이 많은 장애인 보다 이런 변화에 빨리 대응한 장애인이 더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의 부모들이, 당사자들을 둘러싼 전문가들이 과거의 경험과 과거의 지식에만 머물지 말고 다양한 영역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미래를 준비하여 장애인당사자들과 함께 취업 현장의 많은 차별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직면하고 임해 주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승진을 꿈꾸며 스트레스를 견디며 회식도 함께하는 그런 직업은 없는가?

그것을 위해서는 장애인당사자가 스스로 부모로부터, 전문가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와 욕구와 인식이 만들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애인 당사자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의 인생을 경험하여 미래를 기회하고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나 전문가 스스로 장애를 잘 안다는 미명하에, 차별과 상처로부터 보호한다는 우월주의에서, 비장애인도 취업이 힘든데 이것이라도 어디냐, 라고 생각하며 장애인들의 능력과 꿈을 하향평준화 하고 제한한다면, 엑셀과 인터넷, 스마트폰을 잘 모르는 모든 비장애인들은 모두 장애인으로 직업재활을 받아야 할 일이다.

부모나 전문가들 본인들의 한계와 편견에 직면하여 스스로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업과 사회의 고용주의 생각을 설득하고 바꿀 수 있을까? 지금 바리스타가 장애인에게 유망한 직종이라고 해서 10년 뒤에도 그러할까? 나는 차라리 지금부터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은 인권강사로 교육하거나 연기자로 키우겠다. 10년 뒤에는 드라마 <굿닥터> 같은 드라마에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출연하게 될 테니까.


장애인당사자에게 자부심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힘을 주는 그런 직업은 과연 없는가?
월급 통장을 보면 그만두고 싶지 않은 그런 직업은 정말 없는가?

그렇게 어렵다면 부모들이여, 전문가들이여, 그리고 당사자들이여, 각종 대기업의 노조부터 설득하고 그들 앞에서 1인 시위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는가? 일개 청소부 아줌마들이 한 인간임을 선언하며 파업을 하고 비정규직 문제를 9시 뉴스에 나오는 것을. 우리들의 장애를 먼저 보지 말고 우리의 꿈과 적성을 먼저보고 스스로 진로와 직업을 찾아갈 수 있도록 깊은 신뢰와 많은 시간과 아무리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은 기대와 끈기를 고용주보다 우리 당신들, 부모와 전문가들부터 먼저 가져주기를 부탁드린다.

서울대와 서울대 학생들을 명문대학과 능력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들의 아이큐가 아니라 사회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과 기회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학생과 복지관의 작업 재활을 받는 장애인들과 차이는 오로지 그것뿐이다. 그것이 장애인 노동 정책의 필자의 신념이자 관점이자 패러다임이다. 단지 이것을 하고 싶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라도 보장해주자. 그리고 그 주장에 동의할 수 없거나 지지할 수 없을지라도 비웃지는 말자.
표현할 수 있는 대자보라도 장애인에게, 지적 자폐성 장애인에게 허하라.    
 


쉽게 풀어 쓴 ‘세계인권선언’ 제 23조: 마음놓고 일하기 위하여
사람은 직업을 자유롭게 골라서 일할 권리를 갖는다.
노동조건은 일하는 사람에게 공정하고 유리한 것이어야 하며, 일터를 잃지 않도록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차별 없이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 일에 대한 대가는 일한 사람과 그 가족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일하는 사람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만들고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인권운동사랑방)
 

작성자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넷 사무국장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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