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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투고 2] 함께 삶의 기쁨을

제 1회 전국 카톨릭 장애자복지대회를 다녀와서

본문

두루두루 친구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격려의 말씀을 들음으로 위안도 얻고, 마지막으로 베네딕또 수녀원의 비아 수녀님과 통화가 됐을 때 부탁드린 말씀이 있었다.
"수녀님, 그곳 저를 알고 있는 수녀님께 제가 대회장에서 떨지 않고 얘기를 잘 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려 주세요."
이로써 수녀원의 여러 수녀님들의 기도와 알게 모르게 나를 위해 염려와 걱정, 기도해 주시는 내 사랑하는 친구들의 기도를 등에 업음으로 서울행 준비를 모두 마친 것이고, 그들의 기도가 내게는 큰 힘과 용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천주의 성모여,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빌어 조소서. 하느님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출발 (9월 12일)
내가 언제 지난밤처럼 잠 못잔 일이 있었던가. 작년 13년만의 외출을 하는 날 밤도 어젯밤처럼 꼬박 하얗게 지새지는 않았었다. (2시간 정도 자기는 했지만) 비록 놀러가는 것이 아니고 얘기하려 가는, 짐 하나 들고 가는 기분이긴 했어도 얼마간의 서울 여행인가.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서울로 가긴 했어도, 신설 된지 2년밖에 되지 않은 학교였던지라 경험 없는 선생님들의 인솔 덕분에 때늦은 서울도착으로 인해 문이 닫힌 국립박물관은 구경도 못했고, 선생님들의 꽁무니만 따라 다니는 주마간산격의 서울여행, 어디 그게 올바른 여행이었겠는가. 점역으로 인해 하나 둘 알게된 서울에의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쁨, 경제발전으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서울의 참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다는 가슴설레임, 대회자에서의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의 기대 등등이 겹쳐져 잠못이루었던 것이리라.
며칠 전부터 날씨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 유난히도, 거의 하루도 빠진 날 없이 비 많았던 여름에의 날씨가 이날만은 해가 쨍쨍 내리쬐는 맑은 날이 되게 해달라고, 흐려도 좋으니 제발 비만은 오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전부터 꾸물거리던 날씨가 걱정이 되더니, 12일 새벽이 되자 후두둑 후두둑 한두방울 비를 뿌리고 기어이 내 마음의 기도도 아랑곳없이 제법 세차게 비는 내리기 시작했다.
"하느님, 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오늘 저의 14년만의 서울에의 여행에 기어이 비를 뿌리시는 것이옵니까. 너무 하옵니다."
그러나 어쩔것인가. 여행에의 들뜬 기분이 조금(?) 상하긴 했어도 비 온다고 모든 일정을 취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부산 맹인복지협회의 봉고차는 정확히 4시 30분 우리집 앞에 도착했고 들것에 실린 나는 남동생과 함께 출발, 그리고 우리집 앞 아파트에 잠시 멈춰 새벽차 잡기 힘들다며 태워 달랬던, 대회에 함께 참가할 맑고 깨끗한 모습의 안나씨를 (휠체어 장애인) 태워 약속 장소인 수정동 성당으로 갔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리 일행의 출발은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부산시내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내가 제일 먼저 보고 느꼈던 것은, 13년만의 외출에서는 낮이라 별로 가슴에 와닿지 못했던 ○○산(군사기일 관계가 있을 것 같아 정확한 산 이름을 밝히지 않음.) 정상에 사방으로 휘황찬란하게 불빛이 밝은 도시방어 미사일 기지였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지만 모든 필수품은 미군들이 헬기로 공급한다는 대부님의 말씀에 남북 분단의 비극이 새삼 가슴에 와닿아 섬뜩함을 느꼈던 것이다.
어슴푸레한 새벽을 뜷고 시내를 벗어났어도 비는 내려 우리 일행을 걱정스럽게 만들더니 "장애인들의 행사에 비 온 일 없다"는 이 이사님의 말씀이 맞아 떨어져 경산 휴게소에 도착할 즈음 날씨는 흐렸어도 비는 그쳤던 것이다. 누군가 아침을 먹자고 제의를 했지만 모두들 사양했고, 잠시 쉰 후 그대로 출발, 그때부터는 날도 밝아 차량 밖을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끝없이 줄을 잇는 컨테이너를 실은 차와 화물차들 국토종단의  대동맥으로써의 산업도로의 역할을 실감케 했으며,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말은 이미 학교에서 배워 아는 일이었지만 도로 양 옆으로 산과 산이 손을 맞잡아 우뚝우뚝 솟은 그 모양새 하나하나, 아침 미명 속에 자욱한 안개는 그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고 모든 생명체들이 깨어 일어나는 아침,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 자연산천의 장관이 아니던가.
정상인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산과 들, 물이요, 집들이라 별다른 느낌은 가질 수 없을지 모르지만, 14년만의 서울 외출에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아니 내 생애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바깥 풍경 하나하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새롭고 가슴 벅차기만해 우리 일행들이 한번씩은 잠들었어도 나만은 눈을 말똥거린 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가는 길 오는 길 내다보지 않았던가. 늘 방안에서 생활하던 우물안 개구리가 세상구경을 나왔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떠나기 전 제일 관심 깊게 보고 싶었던 것은 두 차례의 태풍과 유난스레 비가 많았던 올 여름의 벼농사가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들판의 곡식들은 누렇게 잘 자라 익어가고 있어 황금의 벌판이 멀지 않음을 알려주어 다소 안심은 되었지만, 6백 밀리 이상의 비가 내렸던 충청도 지역의 벼농사는 어떨까 하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유언비어이기를 바라지만, 충청도 지역은 보도관제가 될만큼 피해가 극심했다는데... 서울로 올라 갈수록 구름은 걷히고 전형적인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내 풍경을 보니 박 기사는 운전에 열중이었고, 그 옆의 대부님과 맨 뒷자리의 아가다씨는 간 밤에 설쳤던 잠을 보충하려는 듯 가끔씩 잠속으로 빠져 들었으며 내 옆의 이 이사님과 나, 남동생과 문양은 서로 짝이되어 얘기 상대가 되었다. 난 역시 말주변이 없어 주로 듣는 편이었고 문양과 동생은 죽이 맞아 끊임없는 얘기가 오고갔다. 말이 많은 쪽은 그래도 동생이었고, 즉석 게임을 만들어 내기도 했으며 가끔씩은 우스개 소리를 늘어 놓아 우리 일행의 배꼽을 잡게도 만들었다. 동생의 그런 저런 애기가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오죽했으면 문양이 "동생이 이름 종삼이라는 종삼은 종달세 세 마리가 재잘거린대서 종삼이라 이름 지었을 것" 이라고 했을까.
나 역시 동생의 일면을 새롭게 발견한 이번 여행이었던 것 같다.


