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애인의 삶] 나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 지난 칼럼


[어떤 장애인의 삶] 나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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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다 보니 우리는 서로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주고 아픈 부분을 감싸 준 순수한 우정의 사나이들이었던 것이다."

서른 다섯의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어떠한 의미를 느끼기 보다는 평범해 보길 원해서인지 아직까지 부족함 투성이다.
엊그제 만난 어느 친구의 고백이 내 가슴에 와서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가 된 것은 또 무슨 운명의 예언일까?
"스스로에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까 매사가 자연스럽고 특히 남을 대하기가 편하더라.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는 놈이 남에게 무얼 기대 하겠니? 실망할 것도 피곤해 할 것도 없더라. 네 놈도 완벽한 걸로 따지자면 내 할배 뻘이지만 난 이제부터 이렇게 살기로 했다."

사람의 천성이나 성격이 맘 먹은대로 쉬이 바뀢도 않거니와 "제 버릇 남 못준다." 는 옛 어른들 말씀이 백번 천번 맞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그 친구 말대로 살아 봐야지 하고 홀로 다짐해 본다.
두돌 때인가 열이 난 뒤 오른쪽 다리에 이상이 생겼다. 그러나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나 EH한 동네 조무래기들과 어울리는데 큰 불편이 없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에 입학해서야 비로소 다른 애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국민학교 1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그렇지 않아도 수줍을음 곧잘 타는 성격이었는데 불편한 몸에 경상도 사투리까지 무장(?)했으니 짖궂은 사내아이들의 놀이감 대상으로 얼마나 적합했으랴!

하교 길에 혼자서 집으로 걸어가며 반 동무들이 쏘아 보낸 신체부위와 관련된 몹쓸 말들을 귓가에서 멀리 밀어내기 위해 도리질을 하던 일을 생각하면, 하도 많이 들어서 귀 뿐 아니라 머릿속까지 면역 상태가 된 지금도 알 수 없는 설움이 치솟는다. 한편으론 사진처럼 잘 보관하고픈 일도 있었다. 보건시간(지금의 체육시간에 해당됨) 샅바를 붙잡고 씨름하다가 모래판에 맥없이 주저 앉고도 웃었던 일, 남에게 뒤지지 않는 턱걸이 종목과 멀리 던지기 종목에서 은근히 억척스러움을 발휘했던 순간 등은 내 인생의 한 페이지에 꽈∼악 눌러 박아두고 싶은 장면 들이었다. 그런 내게 일곱 살 많은 형이 있었다. 형은 나를 어디나 데리고 다녔다. 야구장이든 극장이든, 내가 갈 수 있다고만 하면 아무말 않고 일행에 끼워 주었다.
그것이 내게는 어디든 쏘다닐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고 그래서 형이 없는 날, 혼자 남산에 올라가 보기도 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여름,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형이 익사를 했다. "할 말이 없다" 는 어른들의 표현이 바로 이럴 때를 위해 생겨난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형이 내 곁에서 떠난 뒤 한동안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냥 학교에서 집으로 왔다 갔다 했을 뿐, 달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이렇다할 증거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솔직히 솔직히 말하자면 실력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나는 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집에서 1년동안 더 공부 한 뒤 다시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일년 뒤 시험에 붙고보니 엉뚱한 곳에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학교를 매일 오가는 것이 내 경우 얼마나 좋은 운동이었는지 그때까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1년 동안 집에서 공부하는 동안 키도 쑥쑥 크고 체중은 부쩍 늘어난데 비해 돌아다니지 않았던 탓에 오른쪽 다리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에는 어머니께서 학교까지 책가방을 들어다 주기로 하셨고 수업이 끝난 오후에는 누나 둘이 번갈아 가며 교문 밖에서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도 한냥 중학교때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인정을 받았었고 여러 사람들 앞에 불려나가 상을 받을 만큼 재수가 따라 주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나 됨"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게 하고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이었다. 엄지 손톱의 생긴 모양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고민고민 할 사춘기 시절에 내가 그 녀석들을 친구로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내 생각이나 성질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언짢은 일이 있으면 있다고 불만을 털어 놓음으로써 나로 하여금 우리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게끔 도와 주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우리는 서로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주고 아픈 부분을 감싸 준 순수한 우정의 사나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친구들과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연락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픈 마음이니까.
행복했던 고교 시절을 마무리하고 치룬 대학 시험은 씁쓸한 뒷 맛을 가져다 주었다. 천성이 느긋한 까닭에 남보다 늦게 대학에 진학한다는 현실을 놓고도 그다지 조급해 하거나 속상해 하지도 않았고, 광화문에 있는 재수 학원을 들락거리는 것 조차 답답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 답지 않게 부지런을 피우며, 안개가 자욱한 새벽을 가르고 새벽 단과반을 추가로 청강한 일들이 차가운 아침 공기마냥 신선하게 떠 오른다. 일년 뒤 나는 내 성적에 걸맞는 지질학과를 무난히 통과했다.

