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보낸 한 시절 > 대학생 기자단


죽음의 수용소에서 보낸 한 시절

본문

저는 최근 시설비리를 이 사장이 구속된 "ㅅ"재단 산하 "ßí"요양원에서 97년 1월부터 99년말까지 생활했던 여성장애우입니다. 시설에서 나올 당시 제 나이는 열아홉이었죠. 가정형편이 어려워 저는 사춘기 시절을 그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원봉사를 하러 온 남편을 만나 시설에서 간신히 나왔고,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저는 "ßí"요양원에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괴로운 기억뿐이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그곳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기로 한 건, 생활시설의 실상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시설에서 나와서 사는 장애우도 별로 없거니와, "ßí"요양원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 정신지체장애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실제로 요양원에서 생활했고, 시설에서 나와 자립한 사람들이 그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설이 있는 강원도 철원은 매우 춥습니다. 제가 생활했던 방도 정말 추웠습니다. 자면서 "추워, 추워" 란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죠. 이불을 6~7장씩 덮고 자야 그나마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감기에 하도 많이 걸려서 결국 편도선을 없애야 했습니다. 겨우내 앓은 감기가 여름까지 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저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요양원에서는 동상에 걸리는 일쯤은 아주 흔했습니다. 특히 정신지체인들이 그랬는데, 동상에 걸려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죠. 대신 보모들이 동상 걸린 발에 꿀을 발라줬는데 그래도 낫지 않아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생 중 하나는 결국 발을 잘라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추운데도 시설에선 난방은커녕 양말이나 속옷도 제대로 안줬고,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후원 물품으로 겨울에는 여름옷이, 여름에는 겨울옷이 들어온다는 게 이유였죠. 사정이 이렇다보니 어떤 보모는 안타까운 마음에 자기가 입던 옷을 속옷으로 만들어와 입힌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보모라고 해도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 순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요양원의 장애우들이 모두 그렇게 사는 동안 재단 이사장은 시설운영비로 나온 국고 몇십 억을 횡령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정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장애우들을 돌봐야할 보모들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이사장의 농장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층에 50명 정도의 장애우가 있는 곳은 보모 2명이, 100명 정도가 있는 곳은 보모 4명이 돌봐야 했고, 때문에 보모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주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정신지체 아이들은 화장실에서 비누나 락스 같은 것을 먹고 쓰러지기도 했고, 한 아이는 작은 실톱으로 머리를 그어 머리가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 치료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보모들은 농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자해나 사고가 벌어지니까 정신지체 아이들에게 CP(항정신성의약품, 정신과전문의만이 처방할 수 있다)라는 약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때로는 이틀이고 삼일이고 깨어나지 못하고 잠만 잤죠. 보모 4명이 장애우 100명을 사고 없이 돌보려니 정신과 약을 먹여 재워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보모들에게 농장일을 시킨 것이 모두 이사장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믿지 못하겠지만, 요양원 장애우들은 물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물을 먹으려면 밥 때까지 기다려야 했죠. 그나마 지체장애우들은 물을 떠다 달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정신지체인들은 그런 의사표현조차 못하니 밥 먹을 때나 돼야 물을 먹을 수 있었고, 물이 먹고 싶은 정신지체인 화장실 변기 물을 퍼먹기도 했습니다. 말리려고도 해봤지만 저는 지체장애 때문에 도저히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99년도에 김**이라는 친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보모가 농장에 일을 하러 나갔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보모는 농장에 일을 나가기 위해 **를 묶어뒀는데, 7~8시간이나 묶여 있던 **가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쓰다가 끈이 더 조여 손목과 발목에 피가 안 통하는 지경에 이른 겁니다. 이 때문에 **는 결국 손목과 발목을 절단해야 했고, 그러고도 **는살아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를 맡은 보모 2명은 해고됐습니다. 그러나 이건 보모들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요양원 측은 일 나가는 보모들에게 자해를 하는 장애우들의 팔다리를 묶어두고 나오라는 방송까지 했거든요. 결국 이사장이 보모들을 농장일을 시키려고 동원해 가서 생긴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이사장은 사고가 나면 모든 책임을 다 보모들에게 돌렸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더 말을 하자면, 농장에 일을 나간 사람들은 보모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작업이 가능한 정신지체장애우 남자들도 일을 나갔습니다. 그 친구들에게는 더 험한 일을 시켰는데, 바로 농장에서 사육하는 소, 돼지, 개를 잡는 일이었습니다.
정신지체가 있는 ##씨는 늘 피투성인 채 칼을 들고 다녔습니다. 뭘 하냐고 물으면, "돼지, 개, 소도 잡아. 그러면 선생님(관리직 직원)들도 먹고 그래"하고 대답했는데, 그 사람 몸에서 피비린내가 나도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투성이인 채로 돌아다니는 걸 다른 시설생활인들이 보고 놀라면 재미있어 했죠. 그러면서 ## 씨는 "도끼로 목을 내리 찍는다", "개는 거꾸로 매달아 잡는다"하면서 농장에서 했던 일을 얘기해주었습니다. ##씨는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에에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해 도끼, 낫, 칼 등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요양원 측은 ##씨에게 그런 험하고 위험한 일을 시키고도 월급조차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양원에서 장애우들이 대접 받는 날은 감사가 있는 날 뿐이었습니다.
요양원 감사원들이 나오면 하루 종일 "깨끗이 치워라, 묶어놓은 아이들은 다 풀어놓아라."하는 방송이 나옵니다. 평소엔 보모들이 헌옷으로 만든 기저귀를 쓰는데 그땐 일회용 기저귀로 바꿔 채워주죠. 보모들은 락스물을 풀어서 대청소를 하고, 저 같은 여성장애우들에게는 원피스를 입히기도 합니다. 따뜻한 물도 나오고, 평소엔 한 방에 하나씩 주던 우유도 4~5개씩이나 줍니다. 방도 뜨끈뜨끈하고 평소엔 안 틀어주던 온수도 몇 시까지 나온다고 방송을 합니다. 보모들도 그날만은 농장에서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안 주던 크림빵도 그날은 넘치도록 주고 생전 보지도 못한 과일도 나옵니다. 멀건 김치국은 없애고 고기나 생선 반찬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 뜨는 날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그날은 행복했습니다.
요양원에선 감사가 나오는 날이면 이런 저런 교육도 시켰습니다. "감사원들이 왜 상처가 났느냐고 하면, 작업하러 가서 아이들을 못 본 사이에 그렇게 됐다고 하지 말고 혼자 넘어져서 그렇다고 대답해"라고 말이죠. 감사원들이 시설을 돌아다니면 원장은 그 뒤를 따라 다니면서 흡족해하며 "아이들은 늘 이렇게 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혔지만 우리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감사원한테 솔직히 말할 기회도 없지만 말하고 나면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처음엔 재단 이사장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얼굴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사무실 직원들은 대부분 이사장 가족이었습니다. 이사장의 먼 친척부터 가까운 친척까지. 재단 이사장 조카인 조 씨는 제가 처음 입소할 때 "생계비를 맡기면 나중에 시집갈 때 살림장만 해준다"며 생계비 통장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었죠. 나갈 때 돈을 주겠다고 했던 그는 정말 제가 시설 밖으로 나가게 되자 겨우 70만원만을 주었습니다. 제가 "3년 동안 월 15만원씩 540만원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왜 이거밖에 안주냐"고 하니까 조 씨는 "여태까지 네가 쓴 돈이 얼마냐, 네 병원비로 다 썼다"고 하더군요. 저는 의료보호대상자이기 때문에 병원비가 들지 않습니다. 억울했지만 저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조 씨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동안 어린 저의 허벅지를 만지며 "아빠라고 불러라"라고 했습니다. 어깨도 만지고 손도 만지고 하였지만 저는 그때 어려서 그게 어떤 것인지 몰랐습니다.

