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한 가정을 통해 본 장애문제 > 대학생 기자단


[붓소리] 한 가정을 통해 본 장애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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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다보면 놀랄 일도 많다. 요즘같이 급변하는 세상살이에는 충격적일 때도 많다. 얼마 전 밤 11시가 넘었는데 전화 상담할 기회가 있었다. 한 가정에 장애우가 몇 명 있는데 그 가정을 위해 상담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어느 여성의 애절한 음성이었다.
 전화를 받는 둥 마는 둥 곧바로 장애우가 있다는 그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 가정에서는 학수고대 상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사정을 얘기하면서 자녀 중 4명이 장애우라는 사실에 나는 첫 번째로 놀랐다.
 아들 둘, 딸 셋, 그러니까 자녀 중에 네 명이 정신지체장애우라는 사실은 놀람을 넘어 충격이었다. 큰 딸 32세, 둘째 딸 30세 큰아들 28세, 둘째 아들 22세, 막내 딸 18세, 이중 둘째딸만 비장애우이고 두 딸과 두 아들이「소두중」(micrencephalon)으로 정신지체라는 것이다.

 남편이 군대시절 방사능계통의 업무를 담당한 것이 원인이라고 분석한 부인께서는 숫자개념이 지나치게 약하고 지능이 떨어져 네 명의 아이들은 일반학교는 물론 특수학교에도 취학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택시 운전으로 생활하는 형편으로 다섯 자녀를 특수하게 지도하는 상담을 하는 동안 또 한번 놀랐다.
 부인께서는 네 명의 장애우 생명을 하늘이 준 선물로 생각하고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한번도 왜 우리아이가 이럴까? 좌절이나 번민하지 않고 신의 큰 뜻과 섭리가 있지 않을까? 하며 키워 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놀란 것은 국가적인 복지대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생활보호대상자나 의료부조대상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족 중 4명의 장애우가 있어도 혜택이나 장래보장책이 없다는 것이다. 네 명의 장애우, 그 속에 있는 한 명의 비장애우와 어머니 아버지의 문제는 비단 그 가정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역학적으로 장애발생원인을 줄잡아 200여가지로 분석하는 것을 볼 때, 한 원인으로 고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가정의 어머니가 말했듯이 군대시절 방사능에의 오염이 하나의 원인이었다면 우리국가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도 든다. 우선 국가·사회에서 장애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요청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장애우의 문제와 그 가정에서 겪는 문제를 그 소속된 집단이나 개인에 한정시키던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장애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극복의지에 호소해온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어디 장애문제가 개인문제로 돌릴 수 있는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는 장애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산업재해, 교통사고 세계 제 1∼2위를 달리는 불명예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로써 어떻게 장애우 발생을 개인문제로만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정부에서 장애우 복지를 외면해 온 것은 아니다. 88년 이후 여러 면에서 장애우복지의 국가적인 목표 속에 장애우복지를 이루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한 가정, 한 가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장애우복지가 무 대책일까? 그것은 장애우 복지를 장애우 중심의 복지, 즉 장애우 복지가 국가사회정책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시킨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시설장애우, 기아장애우, 요보호장애우를 우선 하는 복지정책은 대다수 재가장애우를 소외시키고 있고, 이런 정책의 부재는 장애우를 더 동정적으로 보는데 일조 했던 것이다.

 더구나 정당이 정략적으로 정치적으로 장애우 복지를 적당히 이용한 것도 근본적인 복지대책을 더욱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장애우를 자선의 대상, 자혜의 대상으로 만든 요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우리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복지국가의 정치적 형태는 민주주의이다. 이중 제일 주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국민에 의한 정치(by the people)이다.

 우리가 지방자치제를 풀뿌리 민주주의로 선호하고 희망하는 것도 주민의 참여에 의해서 행해지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장애우복지를 논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맥락에서 장애우가 주체적으로 참여해야함은 당연한 것이고 장애우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장애우는 인권의 본체이며 인간보장의 실체인 것이다. 한 가정에 한 명이 있든지 여러 명이 있든지 간에 우리는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존엄 하는 사상이 있어야 함도 자명한 것이다.

 사실, 놀랄 일이 자주 있는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그 사회가 좋은 것은 아니다. 항상 자연스러움이 아름답고 유익하다.「복지」(welfare)라는 말의 뜻이「안녕」이나「행복」이다.
 자주 놀라는 것은 복지가 아니다. 놀라지 않는 정치, 충격을 주지 않는 경제,「전체주의」사상이 지배하지 않는 사회문화가 바람직하다. 이제「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우리는 함께 걸어야 한다. 장애우가 앞설 때 비장애우 형제들이 밀어주어야 한다.
 정도 사랑도 나누며, 함께 손을 잡고 걷자. 다시는 놀라는 가정이 없게, 다시는 충격요법이나 전쟁 같은 용어도 없도록 말이다.
 장애우 4명을 둔 그 가정에 가장 바람직한 복지대책이 수립되어 활짝 웃으며 함께 뛰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날을 기대해 본다. 

글/김종인
 

작성자김종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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