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제 폐지 희망고문 > 지난 칼럼


등급제 폐지 희망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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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의 가장 큰 변화는 7월 장애등급제 폐지다.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이번에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도 될 거 같다. 분명 문제는 생긴다. 낯선 제도인 만큼 제도 시행 초기 혼란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면 과연 장애인에게 장밋빛 세상이 펼쳐질까?

정부는 등급제 폐지를 앞두고 장애인 개인에게 필요한 맞춤형 복지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장애계에서도 최소한 등급제가 폐지되면 장애인들 삶의 질이 크게 나아지거나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장애인들도 어떤 설렘을 가지고 등급제 폐지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흡사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장애계와 장애인들을 감싸고 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무려 31년 만에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는데 단순히 복지카드의 고기 등급 표시만 사라지고 끝이라면 등급제 폐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당연하다.

정부가 제공한다는 맞춤형 복지는 장애인이 자신이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장애인이 빈곤상태에 놓여 있으면 최소한의 삶을 사는데 필요한 소득을 보전 받고,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하면 누구나 시간 제한 없이 활동지원 서비스를 제공 받고, 보조기기가 필요하면 가격 제한 없이 보조기기를 제공받는 게 맞춤형 복지다. 그런데 이게 과연 등급제 폐지로 가능해질까?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당장 내년 7월 등급제 폐지 후 장애인에게 맞춤형 복지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예산에 관련된 이야기가 없다. 정부나 국회는 예산 마련에 소극적이다. 정부 태도에서 추가 예산 확보 없이 현재 예산으로 뭉개보겠다는 무책임을 읽을 수 있다.

예산이 없는데 무슨 수로 장애인에게 맞춤형 복지를 제공하겠다는 것인가? 빈곤 장애인이 소득보전이 필요하면 어떻게 해줄 건지, 소득보전의 수준은 적어도 최저임금 수준 정도는 돼야 하는데 예산이 마련되지 않으면 결국 장애연금 수준의 소득보전 외에 기대할 게 없다. 변화가 없는 셈이다.

따져보면 장애인복지와 장애등급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장애등급과 상관없이 삶에 어려움이 있으면 국민의 권리로 요구해서 받을 수 있는 게 복지다. 이 사실을 망각하고 정부는 그동안 복지혜택에서 장애 등급으로 줄을 세웠다. 장애인들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어떻게든 중증의 장애 등급을 받으려고 애를 썼다. 등급제 폐지는 이런 악습의 폐지를 의미한다.

장애등급제는 이제 역사의 유물로 사라질 것인가? 등급제 폐지를 앞두고 드는 우려는 등급제가 없어지지 않고 종합조사표가 새로운 장애 등급 역할을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다. 그동안 정부가 장애 등급 1, 2급으로 줄을 세웠다면 명목상 등급제가 사라지는 내년부터는 종합조사표로 줄을 세울 것이다. 예산이 대폭 확충되지 않고 지금 있는 예산으로 나눈다면 상황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장애인들은 복지카드에 중증, 경증만 기재돼 있고 몇 등급 고기 등급이 사라졌다고 환호할 것인가?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보다 앞서 20년 불황을 겪은 일본의 장애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예산이 뒷받침 된 연금제도가 버팀목이 되어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세계 십 몇 위권의 경제대국이다. 정부가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개인별 지원을 해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장애계에서는 장애인 복지예산 증액을 위한 지난한 싸움이 펼쳐질 전망이다. 다행히 복지 예산 증액에는 이해당사자가 없다.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등급제 폐지는 허구이고 또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장애인 복지를 얘기하는 건 장애인들에게는 희망고문에 불과할 뿐이다.

통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때 당선되면 장애등급제를 우선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때 복지카드의 고기 등급만 없애겠다고 생각한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진심은 장애인들에게 맞춤형 복지를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의지를 실현할 때다.

작성자이태곤 편집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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