시설에 있는 3년 동안, 저에겐 많은 병이 생겼습니다. 감기를 달고 살아서 편도선도 제거했고, 요양원에 가기 전 국립재활원에서는 소변줄 안 꼽고도 잘 지냈는데, 요양원에 들어온 후에 신장도 안 좋아져 신우신염이 생기는 바람에 결국 지금까지 소변줄을 달고 삽니다. 요양원에 들어간 후 춥고, 물도 안주고, 물리치료실(어차피 물리치료사도 없고, 매트리스 하나만 형식적으로 있는 곳이지만)도 못 들어가게 하여 결국 배꼽 밑을 뚫어서 소변줄을 달았죠. 나중에는 도저히 그런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보모 몰래 아이들에게 주는 CP를 먹은 거죠. 처음엔 반알을 먹었는데, 하루 종일 잠만 자고 깨어나기에 다음엔 4알을 먹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병원에서 4~5일을 혼수상태로 있다가 간신히 깨어났다고 하더군요.
저는 죽고 나면 아프지도, 배고프지도, 춥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똑똑하고 사춘기 어린 시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당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요양원에서 계속 살았다면 저는 아마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생활하는 동안 죽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당시 저는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절박했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시설에서 나올 때 저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저는 그 요양원에서 3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정말 끔찍한 생활이었습니다. 아무리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우라지만, 그건 사는 게 아닙니다. 죽지 못하는 것일뿐입니다. 제 삶에서 3년을 그렇게 살게 한 사람이 바로 재단 이사장인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고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존경받고 살았겠지요. 저희는 죽음 같은 고통 속에에서 살았는데 말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요. 저는 이 땅에서 이런 시설들이 없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시설에서 사는 장애우들은 고통 속에 몰아넣고는 운영비로 배를 불린 사람들은 반드시 꼭 처벌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저를 비롯해 거기서 고통을 당한 장애우들과 비참하게 죽어간 장애우들 삶을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작성자함께걸음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