독립기념관
충청남도 천원군에 있는 독립기념관
예정대로라면 나자로 마을에 들러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 부산서 출발한 것이고, 우리 일행 모두는 당연히 그럴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는 도중 독립기념관 표지판이 나오자 "우리 독립기념관에 들렀다 가는게 어때요" 대부님이 말씀하셨다. 그때는 벌써 우리가 두 번째로 쉰 금강 휴게소에서부터 대부님이 운전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좋아요"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기쁜 마음에 들떠 대답했다.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15분쯤 달렸을 때 흑성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독립기념관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늘 높이 찌를 듯이 우뚝솟은 겨레의 탑과 일직선으로 바라보이는 그 장엄한 「겨레의 집」, 「겨레의 집」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부속 전시관들이 주변의 풍경과 분수와 조화를 이루어 자아내는 그 가슴 벅찬 감동과 감정을 어찌 다 말로 표현 할 수 있으랴.

"야-!" 한마디 만으로 밖에 표현 할 길이 없음에의 이 안타까움.
토요일이라 그랬던지 개관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랬던지 주차장은 크고 작은 차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곳곳에 사람들로 그 넓은 광장이 좁게만 보이는 차와 사람 사람 사람들.
차를 주차시킬 곳이 아주 없는게 아니었지만 문제는 들것에 엎드려 있는 내가 주차장에서 「겨레의 집」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들것을 들고가는 일행들이 너무 힘이들게  뻔한 일이기에 어떻게 할까 어려움에 부딪친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차를 외곽으로 몰아 겨레의 집 가까운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또 다른 장애에 부딪치고 말았다. 경비를 맡고 있는 순경들이 철문을 굳게 닫아놓고 이곳은 대통령 전용도로이니 어떠한 차와 사람도 출입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난감한 상태에서 내가 장애인이라는 최대의 무기를 내세울 수 밖에 없었다. 대부님이 차에서 내려 경비중인 세명의 순경중 한 순경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이 사람은(나) 장애인인데 서울장애복지대회에 참가 중 들렀다 갈려고 왔으니 좀 들여보내 주세요."
"안됩니다. 여기는 어떠한 차도 사람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순경이 강경하게 대답했다.
대통령 전용도로라는 사실은 나중에 그곳 관리인으로부터 들어 안 일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정말 거긴 차도 사람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부산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좀 안되겠습니까?" 대부님이 재차 사정을 얘기했다. 강경하게 나오던 순경도 내 모습을 보더니 좀 누그러졌다. 대부님과 바로 앞 초소안의 상관인 듯한 순경과 긴 얘기가 오가더니 초소안의 순경이 전화기를 집어들고 상부에 또 물어보는 모양으로 5분의 시간이 지났다.
결국은 허락이 떨어진 모양으로 대부님더러 입장권을 사오란다. 7장의 입장권을 내미니 그제야 철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란다.

