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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동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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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가명, 뇌병변장애2급, 25)씨가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필자를 찾아온 것은 초복 더위에 지쳐 연거푸 냉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을 때였다.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OMR 카드 대리기입을 안해준대요”라고 말을 꺼낸 김씨는 그가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어떻게 준비했고, 왜 혼자서 OMR 카드를 작성하는 것이 어려운지, 그래서 연구소에서 무엇을 같이 했으면 좋을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주었다.

 김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필자는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무슨 시험이든 필자가 시험을 보려고 할 때마다 필자를 괴롭혔던 일들, 그 일들이란 ‘시험의 난이도나 출제경향 등을 살펴 이에 맞춰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느린 필기 속도를 만회하고 정확하게 답을 표기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시험일을 몇 달 앞두고 시험 주관처를 다니며, 시험시간을 늘려달라고 부탁하고 OMR 카드 작성을 해줄 사람을 구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장애로 인해 어려운 조건들도 ‘시험의 일부’라는 생각에 누구에게 당당하게 말 한번 못하고 주관처 담당자에게 머리 숙여가며 ‘점수동냥’을 해야 했다.

 김씨는 이런 자신의 현실을 ‘OMR 카드 대필 가처분 신청’이라는 언뜻 보기에도 생소한 방법으로 풀어가고자 했다. 김씨의 착찹한 심정이 느껴졌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우선 시험 실시 이전에 다른 동지들과 함께 주관처에 당당하게 요구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김씨의 동의를 얻어 긴급하게 회의를 꾸렸고 7월 28일 10여명의 여러 단체 동지들과 시험 주관처인 중앙인사위원회를 찾아 위원장 면담을 요구했다.

 애초부터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김씨의 요구를 거부했던 중앙인사위에 거는 기대는 크지 않았지만 함께한 동지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두어 시간의 협상 끝에 김씨와 중앙인사위는 ‘확대 OMR답안지 제공’에 합의했고 구체적인 사항이 정해지는 대로 김씨와 참여한 각 단체에 공문으로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합의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공문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일 필자는 중앙인사위가 우리와의 합의사항을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도 공무원시험 본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필자는 이 사실을 신문기자로부터 전해 들었고 신문기자에게 부탁해 보도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도자료 어느 곳에도 우리의 당당함은 없었다. 단지 장애우들의 ‘점수동냥’을 받아준 선량한 공무원만 있을 뿐이었다. 

글 조병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

작성자조병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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