대학이라고 들어와 보니, 기대했던 바와 판이하게 달라 처음엔 실망이 대단했다. 고매하신 교수님들의 강의 내용이 고등학교때 배운 것을 재방송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강의가 별다른 맛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전공에 대한 매력을 갖게 해준 사건이 생겼다. 일반 화학 실험시간 실험실에서 시약을 일정 비율로 섞어 아스피린을 만들었는데 조교가 내가 한 실험 솜씨가 제일 우수하다고 과 급우들 앞에서 칭찬을 해 주었던 것이다. 실험실에서의 자신감은 2학년 2학기 때부터 실시된 야외 지질조사 (한달에 한번씩 암석을 찾아 야외로 나가는 일로 조사라기 보다 "산악 훈련" 이라는 명칭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수업에서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되었다. 산길을 걸어 다니는데 있어서도 남보다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지만 야외 조사후 실험실에서의 현미경 관찰을 하는데 있어서는 누구 보다도 열심히 좋은 실험 결과를 만들어 낼 자신감이 있었기에 신체적인 약점이 정신적인 약점으로까지 번지지 않은 듯하다.

필자주 : 지질학이란 지구의 구조 조직 및 지각의 발달 역사를 계통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야외조사와 현미경 관찰 작업이 뒤따른다. 야외 조사란 지구를 형성하고 있는 암석의 현상들을 찾아내는 작업이요. 현미경 관찰이란 얇게 간 암석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그 암석들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을 밝혀 냄으로써 암석의 생성 조건과 기원을 알아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지각 형성 과정을 알아보고 자원(금속, 비금속, 석유)을 개발하여 경제적인 면, 삶에 유용한 재료를 찾아내는 이차적 과학이라 할 수 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후배들이 지질학과를 선택할 상황을 고려해서 내가 사용한 보완책을 말해주자면 다음과 같다.
내 경우 야외 조사가 남보다 힘겨운만큼 조사에 나서기전 준비를 치밀하게 하여 두 번 가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고 실험실에서의 작업도 누구보다도 많은 연습을 함으로써 실험 횟수에 비례하여 완벽한 결과가 나오도록 신중을 기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남의 눈을 의식할 만한 센스가 있어 때때로 하고픈만큼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 자존심을 내세워 포기해 버릴까 하고 망설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한계가 있지, 나약하지 그러니까 적당히 해도 되고 실수를 해도 된다" 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 하는 것을 나 자신이 무척 싫어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그럭저럭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전공에 자신감이 생겼을 때 같이 입학했던 친구들은 군대로 떠나고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퍽이나 열심히 편지를 써 보냄으로써 그들과의 공간적 거리를 메꾸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사회에서나마 봉사 할 수 있길 기대하며 어러곳에 이력서도 보내보고 공채시험도,  치뤄 보았다. 어느 곳에서도 내가 설 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 시대는 지금의 졸업 정원제 졸업생들과 달리 대학 졸업자만 있으면 취직의 문은 넓었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내겐 좁은 문이여서 다시 학교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처음의 의도는 취직이 안 되니까 차선의 방책으로 찾은 돌파구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왕 선택한 길이라면 후회없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원 과정에서는 내 신체조건에 유리하고 같은 노력을 투자했을 때 잘 해낼 수 있는 암석학 전공을 선택했다. 현미경 관찰을 주로 하는 암석학의 단점이라면 실용적인 면 보다, 순수학문의 측면이 강하다 하는 것이었다. (지질학과의 대학원과정은 광상학, 고생물학, 구조지질학, 지구물리학, 암석학, 층서학, 해양지질학, 광물학 등 석사과정 기간동안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돌의 화려한 색깔과 다양한 모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2년이란 시간의 절대적 길이를 잃고 지냈을 정도였다. 석사학위를 딴 뒤, 또 다시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취직하기 위해 모 관공서에 서류를 제출했다. 면접날 고위층 면접관이라하는 사람이 내게 하는 말인 즉, "여기는 대내외적으로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라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은 근무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비관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일을 자꾸 당하다 보니 나의 "나 됨"에 대해서 회의가 들었다. 여하튼 당장에 "실업자" 소리를 듣는 것이 두려워 또 다시 대학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남보다 긴 시간을 투자한 끝에 올해 88년 2월 암석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서 지금까지 생각되어지고 있는 문제는 어느 상황에서나 자신의 배움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대하는 기쁨, 서로 알게되는 인연들이 모자란다는 새로운 환경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가 겸손한 마음이 변하지 않게 고집스러워지고 싶다.

그동안 후배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감사하고 그 후배들이 공부문제 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문제 상담까지 두루두루 요구 해 올 정도로 내게 대한 신뢰감을 표시해 주었을 때 사는 맛과 기쁨을 느꼈다고나 할까. 삶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는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고, 그로 인한 실망과 혼란이 있을지라도 또한 자기가 쏟은 노력의 결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또 다시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의연한 용기를 후배들이 발휘하길 기대해 본다.
또한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에게서라도 우리는 모두가 인간이라는 공동분모에서 동질성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그리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배울점이 있고 서로의 존재가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넓은 가슴을 자져주길 기대해 본다.
끝으로 서른 다섯해를 살아오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학벌이나 그 밖의 많은 다른 조건에 상관없이 속해 있는 환경에서 열심히 일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발견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들이며 누구보다 떳떳하고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나도 그런 사람들의 벗(友)이 되고플 뿐이다.

작성자김영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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