난 돈을 내지는 않았지만 온 국민의 성금으로 이루어진, 한 특정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나 아닌 우리들의 기념관일진대 그만한 융통성조차도 없다면 차라리 기념관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닫아 걸든지 아예 짓지 말았어야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안으로 들어가 「겨레의 집」최단 거리에 차를 세워서 몇장의 기념사진을 찍으려니 관리인이 다가와서 여긴 차를 주차시길 수 없는 곳이니 자꾸만 차를 빼라한다. 관리인의 성화에 못이겨 차를 빼서 주차시킬 수 있는 곳에 세우고 처음으로 봉고차 안에서 밖으로 나왔다.

현대에 맞는 한국전통 양식의 구리 기와로 지은 「겨레의 집」에 불이나는 바람에 말도 많았던 곳, 일년여 보수공사 끝에 올해 8월 15일에야 비로소 개관을 했던 독립기념관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건물 「겨레의 집」그안에 들어서니 여러 군상들이 피라밋 형식으로 모여 앞으로, 미래로 가자는 뜻으로 제일 왼쪽의 사람이 왼팔을 길게 뻗어 앞으로 손가락질한 거대한 탑은 나나 우리 일행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했다.
몇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들것에 바퀴가 달려있어 끌고 나오니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탑 구경을 하다말고 내 쪽으로 쏠린다. 탑보다는 내가 더 구경거리(?) 인 모양이었다. 이런 시선들은 어디에서나 내가 차에서 내릴 때마다 느낄 수 있는 것이어서 조금 쑥스럽기는 했어도 내 마음은 볼테면 보라는 식의 담담한 마음도 들었다. "내 눈에는 당신들 걸어다니는 모습이 오히려 구경거리로 보이는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될 수 있으면 얼굴에 미소를 띄려고 노력 했다.

시간관계로 주변 부속건물의 유물전시관은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겨레의 집」과 탑 구경만으로도 다 본 것 같은 충만한 기분이 들어 유물전시관을 둘러볼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흑성산 방송중계탑이 바라보이는 적당한 장소에서 비로소 아침겸 점심을 문양이 싸온 김밥을 국민학생 소풍나온 기분으로 맛있게 먹고, 기념관을 빠져나와 서울행 고속도로에 올랐다.
독립기념관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기 때문에 대회시간 내에 도착 못할 것 같아 안양의 나자로 마을에는 들리지 못했다. 3대의 관광버스로 온 팀들은 길을 잘못들어 나자로 마을에 도착하긴 했어도 30분 밖에 체류못하고 별 구경도 못한채 나왔다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래도 우리팀들이 알찬 추억을 남겼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부님 덕분에-

서울에서
고속도로 톨케이트를 빠져나와 서울에 첫 입성해서 느꼈던 것은 숨이 탁 막히는 공기의 탁함이었다. 이런 공기 속에서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의문도 생겼지만 또 그런대로 살아가면 살아지는 것이 인간사가 아니던가. 도로 양 옆으로 줄비하게 늘어선 도시속의 아파트 아니 아파트 속의 도시. 한 마디로 서울은 아파트의 천국 같았다. 서강대학 대회장으로 가는 도중 몇 개나 되는 한강 다리를 건넜는지 모르지만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잘 가꾸고 다듬어진 한강변과 푸른 잔디의 시민공원들 그렇게 푸르게 맑지는 못해도 그런대로 깨끗한 강물은 수도서울의 젖줄이 아니더냐. 얼기설기 거미줄처럼 얽힌 도로망 역시 수도 서울의 복잡함을 실감케 했고 서강대학을 찾지 못해 헤메기도 했다. 서울 지리를 좀 알고 계셨던 대부님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서울미아가 됐을 것이리라.
3시 조금 넘어 대회장에 도착하니 참가한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체육관 안의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성가 소리는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참가중인 사람들의 나에 대한 시선은,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나 싶은 어떤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게 했다.

