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한'여름의 끝자락을 보내는 나들이 > 지난 칼럼


'징한'여름의 끝자락을 보내는 나들이

지금 꼭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전시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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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변미양/지체장애인. 오사카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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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해야 할 새로운 일상
긴 장마에 체온 이상의 긴 무더위, 거기에다 모두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잦아오는 태풍. 코로나의 마스크로 표정이 가려져 있어 모두의 힘든 마음을 반밖에 짐작해 주지 못하는 건지, 참으로 무심한 하늘이다 싶은 이번 여름이었어요. 이제 겨우 그 끝자락이 보이는 건지 저녁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지고, 잠자리에 들 때 덮은 얇은 이불에서 끈적함이 아닌 포근함이 느껴지네요.
예측할 수 없는 다음 순간이지만, 대략은 지금껏 살아온 밥그릇 수로 짐작해 불안함을 눌러보기도 하고, 알 수 없으니까 기적이라도 일어날지 기대도 하며 사는 우리들의 일상이 싹 바뀌어버린 나날들. 그래도 명백한 건 이 순간은 한 번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다음 순간들로 이어진다는 거겠죠.
‘자가격리’나 ‘스테이 홈’이라는 말은 장애나 통증 등으로 이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늘상 겪고 있는 일상의 현실이었죠.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도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으로 분산되어 가급적 이동을 제한하자는 말이지만, 그래도 역시 집 밖으로 나가 바깥바람도 쐬고 색다른 것도 보고 느끼는 시간이라는 게 참 필요한 것 같아요.
오랜만에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시내로 나가는 날을 잡았어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달력만큼 계절이 지나고 있음을 느끼면서 기분이 밝아지더라고요. 휠체어를 타고 외출할 때면 시선의 높이가 성인들의 허리나 가슴 정도이니, 아래 놓인 것들이 잘 보이거든요. 지하철을 탈 때 보니, 바닥에 ‘거리 두기’를 위해 표시된 발자국 그림이 보이더라고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덤덤하게 떨어져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하철 안에는 특별히 좌석에 앉지 말라는 표시는 붙어 있지 않았지만, 주일 낮시간 그리 승객이 많지 않으니 어느 정도 띄엄띄엄 앉아 있는 듯, 그리고 차 칸의 일부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운행하고 있더라고요.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먼저 탄 사람이 구석까지 들어가서 사이를 열어주곤 하죠. 코로나 속에서 지난 반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위기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조정하면서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 나가고 있구나, 세상살이의 요령을 시시각각 터득하며 변화를 익혀가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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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암불 입상(출처. 오사카시립미술관)




나만의 한숨 돌리기
동물원과 미술관 근처의 잔디광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자리를 잡고 앉아 먹기도, 마시기도 하면서 담소를 즐기고 있었어요. ‘3밀’이라고 일본에서 쓰기 시작한 용어 같은데요. ‘밀접, 밀집, 밀폐’ 세 가지를 다 막지는 못해도 세 가지가 중복되지는 않도록 조심하려고 의식은 하는 것 같은데, 잔디밭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이왕 나온 김에 불상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마스크 착용, 입구에서 체온 검사, 알코올 손 소독은 기본이고요. 미술관 안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옆 사람 신경 쓸 것도 없이 천천히 불상들을 볼 수 있었어요.
‘웬 불상이냐’고요? 특별히 예정한 건 아니었고, 세상이 복잡하고 속이 꼬일 때는 모든 것을 헤아려 줄 구원의 손길이나 온화한 표정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오사카의 유서 깊은 절에서 길게는 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불상들이라고 하니, 그 시간의 심오함에 한 번 빠져 봤죠.
다양한 목불과 석불들을 보니 여래불상을 지키는 수호신들의 울그락 불그락 겁주는 것 같은 표정, 천 개나 된다는 구원의 손길을 펼치는 천수보살, 세상만사 만인을 들여다보기 위해 머리 위에 달려 있다는 열 개도 넘는 갖가지 표정의 보살들의 얼굴….
어찌 보면 좀 엽기적이기도 한데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몇백 년도 더 넘은 그 불상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꾸밈없지만 권위가 있고, 가끔은 무섭기도 하며, 어떤 건 입술이 처져 좀 삐져 있는 듯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참 가지각색이더라고요. 말을 주고받지는 않아도 그 나름대로 사정을 살펴줄 것도 같고,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비치는 것 같더라고요.
중국 고찰의 불상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다 보고 나오니 출구 바로 옆에 커다란 석불이 놓여 있었어요. 안내판에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라고 쓰여 있네요. 아이고, 천백 살도 넘었을 이 불상은 어찌하다 이 일본 땅으로까지 오셨을까? 슬쩍 웃음을 띠는 것 같은 그 표정, 그건 질곡의 세월을 넘어 다다른 경지의 한 자락이 새겨진 듯 한참을 쳐다보게 되더군요.
일본에서는 여전히 전국적인 확진자 수가 수백 명을 넘는 날이 많아요. 하지만 불요불급한 외출은 자제하면서 거리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분위기에서, 이제는 방역 행동을 지키고 조심하면서 일상에 활기를 띄워가자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어요.
예술 스포츠 등 공연 활동이나 관람에는 아직 제약이 많고, 이전의 일상을 되찾기까지 이 코로나 사태가 언제까지 계속되려나 끝이 안 보여 초조한 마음도 많지만, 천 년의 불상을 보고 나오니 이런 1년, 2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닌 듯 깊게 숨 한번 돌리게 되고, 역시 나들이가 좋네요. 


작성자최고관리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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