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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소리] 장애우 가족이 있는 것이 축복인 세상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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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우에 대한 선진 사회의 태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정도다. 미국은 장애우가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 사회가 아니라 비장애우들이 장애우와 같은 대접받기를 요구하는 사회다.”

 예일대학에 연수가 있는 정신과 전공의 후배가 미국 사회에 대해 소개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후배는 그 글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시각으로 미국 사회의 장애우에 대한 태도를 기술하고 있었다.

 장애아동이 전학을 왔다고 한다. 그 아이를 위해 특수교사 한 명이 더 채용되었고, 점심 시간에 선생님과 전교생이 그 아이가 먼저 식사를 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아들이 놀란 것은 누구도 이에 대한 불평이 없었다는 것이다. 장애아인 반 친구를 놀리는 아이는 존재할 수 없는 분위기고, 아이들도 당연히 장애아동과 스스럼없이 지낸다는 것이었다. 장애아동의 얼굴 표정이 굳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도 그 아이와 노는 것을 당연해했고, 아버지의 질문을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후 장애우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를 더 유심히 지켜 보게 됐다고 한다. 한 번은 디즈니랜드에 갔는데 놀이기구를 타느라고 1시간 이상 줄에 서 있었다고 한다. 후배의 가족들도 지루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치기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국도 별 수 없는 나라군’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 줄의 모든 사람이 가벼운 항의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조금은 의아해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한 무리의 사람 중에는 장애우가 한 명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장애우가 있으면 그 가족까지도 덩달아 대접받는 사회’라는 사실이 놀랍기 까지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서구 사회에서 장애우들이 인간답게 사는 예는 숱하게 볼 수 있다. 스키장에서 리프트가 멈춰 서서 나중에 보니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스키를 타더라는 것이다. 요행히 그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가 있는데 대화 내용은 ‘눈은 보이지 않지만 감촉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스키를 탈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일반인들이 당연히 불편을 감수하는 사회인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여행 다니는 서구인도 여행 중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의 자연스러운 연장일 것이다.

 장애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거나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되는 사람은 인간 사회에 늘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실 모든 사람들은 다 어두운 점을 갖고 산다. 자신의 약한 부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며 사는 사람들은 적지 않은 정신적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노출시키면 소비할 필요가 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고, 그 낭비되는 만큼 생산적인 활동에 장애를 가지게 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의 약한 부분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나 노출되었을 때 화를 내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늘 피로하다. 당사자에게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은 예상보다 크다. 나중에는 만나서 대화하는 것조차 짜증나게 된다. 장애우에 대한 불필요한 편견은 실제적으로는 사회 구성원을 짜증나게 한다.

 서구인들이 장애우를 ‘대접’하는 모습은 불필요한 정신적 에너지의 낭비를 줄일 뿐 아니라 통쾌하기까지 한다. 유모어 중 가장 차원이 높은 유머를 자기애의 승리(Narcissistic triumph)라고 한다. 자신의 단점과 불행을 유머의 주제로 삼는 것이다. 유머를 통해 이미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단점이 되지 않는다. 이미 그 단점을 통쾌하게 이겨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서구인들에게 장애우는 숨겨져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유쾌한 가족이나 사회 구성원일 뿐이다. 서구 사회의 장애우는 자랑스런 구성원인데 비해 우리 사회의 장애우는 불필요한 편견 때문에 무겁고 숨겨져야 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정신적 에너지가 쓸데 없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심리적인 에너지가 향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인간은 타인에 행하는 에너지를 적정양 가져야 심리적인 안정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장애우가 있는 가정에서 장애를 지닌 사람은 약간의 편견만 교정된다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부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을 마음껏 사랑한다. 약할 수밖에 없는 아기는 모든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심각한 장애를 가진 가족 구성원은 다른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사랑의 에너지를 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사랑을 받는 구성원 뿐 아니라 주는 구성원의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다 준다.

 장애를 가진 구성원이 있는 집안 사람들이 장애를 당당히 드러낸다면 장애우가 있는 가정은 심리적인 안정 상태를 더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심성이 밝은 장애우는 주변 사람들을 통쾌하게 한다. 따라서 한 가정에 중증 장애우가 있다는 것은 사랑의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이 고독한 현대 사회에서는 축복일 수 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 그것은 장애를 가진 구성원에 대한 축복이 아니라 사랑이 결핍한 현대 인류에 대한 축복인 것이다.


글/ 김병후 (김병후정신과의원 원장)

작성자김병후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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