지방에서 참가할 사람이 다 모이지 않아, 원종배씨의 사회로 시작된 개회식은 30분이 줄여졌고 잠시 휴식한 다음 성공사례발표가 시작되었다. 단상에 올라가 적당한 높이의 책상에서 내려다 보니 집 떠나올 때 많이 떨릴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담담한 마음이었으니 이는 나를 위해 알게 모르게 기도해 주신 사랑하는 친구들의 기도 때문이었으리라.

첫 번째로 시각장애인 조재훈씨 얘기가 있었고, 듣지는 못하면서도 듣는이로 하여금 전혀 청각장애인이라고는 느끼지 못할 만큼 발음이 똑똑한 청각장애인 전원석씨, 세 번째로 자녀 3형제중 막내아들 바오로의 전신지체장애로 온가족이 그 아들 교육에 매달리다시피 지금은 어느정도 말할 수 있다는, 더구나 그 아들로 인해 가정이 더 화목해졌다는 바오로의 어머니 정종화씨의 얘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역시 청중 앞에 나서서 얘기한 경험이 없던 터라 약간 초조하고 긴장되고 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서두를 꺼내고 얘기가 시작되었을 때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담담한 마음이었고, 그런대로 얘기를 잘 풀어 나갔다. 단하나 그전까지 다 보이던 사람들의 눈, 코, 입들은 어디로 가고 머리만 보이고 알록달록 옷색깔만 요란했으니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게 없었던 것이다.

".......하루 열시간 이 일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너무 잘 하려는 강박관념과 긴장 때문에 다음말이 떠오르지 않아 눈앞이 캄캄했다. 청중들은 나의 다음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외웠던 원고의 다음말이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가지고 간 원고를 이리저리 뒤적거렸지만 여기가 거기같고 거기가 여긴 것 같아 내 머릿속은 온통 혼란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한참을 헤메며 당황하고 있는데 사회자 방귀희씨가 재치있게 넘겼다.
"지금 임종욱씨는 엎드려서 얘기하기 때문에 힘이들어서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난 힘이들어서가 아니라 다음말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던 것인데..
갑자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내 생전 처름 받아보는 청중들의 박수 소리에 힘입어 다음말을 찾아 이어 나갔고, 그후도 두차례 잠시 잠시 머뭇거렸지만 발표자 가운데 제일 많은 네차례의 박수를 받고 그런대로 얘기를 끝마쳤던 것이다.
"후-" 안도의 한숨소리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휴식시간이 되었을 때 나혼자 곰곰 생각해 보니 뭔지 모르게 부족한 것 같았고, 또 내가 꼭 청중들에게 잘못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나운서인 대부님께서도 당신 자신이 방송을 하시지만 이제껏 한번도 만족한 방송을 한적이 없노라고 위로 격려해 주셨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조리있게 얘기를 잘했노라했다. 정말 그랬을까?.....
다음 프로그램도 있긴 했었지만 우리는 숙소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초 우리 일행들은 부산을 떠나올 때, 부산 맹인복지협회 사무국장을 하다가 몇 개월 전 서울에 올라와 여관을 하는 박정근씨 댁에 머물 에정이었다. 헌데 주최측에서 민박 가정이 준비되었으니 그리고 가야 된다는 것이 아닌가. 민박이냐 박정근씨댁이냐 말이 많았지만 결국은 몇 달 전부터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를 해오신 민박가정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다해서 그리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차를 타고 서울시내를 한바퀴 돈 것 같은 제법 긴 시간을 달리면서 바라본 서울야경, 낮의 모든 추한 것을 어둠으로 덮어버리고 빛나는 한강변의 가로등과 시가지의 불빛, 불빛들..
마치 내가 환상의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질만큼 그 아름다운 서울야경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민박 가정에 도착해 방에 들어섰을 때 은은하게 풍겨져 나오는 신앙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가정의 화목과 가족들의 신앙심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고, TV에서는 막 9시 저녁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게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깨끗한 가재도구들. 그리고 따뜻한 환대와 맛갈스러운 음식들은 집에서 지금껏 어머니가 정성들여 만들어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갑자기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비록 짧은 시간의 만남과 체류로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백년지기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정다운 그 얼굴 모습들이었다.
새벽 5시, 잠들어 있는 아들을 깨워 미사에 가자시던 인자하신 모습의 할머니 조경희님, 벗겨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뒷머리를 쓸어 올렸고, 살이쪄 뺄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박경수님,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로 성가를 흥얼거리던 강영자님, 온순하고 착실해 보이는 상훈군과 성호군.
내 어찌 그들을 잊으리요.


