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암리, 그 소소한 일상 속으로  > 대학생 기자단


외암리, 그 소소한 일상 속으로 

[주제가 있는 이야기] 삶의 쉼표, 그리고...(1)

본문

  실연 당한 Y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자 떠난 길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이 Y에게 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지각을 안 하기 위해 초까지 세가며, 힘겨운 고개길을 허벅지가 아프도록 다리에 힘을 줘가며, 마치 경보 경기의 주자처럼 뒤뚱거리며 오르고 있었다. 그럴 땐 전철역에서 15분이 넘게 걸리는 통근길이 그리 야속할 수 가 없었다. 출근시간 그 길 위엔 '왜 내가 이 길에 서있는가'라고 회의하는 볼품없는 이십대 후반의 왜소한 인간이 빠른 걸음을 걷고 있었고. 물론 저녁시간엔 '드디어 해방이다. 이제부터 나의 하루가 시작이군!' 가뿐하게 고개길을 내려오는 철부지가 나 하나만은 아니었겠지만.... 과도한 저녁놀음은 출근시간을 위협했고, 이런 악순환은 벌써 일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적성에 맞지않는 업무탓을 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Y에게 전화가 온 것은 바로 금요일 저녁이었고, 오랜만에 서울을 벗어나 어디든 가자고 약속을 했다. 매사에 신중하고 빈틈이 없는 깔끔한 성격 때문에 언제나 평균적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였지만 목소리에서부터 혼란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Y는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듯 했다.

  민박이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 일요일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 서로를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불편했던 기억이 없는, 소소한 즐거움으로 그 시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과 여행을 해본 사람은 둘이 가는 여행의 자유가 어떤 것인가를 안다.

  답답하고 돌파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정글을 지나고 있는 자답게 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다 지친 자답게 Y의 얼굴도 휴식의 기쁨으로 빛난다. 새벽에 한줄금 내린 소나기 탓인지 길 양옆으로 펼쳐진 풍광이 멀리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너 그때 생각나니? 로 시작되는 대화는 우리를 시간의 저편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간간이 터지는 웃음... 그땐 그랬지, 거리상으로만 서울과 멀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으로부터도 우리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안온함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외암리 민속마을에 도착했다.

  높지 않게 차곡차곡 정감어리게 쌓아진 돌담길 안쪽으로 초가지붕, 기와지붕이 소담스럽게 무리지어 있었다. 집집이 가지를 뻗은 감나무며 모과나무며 라일락이며.... 앞들에 곱게 핀 채송화, 봉선화, 뒤뜰에 가지런히 놓인 항아리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마당 물가에 직수굿이 자리를 차지한 수국들. 그곳은 마치 산업화의 물결이 그 곳만을 피해간 듯 전형적인 우리들 마음속 고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돌담길의 시원함을 더해주는 느티나무터널이며 돌담길을 감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은 그 곳을 세상의 무엇으로부터도 보호해줄 듯 보였다.

  한바퀴 도는데 반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길을 느리게 느리게 걸었다.

  산책과 산보의 차이가 뭔 줄 아니?

  ......

  산책은 책을 끼고 걷는 거고 산보는 그냥 걷는 거란다.

  여전하구나

  힘든 수련에서 튕겨져 나와 거리를 배회하는 수도자들처럼, 아담하고 소박한 돌담을 끼고 돌고 도는 산책길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불러 일으켰다. Y와 내가 태어나서 자란 마을보다 오히려 더 고향 같은 익숙함과 편안함이 마음속에서 차 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마을의 꼬마들에게 주저 없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몇 학년이니?”

  “중학교 3학년인데요.”

  “너 참 좋겠다! 이렇게 예쁜 동네에 살아서...”

  “예, 근데 아버지는 좀 싫어하셔요.”

  “왜?”

  “저를 늦둥이로 낳으셨거든요. 그래서 좀 연세가 많으신데요. 여기가 민속마을로 지정되고부턴 함부로 집을 고치지 못하거든요.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불편하게 사는 동네는 우리 동네밖에 없을 거래요.”

  그래, 그들의 일상이 도시인들의 구경거리로 내놓아진다면 좋지 않을 거야. 집집이 꼭꼭 닫은 창문들과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촌로들의 무심한 얼굴 속엔 외부인에 대한 달갑지 않음이 숨어있을 지도 몰랐다.

  변해가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마을엔 아예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갔는지 폐가가 서너 채 있었다. 폐가 주위엔 돌담도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읽는다. 갑자기 Y는

  “나는 만나기 싫은 어떤 문제와 만난 생각이 든다. 그와 헤어질 때도 그랬지만, 완벽한 내모습이 깨지는게 싫어서 지금까지 감추어 왔던 내마음을 여기서 만났다는 생각. 나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던 내 속마음, 나는 겉으로 보여지는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만을 나라고 생각해왔던 거야.

  “......”

  사실 나는 Y와 반대의 생각을 했다. 너무 철이 없어서 그랬는지 속이 없어서 그랬는지 나는 늘 사람들에게 헤매고 갈등하고 힘들어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었지, 정리되고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내가 참아내지 못한 불편과 불안을 딛고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Y와 외암리가 존경스러워졌다. 나는 무성한 생각의 잔치에서 걸어나와 일상의 소소함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서 나에게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사무실 일이야 말로 나에겐 Y가 감추었던 속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한 것일까, 보여지지 않는 모습이 중요한 것일까?

  Y와 나는 느리게 느리게 마을을 한바퀴 더 돌았다. 여전히 돌담길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늑하고 호젓하다. 그림같은 이 곳에서 나와 Y는 한 점 일상으로 외암리 사람들에게 남을 지도 몰랐다.

  외암리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자유로움과는 또 다른 너그러움이 있었다. ‘다른 나’를 만나고 돌아오는 Y와 나는 조금은 멋쩍은 듯 애매모호한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월요일 출근시간이 좀 가벼워졌다.


글/ 유혜경 (학원강사)

작성자유혜경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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