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서는 안 될 친구 > 대학생 기자단


잊혀져서는 안 될 친구

[신순규의 뉴욕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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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이기적입니다.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듣고 제가 가장 처음 한 일은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우리 식구나 아는 사람들이 세월호에 타지는 않았나 해서였지요. 어머니께서는 다들 괜찮다고 말씀해주셨고, 일단 안심을 한 저는, 사고가 참사가 되는 과정을 한국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듣기 시작했습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탈출했다는 말, 그러면서도 승객들에게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한 것, 구조 작업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일들, 그리고 참사가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해 왔던 통속적인 관례 등을 전해 들었습니다.

화가 나고, 안타까웠습니다. 유가족들은 물론이고, 탈출을 했지만 죄스러운 생각으로 괴로움에 시달릴 많은 분들에 대한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신나게 수학여행을 떠난 자식을 상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시 품에 안게 된 많은 부모님들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는, 일이 손에 잡히질 않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생각 속에서 저의 뇌리에 다시 돌아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칼럼을 쓰기 전에 그 친구의 가족과 연락하고 허락을 받았어야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저 J라고 하지요.

유학 오기 전까지 저는 서울맹학교를 다녔는데, 시각장애 학생들을 교육하는 이 특수학교의 졸업생 중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과 한국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활약하고 있는 존경받는 교수님들도 있고, 구글과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 최고가 되었어야 할 한 사람이 애석하게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바로 그녀가 서울맹학교 학생 중 제일 똑똑하다고 해도 그 말에 반대할 이가 없을 정도였던 J였습니다.

사실 저와 J는 같은 반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제가 학교를 늦게 들어갔기 때문에 J는 저보다 2학년이 높은 상급생이었고, 엄격했던 서울맹학교 규범에 따라, 제가 깍듯이 누나라고 불러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동창이셨던 저희 어머니들께서 오히려 친하게 지내셨지요. 그래서 제가 유학을 떠난 후에 J의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서 녹음된 한국 단편 소설집을 보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 공부를 한 J가 미국 유학을 왔을 때부터 우리들은 자주 연락을 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J와 동부에서만 살고 공부했던 저는 전화로 연락하는 친구가 되었지요. J가 똑똑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녀의 G.R.E.(대학원 입학시험) 영어 점수를 보고 저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어권에서 공부한 적이 없는 J의 점수와 미국에서 10여 년 동안 공부했던 저의 점수가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1995년 6월말, 새로운 투자은행 일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뉴스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정확하게 몇 명이 사망하고, 몇 명이 부상했는지도 모를 때, J가 두 여동생과 함께 그 백화점 안에 있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아주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가, 그것도 동생들과 같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셋 다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날, 저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생명은 누구의 것이든지 소중하지만, 몇 년 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그것도 우리 시각장애인들 중에 가장 유망했던 J가 의미 없는 사고로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는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뉴스를 하루하루 접하면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후, 한국에서 과연 빌딩 붕괴 사고가 사라졌는지 궁금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경주 리조트의 체육관 붕괴 사건을 비롯해, 새로 지은 아파아트 빌딩이 무너지는 등 나의 모국은 아직도 이런 의미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부터 세월호까지, 그리고 이런 비슷한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의 죽음을 참으로 슬퍼한다면, 이런 일이 다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말보다 실천은 아주 어렵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들의 희생에 의미를 주고, 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정치인의 사임이나 몇 사람들의 유죄 판결, 그리고 새로운 법을 통과시키는 것 등은 시작일 뿐입니다. 5년이 걸리든10년이 걸리든, 새로운 법과 정책을 준수하는 것이 습관이 되는 사회를 만들 때까지, 우리는 세월호와 삼풍백화점에서 희생된 이들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 가면, 베트남 전쟁 기념비가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미국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념비에 새겨 있습니다. 서울 중심지에 큰 기념비를 세우고 이런 참사로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들의 이름을 새기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들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될 때까지 말입니다.

작성자신순규 뉴욕 월가 애널리스트  aery727@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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