밤 12시경 잠이 들었고....
귀뚜라미 소리와 이름모를 풀벌레 소리로 아침을 맞았다. 정말 잘 차려진 아침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고 박경수님의 자가용 에스코트로 워커힐로 갔다. 워커힐에서 박경수님과는 대회장에서 다시 만나자며 헤어졌는데 끝내 만나질 못했다.
대회 이틀째도 여러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내가 언제 다시 보게 되리라고 기약할 수도 없는 서울이었기에 3시 미사만 참례하기로하고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는 꼭 알맞은 워커힐 오솔길을 내려와 잠실 올림픽 경기장으로 갔다. TV 화면으로만 보아오던 올림픽 경기장에는 테러폭발을 막기 위해 순경이 경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기에 또다시 내가 장애인이라는 무기를 내세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TV화면상으로는 그렇게 웅장하고 크게 보이던 잠실 올림픽경기장, 막상 들어가 보니 작게만 보여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스탠드에 올라가 보면 크게 보인다고 순경이 말했지만 그러나 어쟀던 TV로 보았던 올림픽 경기장의 웅장한 모습은 모두가 카메라의 장난이요 조화였던 것이다. 경기장을 나올 때 전경들이 마스크를 쓰고 데모 진압훈련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전경 본연의 의무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 나라 세태에 가슴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너와 내가 하나일 때 이 나라도 발전하는 것을, 반쪽나라 한국이라는 쪽배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남산.
타워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전경은 매연과 각종 공해로 인한 스모그 현상으로 멀리 산이 안개에 가려진 듯 희뿌옇게 흐려 있었고, 그러면서도 푸른색 녹지대가 많이 보이는 수도 서울은 넓고도 넓었다. 멀리 63층 빌딩은 나 보라는 듯 우뚝 솟아 있었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을 볼 수 있었다.
명동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어쩌면 그렇게 시간이 맞아 떨어졌는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미사를 마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나오고 있었고 곧 바로 영세식이 있을거라했다. 미사와 영세식 그 사이의 짧은 시각에 꼭 알맞게 도착을 했던 것이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3시경 대회장에 도착하니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우러러 보는 듯한, 존경하는 듯한 눈길들은 내가 무슨 영웅이나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하느님, 용서하소서 이 교만을"
미사도 끝났고 김수환 추기경님과 악수를 나누는 영광스러움도 맛봤지만, 나와의 인연에 스스로 생에 최대의 펜팔 친구라고 까지 말씀하셨던 시인 안혜초님(잠시 미국체류 중임) "내일은 푸른 하늘"진행자 권기순님, 그리고 이종사촌 누님을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부산으로
박정근씨 맹인부부와 여러분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면서 4시 30분 서울을 떠났다. 오시면서 내내 안나씨와 동행 못함을 아쉬워하셨던 이 이사님의 소망이 이루어져 이번에는 내려가는 길이나마 안나씨와 그 어머니도 함께 봉고에 올랐던 것이다.

본격적인 고속도로를 접어들면서 도로 양 옆의 경기평야의 벼이삭들은 하루 사이에 더욱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뉘엿뉘엿 석양이 지면서 하늘의 구름은 연분홍으로 물들고 있었다. 1박 2일의 짧고도 긴 여행은 나나 우리 일행들의 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고 봉고는 남으로 남으로 달리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부산에 거의 다 와서 양산 부근에서 한번 과속으로 경찰 백차에 걸렸지만 또 다시 나 자신의 장애를 내세워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기억은 잊을 수 없으리라.
서울에서 알게 모르게 만났던 하나하나의 얼굴 얼굴들, 정답고 그리운 얼굴들. 다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지만 내 어찌 그들을 잊을 수 있으며 내 기억속에서 지울 수 있으리오. 친구들이여, 건강하라, 다시 만날 때까지.
갈 때나 올 때나 동생은 여전히 재잘거렸고, 우리들을 웃겼으며 가끔씩은 문양과 함께 나지막히 부르는 노래가 묘한 뉘앙스와 함께 야릇한 감정을 갖게 했다.
어둠은 더욱 짙게 깔려 맞은편 차들은 헤드라이트를 켠채 끊임없이 줄을 이었고, 부산에 가까워 질수록 일행들은 피곤에 지쳐 차츰 조용해 졌으며 이로써 우리들의 여행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별들은 하나 둘 떠올라 반짝이고 있었고.....

작성자임종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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